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4화 (1,174/1,277)

##  1174화

20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짧다. 세연은 당연히 그 시간 전부를 집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의 소음이 수시로 그녀를 방해했다.

‘이어폰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귀를 막아 주는 이어폰이라도 있으면 일단 소음에 고통받는 일은 줄었을 것이다.

음원을 들어 보고 곡들을 되새기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

하지만 세연이 연주해야 할 곡들의 총 길이는 47분 정도라서 인터미션 시간을 전부 쓰더라도 다 들어 볼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생을 빠르게 돌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짓을 했다간 머릿속에 있는 메트로놈이 망가질 테니까.

「10분 남았나.」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해야 할 건 많았다. 이런 촉박함 속에서 멘털 관리를 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피아니스트들도 많았다.

하지만 세연은 기본적으로 멘털이 강한 편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살려면 이런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박 교수도 지켜보고 있을 테고,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 그리고 이연주 등 여러 피아니스트 역시 세연의 세미파이널 무대를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부담감이 없진 않다. 47분 사이 한 순간이라도 실수하거나 머뭇거리면 끝장나 버리는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연은 그 부담감보다 더더욱 강한 의욕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세연은 전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무대에 올라갔다 내려온 덕분인가?’

체질적으로 긴장에 강한 편이기도 했지만 그간의 경험들이 세연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단지 소리에 너무 예민해져서 소음 등에 반응하게 될 뿐이다.

세연은 일부러 외부로 향하는 신경들을 차단하려고 하며 내면 세계에 집중했다.

남은 시간 동안 준비를 다 마친 세연은 직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대기실 문 앞에 섰다.

{앞으로 1분입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예, 괜찮아요.}

문밖 홀에선 이미 소음들이 잦아들고 있었다. 청중들은 자리에 앉아서 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기대감은 무게를 가지고 세연을 덮쳤다.

하지만 세연은 떨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맑았고, 모든 선율이 순서대로 준비되어 이제 손을 타고 나갈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다.

‘첫 곡만 깔끔하게 마무리하면 그 뒤는 내 쇼가 될 거야.’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이후의 일이나 파이널 무대 같은 건 세연이 지금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지금 그녀가 집중해서 완료해야 할 것은 이 무대에 세워야 할 첫 번째 곡이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다면 그다음을 제대로 끼우는 건 체득된 감각만으로도 해낼 수 있다.

1분이라는 시간이 아득하게 길게 느껴질 무렵, 안내자가 세연의 이름을 불렀고 직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세연은 홀로 무대 위로 올랐다.

박수와 조명이 세연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도 상당히 익숙해진 자신을 느끼며 웃었다.

무대 위엔 피아노 한 대와 페이지 터너page turner를 맡은 여성이 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연은 무대 앞까지 나가서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서선 페이지 터너에게도 인사했다.

작은 웃음을 주고받으며 서로 잘 부탁한다는 의사를 교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연은 피아노를 마주 보았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칠 때 그녀의 강력한 동료가 되어 준 피아노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미친 사람 같지만 세연은 피아노에 말을 걸면 가끔 통하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피아노의 도움을 구할 때였다.

이번엔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도 없이 무대엔 세연 혼자였다.

페이지 터너가 옆에 있긴 하지만 그녀는 여느 청중과 같이 지켜보는 사람에 가까웠다. 음악적으로 세연을 도와주진 못할 것이다.

지금 세연과 직접적으로 함께하는 건 바로 여기 있는 피아노. 그리고 피아노의 신뿐이리라.

세연은 차분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음악을 펼쳤다.

‘시작하는 소리가 좋네.’

첫 음을 누르면서 세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콩쿠르가 열리기 한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각 DVD 심사 통과자들에게 주어진 악보는 바로 세미파이널에서 연주해야 할 미발표 의무곡이었다.

세연은 처음 악보를 확인하고는 어리둥절해할 수 밖에 없었다.

라가raga 주제에 의한 판타지.

그런 제목을 가진 이 곡은 인도의 음악인 라가를 주요 요소로 다루고 있었다.

‘정말 어려웠지…….’

악보를 대충 넘기며 읽어 본 세연이 느낀 첫인상은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는 것이었다.

길이는 꽤 길었지만 현란한 테크닉을 요구로 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고,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조건이라면 한 달 내에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첫 프레이즈를 연주해 보자마자 깨졌다.

인도의 라가는 독특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어서 레퍼런스도 없이 악보만 보고 구조를 파악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리고 음계 자체도 협화음이 별로 없어서 손으로 잘 외워지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세연이 익숙한 건 18세기 이후의 유럽 음악들이었다.

그런데 이 곡은 그 시대만 쏙 빼놓은 고대 인도 음악과 현대 음악을 섞어 놓은 곡이었다. 정말 끔찍할 정도의 난이도였다.

일반적으론 절대 손대지 않을 만한 곡이다. 하지만 독주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연주하게 되어 있는 곡이라 어쩔 수 없이 세연은 이 곡을 연습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곡에 익숙해졌을 무렵, 세연은 이 곡 나름의 가치와 재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구조를 알고 보니 인도의 라가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면서도 상당히 직관적이었고, 그만큼 연주자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현대 음악적인 불협화음과 파격적인 주법은 거기에 무척 잘 어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으로 시대를 아우르는 곡이었던 것이다.

‘빠르게 휘둘러서…….’

기본적으로 라가는 현악기로 연주하는 곡이고 이 곡은 그것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재해석한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가끔 나오는 트릴이나 옥타브 연주는 현악기를 연상케 하는 것이 많았다.

세연은 그러한 디테일들을 놓치지 않고 살려 냈다.

다른 악기의 섬세한 테크닉을 피아노로 구현해 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세연은 적어도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타티아나가 온갖 현악기나 관악기들의 사운드를 피아노로 이끌어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인도의 악기인 비나veena나 시타르sitar의 사운드 역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원본 라가를 들어 보며 연구하고 연습에 임한 세연은 그 노력에 걸맞은 결과물을 지금 조금이나마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디테일의 차이는 음악 전체에 묻어나면서 또렷한 독자성을 이루었다.

‘나쁘지 않았던 것 같네.’

10분간 이어진 연주는 악장 구분도 없이 모호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시간 내내 세연은 단 한 번도 청중들의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꽉 붙잡을 수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적어도 이 홀 안에선 세연의 연주에 지루해하거나 난해한 음악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수는 없었다. 콩쿠르에서 여러 곡을 연주하는 참가자라면 그 프로그램이 다 끝나기 전까진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다.

참가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수가 없어도 찬사를 느끼는 건 가능했다. 세연에게 집중되는 시선들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청중석에서 밀려오는 에너지가 직접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살짝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세연은 다시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두 곡이 남아 있었다.

옆에서 역할을 마친 페이지 터너는 일어섰다.

{브라바.}

그녀는 세연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중얼거렸다. 세연이 놀라 고개를 들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페이지 터너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악보를 읽고 연주자의 흐름에 따라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아마 이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를 미리 공부해 온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세연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악보를 넘겨 주는 타이밍은 정말 완벽하게 깔끔했다.

세연이 연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데엔 페이지 터너의 역할도 굉장히 컸다.

페이지 터너는 세연의 인사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다시 작게 말했다.

{제 이름은 네르미나 양켈이에요. 경의를 표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이름을 밝히는 페이지 터너를 보며 세연은 조금 의아했지만 그래도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것 같아서 기쁘게 답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페이지 터너는 악보를 들고 대기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조금 지켜보던 세연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르미나 양켈……?’

어디 북유럽 쪽 음악가인가? 외모나 이름으로 봐선 그런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이름은 확실히 그전부터 세연의 머릿속에 있었다.

대체 어디서 본 이름인지 생각하던 세연은 그것이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악보를 받았을 때 가장 위에 적혀 있던 작곡가명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냈다.

‘작곡가님이었어!?’

깜짝 놀란 세연은 다시 뒤쪽을 휙 돌아보았지만 이미 대기실 문은 닫혀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다. 왜 페이지 터너 역할을 작곡가가 직접 맡았는지 그리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밝힌 것인지…….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만 가득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옆을 보니 청중들은 참을성 있게 세연의 다음 곡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 기대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세연은 손목을 살짝 틀어 스트레칭하고는 허리를 폈다.

어쩐지 지금은 그 어떤 곡을 연주해도 최고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이 미발표 의무곡은 오래된 인도의 음악과 현대 음악의 결합이라는 도전적인 시도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이 곡의 연구는 꽤 어려웠지만 그만큼 즐겁기도 했다.

지금 난 나름의 해석과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연도 나만큼 즐겨 준 것 같았다.

그녀가 만들어 온 곡은 상당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클레망은 신기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네.’

음악을 분해하여 연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곡에서 연속되는 리듬과 선율이 이국적이라는 것 정도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느낄 수 있게 연주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세연은 피아니스트로서 정말 많이 성장했다.

내 연주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경향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 연주하는 것을 보면 이미 그녀는 독자적인 음악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잘 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난 그 모습에 뿌듯함과 아련함을 동시에 느꼈다.

다행히 지금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바로 기쁨이었다. 난 그녀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정말 기뻤다.

잠깐 사이 데보라 아주머니가 내 찻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셨다. 난 찻잔을 들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세연은 잠시 자기 자신을 추스리더니 다음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양손을 건반 위로 가지고 갔다.

마치 자석이 달린 것처럼 건반에 달라붙은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무언가 기다리더니 이윽고 툭 하고 작게 건반을 눌렀다.

난 그녀의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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