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1화 (1,171/1,277)

##  1171화

시작 10분 전.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먼저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임세연 양.}

악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세연에게 말했다. 그 믿음직한 모습에 세연은 얼른 일어나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곧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에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잡혔다.

이미 의자나 보면대 등은 협주곡을 연주하기 적합한 위치로 세팅되어 있었으므로 연주자들이 각 위치에 가서 앉은 다음 자기 악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기실엔 몇 명의 직원과 세연 그리고 지휘자 가스파르가 남아 있었다.

만약 세연이 조금이라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면 가스파르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고 조언 한마디쯤은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연에겐 그런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연주를 10분 남긴 시점에 급하게 해야 할 건 없었다. 두 사람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이미 거의 다 했다.

각자 차분하게 자신이 할 일을 되새기며 서로의 분위기를 살필 뿐이다.

세연은 다시 한번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하는 협주곡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했다. 몇 번 돌이켜 봐도 크게 어긋날 것 같진 않았다.

그사이 홀 안으로 청중들이 입장하는 소음과 오케스트라가 현을 만지는 소리 등이 다양하게 뒤섞이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곳곳에 스미면서 무대 직전의 분위기를 이루는 소리들을 느끼며 세연은 얕게 숨을 내뱉었다. 직원이 시작 1분 전을 알렸다.

맞은편에 있던 가스파르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밖이 시끄럽네요.}

{그렇네요.}

{슬슬 나가서 조용히 시킬까요?}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면서 호흡을 정돈하고 있자 무대로 입장하라는 안내가 들렸다. 가스파르가 먼저 앞장섰고 세연이 그 뒤를 따랐다.

빛나는 무대 위로 향하자 굉장한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이미 한번 서 봤던 무대였지만 오케스트라가 함께 있어서 그런지 기분이 색달랐다.

세연이 무대 중앙에 서기까지 박수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지휘자와 악장에게 순서대로 악수를 청했고, 이어 청중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박수 소리가 마지막으로 커졌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이제 세연과 오케스트라에게 소리의 사용 권한을 넘겨준 것이다.

세연은 차분히 의자에 앉았고, 어느 순간이라고 자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음악이 적막 속을 파고들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번…….’

1784년. 당시 20대 후반이던 모차르트가 최고의 작곡 실력을 뽐내고 있을 때 작곡된 곡으로 섬세한 음악성이 부각되는 곡이다.

다른 낭만 시대의 협주곡들과 비교하면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다고 할 순 없었다.

페달을 잔뜩 집어넣어 웅장하게 소리를 폭발시킬 필요도 없고, 혼자서 미친듯이 기교를 뽐내듯 날아다닐 필요도 없다.

피아니스트가 독주자로서 락 스타와 같은 지위를 가지기 전 시대에 작곡된 곡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 협주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와 잘 어우러져야만 했다.

음 하나를 치더라도 과해선 안 되고 모든 면에서 아티큘레이션이 합리적으로 지켜져야만 했다.

상당한 수준의 터치 컨트롤이 필요하고, 그 와중에도 묻히지 않도록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했다.

‘튀지 않아야 하지만, 정말 튀지 않으면 망해.’

굉장히 미묘한 부분이었다. 세연은 그 부분을 명확하게 염두에 두면서 먼저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의 전주 소리를 귀에 새겼다.

가스파르는 매우 유능한 지휘자였고, 어제 세연과 했던 리허설을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그의 오케스트라는 레퍼런스 연주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세연이 원하는 대로 언제든 따라갈 수 있도록 조금 더 유연하게 풀어져 있었다.

허공에 하늘거리며 날아가는 음악의 선율을 지켜보던 세연은 자신의 코앞에 그 선율의 끝이 왔을 때 손을 뻗어서 낚아챘다.

그다음엔 그대로 텐션을 유지하면서 그 선율을 살짝 당겼다가 다시 놓으면서 자신의 흐름을 따르도록 만들어야 했다.

‘정확하게…….’

이런 협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이해하지 못할 짓을 갑자기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사운드의 크기를 균일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박자를 늦춘다든가 하면 오케스트라가 아무리 신속하게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오차가 생긴다.

만약 변화를 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는 구간에서 미리 암시를 주고 천천히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다행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연주자들이 서로의 생각을 알아보기 좋은 구간이 많았고, 훈련받은 연주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잘 안다.

세연은 그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챙겼다.

‘너무 잘해 주시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오케스트라는 훨씬 더 세연을 잘 지지해 주었다.

연주하면서 타이밍을 감안하며 지휘자의 손을 살필 때마다 그녀의 생각을 거의 정확하게 읽고 있는 것처럼 가스파르는 지휘봉을 휘둘렀고, 세연은 억지로 무언가 할 필요조차 없었다.

탄성이 느껴지는 음향이 통일감을 이루며 세연의 뒤에 위치했다.

세연은 조금 더 자신 있게 음악을 밀어붙였다.

‘좋았어.’

모차르트 특유의 귀여운 음색이 오케스트라 위에서 통통 튀어 다녔다.

세연의 생동감 넘치는 터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 등 다른 곡들을 연주할 때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아 왔었다.

협주곡을 연주할 때도 그 터치는 빛을 발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운드가 조금 작아서 조금 더 키우느라 힘을 주긴 했지만 큰 상관 없었다.

세연은 지금 자신의 연주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자기만족은 곧 오케스트라도 좋아해 줄 테고, 청중들 역시 즐겁게 들어 주리란 믿음과 자신감으로 변했다.

노란색 풍선이 하늘로 떠오른다. 세연은 그 풍선을 잡고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보는 세상은 작고 아름다웠다. 그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세연은 참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이미 협연의 싱크로나 호응에 대한 우려는 사라져 있었다.

세연은 하고자 했던 모든 음악을 펼쳤고, 오케스트라는 헤매는 일 없이 세연의 음악을 그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이미 세연과 오케스트라는 서로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호흡을 확실하게 증명해 낸 후, 세연에겐 1악장 마지막의 솔로 카덴차 기회가 주어졌다.

이 카덴차야말로 세연이 15번 피아노 협주곡을 선택한 이유였다.

고전 피아노 협주곡에선 개인적인 성향과 실력을 뽐낼 여유가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제대로 살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케스트라가 모두 연주를 중단하고 활을 내려놓자 지금까지 진행된 음악의 무게가 오로지 세연에게만 가해졌다.

그녀는 심혈을 기울여 건반 터치에 집중했다. 그야말로 온 전신의 신경을 한곳으로 모으는 기분이 들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이러한 기분이 들 때면 종종 자신이 어떤 곡을 치는지도 모르게 될 때가 있었다.

세연은 자신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선이 어떤 선인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마 즉흥 연주를 주로 하는 재즈 스윙 연주자라면 반드시 넘어서고 싶어 하는 선일 것이다.

충실하게 쌓은 음악적 기량의 탑 지하에 있는 선물이 이 너머에 있다. 음악가로선 정말 중요한 선물이 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모차르트도 즉흥 연주를 주로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니 클래식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이 선물을 쥐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자리는 세연의 콘서트가 아니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모차르트의 클래식을 기준으로 두고 평가하는 심사 위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세연이 할 수 있는 건 그 선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할 수 있어.’

그렇게 선에 가깝게 다가갔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음악가들은 안다. 세연은 그걸 굳이 넘지 않아도 분명하게 전해진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마치 타티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선에 가까이 다가간 연주자들의 소리는 특별하게 들리기 때문이었다.

세연은 더 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연주 자체를 더 우선시하며 음악으로 존중을 드러내고 깔끔하게 카덴차의 마무리를 그려 냈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가스파르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세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세연은 그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세연은 기뻐하며 자신의 음악을 탁 놓으며 마무리 지었고, 그 끝은 오케스트라가 이어서 완벽한 조화로 끝맺었다.

{……!}

1악장을 마친 가스파르가 다시 세연을 돌아보았고, 세연은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랑스가 거실에서 세연의 무대를 텔레비전으로 보던 나는 조금 놀랐다.

분명 주어진 리허설 시간은 1시간뿐이었다고 했다. 그사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서로의 해석이 많이 틀리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세연은 그 시간에 충분히 리허설을 해냈다고 했었고, 이번에 무대에서 증명해 냈다.

그것도 무난하게 편한 레퍼런스를 기준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맞아떨어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봐도 세연의 해석과 뉘앙스에 오케스트라가 잘 따라가 준 느낌이었다.

그건 오케스트라의 유능함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세연이 그들을 설득하고 따라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연주를 선보였다는 의미였다.

‘대단한 아이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노련함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세연은 훨씬 더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 1악장 후반부의 카덴차에선 그녀의 한계에 손끝이 닿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기교를 마구 뿌릴 수 있지도 않은 고전 협주곡에서 이 정도로 강렬한 독자성을 각인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연이 이 정도 실력 행사를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을 가볍게 앞서 나갔다. 마치 그 잠깐 사이 또다시 성장했음을 보여 주겠다는 듯.

‘쉽지 않았을 텐데…….’

난 턱을 괸 채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간 세연도 마음고생을 적잖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억울함이나 손해로 여기지 않고 그대로 전부 자신의 에너지로 삼았다.

멋대로 그녀를 가늠하고 있었음을 자각한 나는 살짝 반성했다. 그녀는 내가 그렇게 판단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피아노를 연주 중인 세연은 이 시간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거의 넋을 놓고 감상하는 사이 1악장이 끝났고, 난 거기에 대한 평가 자체를 보류했다.

옆에서 클레망이 조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난 솔직히 모차르트는 뭐가 좋다는 건지 잘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아.}

보통 청중에 가까운 클레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세연의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졌다는 의미였다.

난 가슴속에서 치미는 기대감을 느끼며 밝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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