## 1169화
클레망 랑스는 인생이 별로 재미없었다.
브뤼셀에서 아버지는 회계사, 어머니는 외교관이라 사는 데에 문제는 없었고 좋은 머리를 물려받아 무엇을 해도 적당히 잘 해내곤 했다.
겐트 대학교에 진학하여 그 지옥 같다는 1학년 과정도 클레망은 그럭저럭 잘 버텼다.
되레 실력주의로 평가하니 억지로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대학에서 배운 것들에 대한 결과물들을 제출하고 나온 클레망은 1학년이 끝났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퇴를 고민했다.
이런 시간을 몇 년이나 더 보낼 것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취미도 없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클레망은 어차피 대학을 가지 않아서 시간이 남아돌았어도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방황하는 자퇴생이 되느니 대학에라도 다니는 게 나았다.
‘졸업장이라도 남을 테니까…….’
1년 동안 대학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약간 무기력한 기분을 가지고 브뤼셀로 돌아온 클레망은 집에서 들리는 소리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끔 집에서 봉사를 하긴 했지만…….’
그의 집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호스트 패밀리로서 종종 음악가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클레망이 훨씬 어릴 때부터 5월이면 그런 사람들이 집에 오는 걸 봐 왔다. 때문에 집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니 5월이 왔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전에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클레망의 정신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피아노 소리가 가끔 듣기 좋고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어도 이 정도로 섬세하게 사람을 흔들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연주의 주인공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여자애였다는 사실엔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
‘천재인가?’
피아니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타티아나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있지 않아도 그녀에게선 품위가 느껴졌다. 마치 피아니스트라는 존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약간 차갑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타티아나는 클레망을 살갑게 대해 주었다.
피아노를 이 방에 옮겨 놓은 이야기를 그녀가 먼저 꺼내면서 고마움을 표시했을 때, 클레망은 치솟는 입꼬리를 누르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물론 피아노를 옮길 때는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 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말도 잘 통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그전에도 모르는 연주자들이 집에 머문 적은 있었지만 클레망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외국에서 온 연주자들은 영어나 프랑스어를 잘 못 하는 일도 많았고, 호스트 패밀리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자기 연주에 집중하여 시간을 쏟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레망은 타티아나라면 친해지고 싶었다.
그녀 쪽에서 귀찮아하지 않는다면 브뤼셀에서의 생활을 이래저래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인사 후 방문을 닫고 나왔을 때, 데보라는 꿈 깨라는 듯 클레망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타티아나를 귀찮게 하면 안 돼. 알겠니? 클레망.』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아니, 그러면 그냥 무시해? 저 애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예의상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 모르겠니?』
아무리 그래도 아들에게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어 클레망은 인상을 썼다.
그래도 데보라는 요지부동이었다. 만약 클레망이 귀찮게 군다면 당장 집 밖으로 쫓아내기라도 할 법한 분위기였다.
그녀가 타티아나를 무척이나 아끼면서도 뭔가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망은 이렇게 강경한 어머니를 마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니까. 알아서 할게.』
『네가 그렇게 말하고 제대로 한 일이 있긴 하니?』
『왜 그래, 진짜?』
자꾸 이러면 클레망도 유치하게 대학 성적 같은 걸 자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래 봐야 데보라가 코웃음도 치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아까 타티아나처럼 칭찬을 받고 싶었다.
살짝 기가 죽은 클레망이 터덜터덜 걷자 다시 한번 데보라가 말했다.
『아무튼 절대 콩쿠르 중엔 방해하지 마. 저 애는 정말 파이널까지 가고도 남을 테니까.』
『파이널? 정말 그 정도야?』
『그렇고말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12인 안에 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클레망은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만 되어도 벨기에 전역의 언론들이 난리가 난다. 각 연주자마자 일거수일투족이 뉴스에 날 정도다.
12명의 가장 말단이어도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곳은 많다.
사실 타티아나처럼 어린 나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가 된다면 인생이 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데보라는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식견이 없는 클레망과 달리 데보라는 오래 전부터 클래식 음악과 가까이해 왔다.
정말 이번엔 뭔가 가능성이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클레망은 더더욱 타티아나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정보를 찾아보면 볼수록 정말 별나라 사람 같다는 기분만 들었다.
‘열일곱 살 맞나……?’
타티아나의 이름을 인터넷에 치니 정말 수두룩하게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압도적인 기량에 대한 찬사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그녀의 집안인 베르체노프 콘체른과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은 것 등 타티아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은 그녀를 거의 새 시대를 이끌 만한 신예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 존재하는 정보 외엔 특별히 무언가 찾기 어려웠다.
‘요즘 세상에 SNS 하나 안 하는 애가 있네…….’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개인인 타티아나는 평소에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조금 궁금해져서 SNS를 찾아보려 했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면서 클레망은 중얼거렸다.
『저 나이에 저 경지에 오르려면 다른 걸 할 시간은 없었겠는데…….』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을 되새겨 본 클레망은 지금 자신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곤 헛웃음을 흘렸다.
잠깐 사이 벌써 어떻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어머니가 한 신신당부를 떠올리며 클레망은 일단 급발진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했다.
그는 기숙사에서 가지고 와선 내팽개쳐 놓은 짐들을 다시 하나하나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 랑스가의 식구들과 타티아나는 저녁 식사를 위해 부엌 쪽으로 모여들었다.
{접시에 나누어 담을게요.}
타티아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사 준비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접시들과 샐러드 볼을 챙겨 들고 나누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딸이라도 된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클레망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결국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야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 4명분의 식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맛있게 먹으렴.}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기쁘게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뭔가 특별할 것만 먹을 것 같은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감자볶음을 먼저 집어 먹었다.
그녀에 대한 여러 생각 때문에 되레 조금 조심스러웠던 클레망은 다시 식사를 하면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다. 클레망이 아무리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도 그녀는 웃으며 받아 주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클레망은 학기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왔음에도 대화 주제에서 밀려났다. 지금 이 집 중심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다름 아닌 타티아나였다.
클레망은 거기에 별로 불만이 없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뿐이다.
{그럼 오늘은 계속 연습만 하는 거야?}
{그렇겠죠?}
{힘들겠네.}
별생각 없이 한 말에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더니 대답했다.
{제가 선택한 길이라 괜찮아요.}
그 말에선 어쩐지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지향하고 책임지려 하는 그 태도는 어디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제야 클레망은 칭찬에 인색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왜 이 아이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클레망은 속으로 조금 감탄하면서 이어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8시에도 무대가 있었지?}
{예. 제 친구의 차례예요.}
{친구?}
타티아나는 같이 세미파이널에 오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의 임세연이라는 피아니스트였다.
대체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궁금했지만 클레망은 그런 질문들을 꾹 참으며 일단 지금 타티아나가 신경 쓰는 그 친구에게 집중했다.
{어떻게 볼 생각이었어?}
{그냥 방에서…….}
{그러지 말고 거실에서 봐.}
주말에 호스트 패밀리를 방해하지 않고 혼자 방에서 조용히 볼 생각이었나 본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같이 봐도 상관없다.
타티아나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미안해했지만 이어서 데보라와 파스칼도 그렇게 하길 종용하자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8시 즈음이 되어 네 사람은 다시 거실에 모였다.
클레망은 거실에 타티아나가 있는 것만으로도 보통 주말 저녁과는 다르게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외모와 특유의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금방 영향을 끼쳤다.
거실에 과일을 가지고 왔을 때,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타티아나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줄래?}
저녁 식사 준비 때도 자연스럽게 타티아나가 한 손 거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칼을 쥐는 걸 보며 클레망은 깜짝 놀랐다.
{피아노 치는 사람이 칼을 잡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후후, 괜찮아요.}
정말 순수한 걱정이 들어서 물어보았으나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능숙하게 칼을 쥔 손을 움직였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그녀가 상당한 숙련자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약간 머쓱해진 클레망이 말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네.}
{예전엔 고무장갑을 끼고 연습했었어요.}
{고무장갑……?}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타티아나를 가만히 보면서 클레망은 여러 가지를 느꼈다.
그녀는 분명 특별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묘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론 보통 사람들이 특별해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런 것도 특별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클레망은 그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상황만 놓고 보면 타티아나는 세간에 그 위명을 떨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인다.
{아, 시작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막 콩쿠르 중계가 시작되자 타티아나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눈빛에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무어라 말을 걸려 했던 클레망은 섬뜩한 기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