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2화 (1,172/1,277)

##  1172화

가스파르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1시간 리허설 후 공연이라는 조건에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긴장을 컨트롤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음악적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

이 협연에서 살아남는 피아니스트들은 그러한 유연한 프로페셔널리즘을 체득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욕심 있는 피아니스트도 나쁘지 않지.’

세연은 단순히 어려운 조건에 응해 무대에 서서 피아노를 맡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탐욕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용하고 앞장서려고 했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운드를 추구했다.

가스파르는 그녀가 이 정도로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을 보며 흐뭇함을 느꼈다.

도전적인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항상 환영이다. 심사 위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스파르는 세연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휘자의 만족스러움은 곧 단원들에게도 번져 나갔다.

오케스트라는 각개 자존심 강한 음악가들이 모인 집단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한 사람이 가지는 감정이나 평가가 전파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잘 받쳐 줘 보자고.’

협주곡 2악장에 이르러 서정적이고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 펼쳐졌다.

세연은 건반 하나를 누르는 터치에 집중하면서 1악장보다 더더욱 심취하여 연주를 전개해 나갔고, 오케스트라는 그 뒤에 정교하게 따라붙었다.

마치 협주곡이 아니라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 같은 일체감이 느껴진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피아노의 보이싱은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세연의 몸짓 하나하나를 구현해 냈다. 흠잡을 곳 없는 높은 디테일의 표현력이었다.

그녀의 해석과 표현에 동조하며 따르는 단원들의 수도 더 많아졌다.

가스파르는 억지로 지도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단원들이 거기에 따를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렇게 2악장이 거의 끝날 무렵, 세연과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없이도 피아노만으로 지휘가 가능할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차르트 시절엔 이랬겠지.’

지휘자란 직업이 등장한 건 꽤 최근의 일이다. 모차르트가 한창 유럽에서 명성을 떨칠 무렵엔 지휘자 없이 협주곡 등을 연주했다.

2관 이상의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등장하기 전의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음악의 중심을 잡고 있던 건 피아노였다. 리드 악기의 역할과 지휘자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던 것이다.

그만큼 어깨는 무거워지지만 실력에 문제만 없다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이 더 자연스러워지므로 그중 건반 악기인 피아노가 무대에서 확 띄게 된다.

세연은 콩쿠르 측에서 피아니스트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냈다.

가스파르는 세연이 도달한 지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그녀의 의도를 읽고 따르려 했다.

‘놀라게 되는군…….’

15번 협주곡의 3악장은 이전까지의 흐름을 강하게 터트리기보다는 가볍게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음악으로 진행되었다.

세연은 그것을 달리 해석하지 않고 충실하게 따랐다.

이 정도로 연주가 잘되면 그녀처럼 진취적인 욕심이 있는 연주자들은 조금 더 튀어 보이기 위해 한 걸음을 더 내딛을 만도 한데, 세연은 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는 넘지 않았다.

그렇게 자제하는 것도 피아니스트의 미덕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다. 가스파르의 내적 평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1악장에서만 느낀 것으론 영리하고 협조적이면서도 야망이 있는 피아니스트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2악장에선 리더십이 충분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런데 마지막 3악장에서 세연은 금욕적인 수도자 같은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대부분 참지 못하고 넘어설 것 같은 상황에서도 세연은 충동적으로 굴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지켜 냈다.

그야말로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보여 주어야 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스파르는 심사 권한이 없지만 가능하다면 심사 위원석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 저기 앉아 있는 심사 위원들이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니 세연의 수준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더 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 아이보다 내가 더 흥분하고 있는 것 같군.’

가스파르는 속으로 웃으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고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만날 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가스파르가 해 줄 수 있는 건 세연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최대한 조화롭게 운용하는 일뿐이다.

지금 세연이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최대로 증명하고 있는데 오케스트라의 능력이 모자라서 조금이라도 세연의 평가가 깎인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원들 역시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사운드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지휘하기 편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케스트라의 퍼포먼스는 최고로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편한 기분으로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는 중은 아니었다. 가스파르 역시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3악장은 피아노의 비슷한 멜로디가 몇 번 반복된다. 그 모든 소리에 질리지 않도록 하나하나 바리에이션을 주는 것 역시 연주자의 역할이었다.

세연의 표현력은 상당히 넓었기에 큰 문제 없이 다채로운 음악을 펼쳐 냈다.

오케스트라가 다시 한번 크게 울리며 주위를 환기시키자 다시 피아노로 초점이 옮겨 갔다.

크게 넓어져 있던 시야가 피아노로 서서히 집중된다.

이어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이 순간, 자제하며 참고 있었던 피아노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

세연은 침착하고 모범적인 연주를 하고 있었지만 주어진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합리적인 연주를 하던 그녀가 순간적으로 왼손을 크게 휘둘러 음을 터트렸다.

연타하는 옥타브 속에서 테크닉적인 면이 빛났다. 모든 오케스트라의 소리와 비견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사운드가 피아노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다시 한번 피아노가 이 무대의 주인공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세연은 그 뒤로 합쳐지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30분가량 지어진 협주곡의 끝을 맺었다.

앞선 두 참가자 때보다 더 큰 박수가 세연에게 쏟아져 내렸다. 가스파르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후…….}

연주를 마치고도 한동안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고 피아노와 연결되어 있던 세연은 박수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가스파르는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어난 세연과 악수하고 성대한 찬사 속에서 가스파르는 얼른 세연을 대기실 쪽으로 안내했다.

지금 이 분위기를 조금 더 세연과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가스파르와 달리 세연에겐 아직 해야 할 무대가 남아 있었다.

이만큼 협주곡을 잘 연주했다고 하더라도 독주 연주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파이널리스트가 되기 어렵다.

물론 그녀의 실력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가스파르는 지금 조금이라도 그녀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

세연은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이 상당히 짧다.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모자람이 있었지만 특히 협연 능력은 박 교수가 가장 걱정스러워하던 부분이었다.

다행히 세연은 듣는 귀가 밝고 유연한 피아니스트라서 협연자로서의 재능도 충분한 편이었지만 경험 자체가 부족한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콩쿠르에 참가하기 직전까지 세연은 협연이 가능한 자리라면 어디든지 다니면서 경험을 쌓는 데에 주력했다.

거기엔 시청의 챔버 오케스트라부터 대학교의 합주 동아리까지 다양한 집단들이 함께했다.

‘역시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길 잘했어…….’

박 교수는 세연의 협연 자리를 알선하고 촬영한 비디오를 돌려 보면서 지도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과 협연하고 지도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세연은 그 모든 경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이렇게 큰 무대에서도 능력을 보일 수 있었다.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하나가 된다는 감각을 느꼈을 때, 거기에 도취되어 멋대로 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교육받은 것 덕분이기도 했지만 타티아나에게 배운 차분함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음악 전반에 보이는 타티아나의 태도는 단지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연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두드리면서도 음악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구조성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방식은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연은 여러 사람의 영향 아래에 서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세연보다 더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휘자와 악수하며 감사를 표한 세연은 그를 따라 대기실로 다시 돌아왔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임세연 님.}

{다음은 독주 무대가 이어집니다. 인터미션은 20분이니 그사이 휴식을 취하시고 대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여기, 임세연 님께서 연주하셔야 할 프로그램을 다시 알려 드리는 문서입니다. 다시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요청하신 미발표 의무곡의 악보도 지금 함께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등 뒤에선 박수 소리가 들려오고 대기실에 있던 직원들은 세연의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세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주는 서류들을 받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지휘자 가스파르가 물병을 따서 세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협주곡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젠 독주곡에 집중하시죠.}

{아, 네.}

세연은 물병을 받으며 가스파르를 올려다보았다.

함께 연주한 협주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가스파르도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세연에게 중요한 무대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스파르는 협주곡에 대한 평가를 짧게 좋았다고만 남기곤 일단 잠시 미뤄 두기로 한 것이다.

세연은 막 풀어지려는 신경을 다시 붙잡으면서 집중력을 일깨웠다. 20분 후 연주해야 할 곡들의 길이는 모차르트 협주곡보다 더 길다.

{전 이만 나가서 단원들을 인솔하겠습니다. 인사를 따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좋은 연주를 하길 바랍니다.}

가스파르는 씩 웃으며 다시 홀로 나섰고, 세연은 대기실 구석에 있는 개인 부스로 안내되었다.

콩쿠르 구성이 조금 복잡하다 보니 피아니스트들의 편의를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세연은 조용히 집중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선율이 지금도 가장 생생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방금 연주했었던 곡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기에 현혹되어 버리면 안 된다.

직원에게 받은 종이에 적힌 프로그램 목록을 확인하며 세연은 연주해야 할 곡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독주곡 레퍼토리 B였다. 이렇게 다시 확인하면 혼동할 일이 없었다.

다른 모든 건 잊어야 했다. 미리 연습했던 레퍼토리 A도, 방금 연주했던 협주곡도 그리고 심지어 1라운드 때 연주했었던 곡들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제 남은 건 몇 분 후 무대에 올라 연주해야 할 세 곡뿐이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세연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세연은 기억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허벅지를 짚었다.

그렇게 손을 움직이자 서서히 그녀에게 다음 음악들이 깃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