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0화 (1,170/1,277)

##  1170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 진출자로서 특별히 세연에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무대에 올라야 하는 당일이 되면 콩쿠르 측으로부터 안내를 받아서 준비하고 플라지 빌딩으로 향하는 것까지 1라운드 때와 동일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조금 달랐다.

시간에 맞추어 드레스를 갈아입고 외적인 준비를 하는 내내 세연에겐 직원이 3명이나 붙어 있었다.

73명이나 되던 처음엔 각개 참가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 24명으로 한 차례 압축되고 나니 보다 인력의 밀도 등이 증가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콩쿠르의 중심부터 들어온 것 같다는 압력을 느끼면서 세연은 떨지 않으려 애썼다.

기껏 열심히 준비했는데 지금 떨어 버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럴 때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이연주는 청심환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세연은 청심환으로 긴장을 달래고 나면 되레 연주에서 표현력이 확 죽는 경향을 느꼈기에 약을 먹지 않았다.

긴장 해소에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주 전에 커피나 껌, 담배 등으로 긴장을 푸는 연주자들도 많다.

그런 루틴이나 기호가 하나쯤 있으면 조금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연은 그런 것 없이 떨림을 온전히 마주했다.

‘이 정도는 컨트롤 할 만해.’

언제부터인가 세연은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서야 할 때면 스스로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본래 그리 계산적인 성격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릴 때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가장 좋은 건 그 감정마저도 연주에 일종의 텐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태도나 의식의 변화를 세연은 타티아나로부터 배웠다.

평소 얌전한 듯 보이지만 사실 불 같은 성정도 지니고 있는 그녀가 스스로를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무대를 보며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며 외적인 부분과 내적인 부분 모두를 점검한 세연은 도와준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곤 콩쿠르 사무실로 향했다.

바로 대기실로 가기 전에 잠시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다.

{여기 계십시오.}

{예.}

안내해 준 직원이 잠시 자리를 뜨고, 세연은 드레스 자락을 잘 정리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 옆에는 턱시도 차림의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세연은 그를 보자마자 그녀 다음 순서인 휴고 페데르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머뭇거리며 그쪽을 바라보자 그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쿨하게 인사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해도 다 소용없었다. 세연이 버벅거리자 휴고가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 드레스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그, 페데르센 씨도 멋있으세요.}

{고마워요.}

별것 아닌 대화였음에도 휴고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화려한 이력과 실력을 지닌 노르웨이의 피아니스트였다. 이런 자리가 역시 익숙해 보였다.

세연도 질세라 그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말을 더 붙였다.

{오늘 준비 잘하셨나요?}

기껏 나온 말은 정말 눈치 없이 느껴졌다. 세연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차라리 휴고가 무시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휴고는 생각 이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럭저럭요. 임세연 씨는?}

{저도 그럭저럭…….}

{긴장한 것처럼 보이네요?}

{약간요……. 잠시 후에 바로 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을 느끼는 것 자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일엔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잘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그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되지 않았다.

휴고는 소파에 조금 더 편하게 앉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주위를 힐끔 보더니 세연에게만 들리게끔 말했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합시다.}

{예?}

{일찍 치는 편이 나아요.}

어떤 순서를 좋아하는지는 그냥 개인 성향 차이 아닌가?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먼저 치는 걸 선호하시나 봐요?}

{아뇨, 원래는 나중에 나가서 강하게 각인되는 걸 좋아하죠.}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한 세연이 다시 묻자 그제야 휴고는 둘 사이의 엇갈림을 알아차리곤 웃었다.

{하하, 일반적인 상황이랑은 다르죠. 이 콩쿠르는 좀 특이하잖아요?}

{어떤 부분이요?}

{오늘 연주를 끝내자마자 바로 파이널로 갈지 떨어질지 결정된다는 부분 말이에요.}

휴고의 설명은 짧았지만 세연은 그것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연주자들에게 하는 요구나 심사, 일정 등 모든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콩쿠르였다.

세미파이널은 6일간 진행되는데, 마지막 날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그날의 진출자를 바로 발표한다는 것이 또 굉장히 특이했다.

세연은 그 규칙으로부터 자신이 이해한 바를 말했다.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24명 모두의 실력을 다 확인하고 그중 12명을 추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첫날부터 올려 보내야 하니…… 자리가 어느 정도 차 있는 후반보다는 초반 심사가 조금 더 유리할지도 모르겠네요.}

{전 분명히 영향이 간다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사실 세연은 그 규칙을 알고도 별생각 없이 오늘 결과가 모두 나올 테니 가슴 졸일 일 없이 시원하겠다고만 생각했지만 휴고는 규칙을 조금 더 요령껏 이해한 모양이었다.

세연은 조금 즐겁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내용 자체가 혼자서 떠올리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고, 같은 처지에 있는 참가자와 대화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재미있네요.}

{긴장이 조금 풀렸나요?}

{덕분이에요.}

세연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리를 흔들거리자 휴고는 조금 더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다는 듯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찰나, 직원이 들어오며 세연을 불렀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임세연 님, 이제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따라오십시오.}

세연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휴고와 인사했다.

{이야기 즐거웠어요.}

{저야말로.}

같이 일어난 휴고는 악수를 권했다. 그냥 인사만 할 줄 알았던 세연은 살짝 놀랐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받아 주었다.

그의 손에선 강한 연주자의 호의와 에너지가 느껴졌다.

세연과 악수를 나누며 휴고는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좋은 연주를 하시길 바랍니다.}

어찌 되었든 이곳까지 올라온 인연이다. 경쟁자보다는 동료 의식이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세연은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을 나와 직원을 따라 복도를 걷는 동안 세연은 긴장을 조금 더 잘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무대에 서기 위해 준비 중인 게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런데 살짝 앞서 걷던 직원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휴고 님과 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예? 아…… 예.}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제가 아는 것이라면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 소리가 밖까지 들렸던 것 같다. 그 내용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세연은 약간 조심스러워하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걸으며 세연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직원이 아는 것이 조금 더 많겠거니 싶어 세연은 휴고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직원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공정함을 중시하는 콩쿠르를 진행하는 직원답게 사무적인 표정으로 세연에게 설명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6일간 매일 인원을 선발해 12명을 채워야 하는 심사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하루에 2명씩 뽑는 일은 없습니다. 첫 3일간 1명도 뽑지 않고 이후 3일간 12명 모두를 뽑는 일도 있겠죠.}

실제로 그렇게 진행하면 상당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필요하다면 그리 진행하고도 남을 콩쿠르였다.

세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 당연히 그렇겠죠? 아하하…….}

{그리고 만약 파이널리스트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면 열세 번째 인원을 선발하기도 합니다. 혹은 인원을 다 뽑지 않고 11명으로 진행하기도 하고요.}

요컨대 순서가 어떻든 파이널에 남은 자리가 몇 개든 상관없이 심사는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연은 휴고나 직원의 이야기 둘 다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다.

점수를 매기는 심사 위원이 11명이나 되니 아마 몇 명은 매일 균형 있게 선발하길 원할 테고, 몇 명은 뽑을 사람이 없다면 아예 한 명도 뽑지 않을 생각으로 엄격하게 심사하겠지.

‘결국 모든 관점과 기준이 반영된다고 생각해야 해.’

24명으로 좁혀진 후 참가자들에게 쏠리는 시선이 훨씬 더 강해졌다.

세연은 이곳에 오자마자 그것을 느꼈다. 곧 수많은 평가의 평균으로 세연의 앞날이 결정될 것이다.

세연은 어떤 의견을 듣든 간에 한쪽으로 기울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많은 사람에게 각각 맞출 순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음악을 할 뿐이다.

떨림은 더욱 잦아들었다. 연주자 대기실 앞에 섰을 때, 세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여유를 가지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이미 대기 중입니다. 리허설은 불가능하지만 무대에 서기 전까지 어떤 이야기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세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이 대기실 문을 열어 주었다.

대기실 안엔 어제 봤었던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오케스트라는 마치 그 전체가 검은 광택이 흐르는 하나의 악기를 연상케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지휘자, 가스파르 말레가 세연을 돌아보고는 가볍게 물었다.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어제보다 좋아요.}

세연은 일부러 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대답이 썩 괜찮았는지 오케스트라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연주는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할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요령은 아시겠죠?}

{조금은요.}

단 1시간 리허설을 하면서 이 오케스트라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긴 어려웠다.

단지 세연은 어느 정도 힘을 가했을 때 오케스트라가 따라오는지 가늠했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면 오케스트라가 절대 호응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적합한 의도로 피아노를 앞장세운다면 가스파르는 그것을 굉장히 예민하게 느끼고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뒤따르게 만든다.

가스파르와 오케스트라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 지점은 마치 지렛대의 받침점처럼 세연이 파악하고 이용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세연은 가스파르를 바라보았다. 저 노련한 지휘자는 결코 세연을 압박하는 장해물이나 적이 아니다.

그것만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무대 위에서 세연의 지지자가 되어 줄 터였다.

세연이 미소를 짓자 가스파르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마주 웃어 주었다.

{시작 20분 전입니다!}

직원의 안내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춰 단원들의 자세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세연은 거기에 최대한 동화되려고 하며 머릿속으로 거대한 협주곡의 시작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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