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3화 (1,173/1,277)

##  1173화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멋지게 합주를 마치고 마치 승리의 포즈처럼 팔을 들어 올렸다. 곧 엄청난 박수 소리가 텔레비전에서 울려 퍼졌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클레망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속에서 희열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사실 그는 클래식에 대해서 잘 몰라서 청중이 되기에도 모자람이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느껴지는 감탄엔 거짓이 없었다.

‘타티아나의 친구라고 들어서 그런가…….’

친구가 잘 해냈다면 그녀도 기뻐할 테고 그럼 클레망도 기쁘다. 그런 단순한 흐름으로 생각하던 클레망은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콩쿠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강한 경쟁자가 되어 버릴 뿐이다.

심지어 지금 연주한 임세연이란 피아니스트와 타티아나는 나이가 같기도 했다. 바로 비교되어 버린다.

텔레비전에선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분명 엄청나게 잘 해낸 것이겠지. 클레망은 이 광경을 타티아나가 어떻게 보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날카롭게 보고 있기도 했고…….’

그렇게 궁금증 반 걱정 반으로 옆을 돌아본 클레망은 곧 걱정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자신이 잘 해낸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과 친구로서 뿌듯해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클레망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타티아나를 따라 손을 들었다.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클레망은 멍하니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굉장한데?』

『과연 타티아나의 친구네.』

랑스 부부도 박수 소리에 힘을 보태며 감탄했다. 클레망과 달리 두 사람은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

오랜 시간 콩쿠르를 지켜 본 바, 어떤 사람이 통과할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 애도 열일곱 살이라고 했었지? 세상에…… 천재들이 정말 많구나.』

이 정도로 칭찬한다는 건 통과의 확률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찬사는 계속 이어졌고, 그 속에서 피아니스트 임세연과 지휘자는 무대 밖으로 나갔다.

클레망은 다시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잘하죠?}

눈이 마주친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아는 척이라도 해 보면서 감상을 늘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전문가인 타티아나 앞에서 그래 봐야 우스운 일이 될 뿐이다. 클레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잘한다는 걸 알겠더라.}

{그랬나요? 혹시 듣기 지루하시지 않으셨나요? 25분이나 되는 곡인데.}

지금 랑스가 식구들이 거실에 모여 임세연의 무대를 지켜본 건 타티아나의 친구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방금 무대가 어떻게 비춰졌을지 상당히 신경 쓰는 듯했다. 특히 클레망은 문외한임을 미리 밝혀 두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클레망은 이번에도 단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솔직히 조금 긴 것 같긴 했어. 근데 체감상 10분 정도로 느껴져서 내가 듣는 다른 노래들에 비해 조금 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25분이란 생각은 전혀 안 들더라.}

팝송이든 힙합이든 대부분 3분 남짓이다. 그러니 가사도 없이 30분이나 되는 기악의 향연은 사실 꽤 부담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레망은 이 연주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당히 한 3분 정도 들었나 싶었더니 1악장이 끝나 있었고, 느릿한 2악장은 길이 자체가 그리 길지 않아서 들을 만했다.

게다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악장은 뒷부분이 더 없는 게 아쉬웠다.

전부 다 해서 10분 정도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길었다는 건 시계를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는 걸 강조하자 타티아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세연이 정말 잘 해냈네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조금 더 멋있게 감상을 전할 순 없었을까. 클레망이 머리를 쥐어짜는 사이, 오케스트라도 퇴장하고 홀 안의 청중들도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멀리서 홀을 찍는 카메라가 그 모든 광경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잠시 화면이 바뀌더니 텔레비전 광고가 진행되었다.

{이제 끝난 건가?}

{아뇨, 아직.}

타티아나는 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세연의 독주곡 무대가 남아 있어요.}

{지금 바로?}

{예. 인터미션 후에.}

클레망은 이 콩쿠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했다길래 피아노만 방으로 옮겨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피아니스트를 눈앞에 마주하고 나니 궁금한 점들이 한없이 생겨났다.

클레망은 적당히 지금 할 만한 질문을 끌어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럼 세미파이널 때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하는 거야?}

친절한 성격인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해 주었다.

{일단 방금 했던 모차르트 협주곡 한 곡 하고…… 독주곡들이 연주자에 따라 40분에서 1시간 정도 되겠네요.}

클레망은 자신이 피아니스트가 되어 저 자리에 나가 있다고 잠깐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방금 협주곡만 하더라도 25분이나 되었다. 내내 연주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연주 전체에 참가하고 있어야 하니 곡을 전부 외워야 한다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독주곡이라면 한 순간도 쉴 틈이 없다.

그걸 최소 40분이나 이어 나가려면…… 대체 음표를 몇 개나 외우고 있어야 할지 상상이 안 갔다. 최소 만 개 단위는 훌쩍 넘어갈 것 같다.

사람의 머리로 그게 가능한 건지 가늠해 보던 클레망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요즘 관심 있게 보는 다른 경연 프로그램 있거든? 노래 경연인데…… 거기선 한 라운드에 한 곡씩 준비한단 말이야? 3분 남짓하게.}

{일반적으론 그렇겠네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클레망이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가요나 밴드, 힙합은 적당히 준비할 만했다.

3분짜리 공연이니까. 하지만 클래식은 그 스무 배는 된다.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클래식은 세미파이널 때만 최소 1시간 넘게 계속 앉아서 칠 수 있도록 연습해 둬야 한다니……. 진짜 말도 안 되게 힘들 것 같은데.}

처음으로 콩쿠르 규칙을 알게 된 클레망이 놀라워하는 모습이 웃겼는지 데보라가 낮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사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세한 규칙 모르지?』

『자세한 규칙?』

『독주곡 프로그램을 두 종류 준비해야 한다는 거.』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없는 규칙이었다. 클레망이 어리둥절해하자 데보라는 보다 디테일하게 규칙을 알려주었다.

연주자는 독주곡 프로그램을 두 종류 준비해야 하고 심사 측에서 그중 임의로 고른 한 프로그램만 들어 본다는 말에 클레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니까 진행하고 있겠지?』

『다른 경연에서 그렇게 진행했다간 불만이 폭주할걸?』

3분짜리 두 곡을 준비해서 그중 한 곡을 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부담감이다.

그런데 한 곡이 아니라 곡들의 모음인 프로그램을 통째로 내다 버리게 한다니. 그런 폭거가 용납된다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세미파이널 한 라운드를 위해서 각 연주자가 준비해야 하는 곡들은 최소 2시간이 넘는다.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해내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이 작은 소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클레망은 조금 경외감을 느끼며 말했다.

{무시무시하네……. 진짜 클래식 하는 애들은 천재들밖에 없는 거야?}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짐작이 되네요. 후후,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그런 오해는 많이 받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마치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별것 아닌 것처럼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저희는 전부 커버 연주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넓은 레퍼토리가 가능하죠. 그리고 곡 수가 많다는 건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 말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아마 가수들에게 비슷한 걸 요구하더라도 유명 곡들을 커버해서 부른다면 곧장 1시간 넘게 연달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만큼 긴 시간에 걸쳐 철저하게 검증된다는 점은 명백했다. 클레망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래도 초인들의 대결처럼 느껴지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죠.}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어서 클레망은 깜빡 속을 뻔했다.

하지만 대화를 마치고 잠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클레망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이미 클래식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는 것을 금방 찾아볼 수 있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콩쿠르 중 그야말로 지옥의 콩쿠르를 꼽자면 어김없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콩쿠르였다.

그러니까 특별한 건 클래식 연주자들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타티아나였다.

과연 무대 위에선 얼마나 잘 해낼까. 그런 호기심을 느끼면서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클레망은 순간 그녀가 돌아보자 흠칫 놀라서 두서없이 물었다.

{휴식은 얼마나 하는 거야?}

{20분이요. 4분 남았네요.}

{시간도 짧게 주네.}

녹화 방송으로 진행되는 경연 프로그램들은 중간에 쉴 시간이 많다. 하지만 이 콩쿠르는 실황 중계였다.

지금 광고가 나오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지 상상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결과가 곧 화면에 비추어졌다.

오케스트라를 위해 무대에 세팅되어 있던 의자들과 장비들이 깔끔하게 사라졌고, 무대 중앙엔 피아노 한 대만 있었다.

안내자가 나와서 간단히 이런저런 멘트를 하고 바로 임세연의 2부 독주곡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하나도 안 지쳐 보이네.’

20분의 휴식 후 무대에 올라온 임세연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 모습만 봐도 정말 멋지다는 감상이 나올 정도였다.

잠시 침묵이 있었고, 조명이 무대로만 집중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클레망은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지켜봤다.

임세연이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카메라가 가까이에서 잡아 냈다. 유려하게 올라간 팔은 곧 낙하하며 건반을 눌렀다.

‘무슨 곡이랬지? 미발표 곡이라고 했었는데.’

안내자가 제목을 말하길 무슨 주제에 의한 어쩌고라고 했었는데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한 가지 확실한 정보는 이 곡이 과거 클래식이라 불리던 곡들이 아니라 이 콩쿠르 세미파이널만을 위해서 작곡된 곡이란 점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단지 과거 클래식 곡들만 놓고 실력을 겨루지 않았다.

현대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최근 곡들을 참가자가 어떻게 연주하는지도 모두 다 평가 대상에 들어갔고 심지어 콩쿠르 측에서 만든 현대 음악을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시간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한 달 전에 악보를 보내 준다고 한다.

무서울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임세연은 조금도 위축되는 일 없이 화려하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잘 모르겠네…….’

연습 시간을 한 달밖에 안 줘서 그런지 클레망이 듣기에도 음표가 그리 많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음들이 하나를 치더라도 치기 쉽지 않았고 박자도 정말 어렵게 들렸다.

현대 음악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아까 들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번에 비하면 이 곡은 정말 난해하고 어려웠다.

옆을 보니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10분 정도 되는 연주가 끝나고 나서 클레망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 곡은 너무 어렵네……. 저걸 한 달 연습한 거라고?}

{어렵긴 해요. 솔직히 저도 전부 이해하긴 힘들었으니까요.}

{그, 그래?}

타티아나가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밝히는 것을 들으며 클레망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위축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하는 일은 항상 그래 왔어요.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완전함을 추구할 뿐이죠.}

피아니스트로서 여러 곡을 외워서 무대에 오른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때보다 지금의 타티아나가 클레망의 눈에는 더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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