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5화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노를 독주 악기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한 음악가였다.
다양한 심상을 피아노로 표현하려 했고, 수십 대의 악기가 동원되는 교향곡도 피아노로 편곡하려고 했다.
그렇게 리스트가 작곡한 곡은 1,000곡이 넘고, 그중 대부분이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동기의 많은 작곡가가 소나타 형식의 곡을 작곡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에 반해 리스트는 소나타를 단 한 곡만 작곡했다는 것이다.
‘단테 소나타는 우리가 그렇게 부를 뿐이니까…….’
리스트가 작곡한 곡 중 단테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곡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속칭이었다.
정확히는 순례의 해 이탈리아 모음곡집에 있는 일곱 번째 곡. 소나타 풍의 판타지라고 해야 했다.
진정으로 리스트가 소나타란 이름을 붙여 놓은 곡은 바로 S178 소나타 나단조뿐이었다.
‘쉬운 곡은 아니지…….’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서 작곡한 이 곡은 30분이나 되는 대곡인데도 일반적인 소나타처럼 3악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 1악장으로 된 단악장 소나타였다.
리스트가 소나타 형식을 싫어했다는 건 그의 곡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불가능을 개척하며 피아노로 모든 것을 해내고자 했던 천재가 한창 작곡가로서의 역량이 하늘을 찌를 때 만든 곡이다.
그만큼 이 곡은 1853년엔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엔 혹평이 많았고, 현대에 와서 재평가받고 있는 곡이었지만 현대 연주자들이 조금 더 이 곡에 익숙하다고 해서 연주의 난이도가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리스트 소나타는 어렵고 난해했다. 세연은 이 곡을 연습한다는 것 자체를 굉장한 도전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세연은 도전했고, 결과물을 얻어 냈다.
‘더 깊게…… 깊게 들어가야 해.’
곡의 시작과 함께 리스트가 지시한 템포는 렌토 아사이lento assai. 나타냄말은 소토 보체sotto voce. 아주 느리고 낮게 연주해야 했다.
처음엔 이 복잡한 곡 중에서 가장 쉬운 구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해 보면 뉘앙스를 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안 써도 금방 이전의 음이 흐물흐물해져 버리고, 레가토로 이어 봐야 원래 의도했던 사운드는 흐릿해져 버린다.
그렇다고 조금 급해지면 이 곡의 뒷부분까지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를 살릴 수 없었다.
빠르게 기교를 난사하는 것보다 천천히 느리게 치는게 더 어렵다는 말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세연은 대부분의 곡에서 요구하는 피아니시모를 구현하는 데에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해서 그 말을 가볍게 넘겨들었다.
하지만 리스트 소나타를 접하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정말로 어려웠다. 집을 지으려면 그만큼 충분한 재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몇 개 안 되는 음들만 가지고 아주 약한 소리만 내면서 원하는 표현을 해내는 건 정말 나무젓가락 몇 개만 가지고 거대한 집을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세연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해.’
이 곡의 어두운 부분에 어디까지 파고들어 가야 할지 박 교수가 짚어 준 가이드라인이 있긴 했다.
그러나 세연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건 다름 아닌 이전에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곡들이었다.
그녀는 작년 리사이틀 때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을 친 적이 있었다.
그 환상곡은 리스트가 굉장히 아꼈던 곡으로, 단악장인 리스트 소나타가 작곡된 본류이기도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가을 연주회 때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도 쳤었다.
청중들을 연옥으로 이끄는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든 순간은 지금도 세연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음악들은 그야말로 기적적이었다.
세연이 만약 조금 의기소침한 성격이었다면 그 음악들의 무게에 짓눌려서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연은 넋 놓지 않고 제대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주저앉아 있으면 앞으로 걸어갈 수 없다. 무릎걸음으로나마 세연은 앞으로 향했고, 타티아나는 가끔 조용히 보고만 있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내려와선 단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고도 잡지 않으면 바보다.
세연은 가능한 최고로 길게 팔을 내뻗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연주가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 자체가 성장의 핵심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세연은 이 소나타를 연습하면서 자신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가늠해 두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가지 않고 참아 냈다.
이전 같았으면 일단 별생각 없이 타티아나가 가능한 만큼은 안전하리라 믿고 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타티아나가 언제나 위험성을 가지고 음악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주변을 맴돌거나 하는 일 없이 정중앙으로 걸어 들어가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발이 닿지 않아 그대로 가라앉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숨이 막히는 그 잠깐 사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자신이 그리 건전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연이 무작정 따라오는 것에 겁을 냈던 것이다.
이제 타티아나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세연은 타티아나나 박 교수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착실하게 음악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잘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그건 누가 따로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음악적 영향을 주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발전 역량으로 삼을 수 있도록 세연이 균형을 지키고 선 덕분이었다.
그 절묘함이 반영된 음악은 깊고 선명했다. 세연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의 머리 위로 음악을 흩뿌렸다.
나지막이 읊조리던 목소리가 확 변하며 피아노가 고함을 지른다. 세연은 양손으로 건반을 콱 움켜쥐듯 옥타브를 펼쳤다.
‘다시 서서히 다가가서…….’
겁을 주듯 다가왔던 음악은 다시 계단 아래로 통통통 튀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 어둠 너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음악이 어느샌가 등 뒤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세연은 음악으로 청중들과 연결된 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세연이 어떤 음을 누르느냐에 따라 청중들의 반응이 변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세연은 청중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의미였다.
혼자 연습할 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전지전능함에 손이 닿는 듯한 기분.
가끔 타티아나의 음악을 들으면 그녀에게 사로잡혀서 그 뜻대로 휘둘러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 세연은 그 수준에 약간이나마 도달해 있는 듯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감지하면서도 세연의 머리와 손은 쉬지 않고 음악을 연주했다.
음악의 힘은 갈수록 더더욱 강해졌고, 이내 세연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 확신에서 비롯된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
아지타토agitato라는 지시에 맞춰 격하게 음악이 마구 내달린다. 왼손이 치솟아 올라왔다가 오른손이 파도를 친다.
그사이 주선율은 양손에 번갈아 가며 머물렀다.
이 프레이즈를 절뚝거리지 않고 연주하는 데에 세연은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리스트 소나타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인 만큼 최대한 철저하게 해낼 필요가 있었다.
세연은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으며 양손 끝에 매달린 선율들을 제어했다.
다행히 그 노력을 높게 산 리스트는 세연에게 힘을 빌려주었고, 세연이 음악을 휘두르는 대로 그 선율 끝의 인형들은 춤을 주었다.
혼자 할 땐 이런 것이 아니라 세연 혼자서 하는 인형 놀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홀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율의 시작점을 쥐고 있는 세연마저 그 힘에 휘둘려 버릴 뻔했다.
다행히 집중력을 잃지 않은 세연은 선율로 행하는 인형극의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건 아득할 정도로 높은 절벽이었다.
‘손끝에 힘은 남아 있어.’
리스트 특유의 양손 옥타브로 진행되는 프레이즈가 진행된다.
달리 복잡한 음형이나 손가락 꼬임 같은 것도 없이 무작정 양손을 똑같이 움직이며 건반을 내리찍는 일이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형태에 여러 피아니스트들은 고전해 왔다.
조금이라도 힘이 부족하거나 유연성이 떨어지면 이 옥타브의 향연을 깔끔하게 다 쳐 낼 수 없었다.
세연이 이 구간을 연습하면서 느꼈던 것은 언젠가 텔레비전 쇼에서 봤었던 장애물 통과 게임이었다.
그중엔 물 위에 징검다리로 떠 있는 부표들을 빠르게 밟으면서 통과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지금 세연이 하는 일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손으로 건반을 뛰어넘으면서 정확하게 착지하고, 절대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 건반으로 다시 점프해야만 했다.
다음 건반으로 뛸 힘과 속도 그리고 균형 감각 모든 것이 요구당한다.
지옥에서 하는 장애물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연은 징검다리를 빠르게 밟아 다음 주제로 향했다.
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세연이 온 길은 물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었다.
까딱했으면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쉰 세연은 앞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용감하게 길을 건너 온 세연 앞에 빛이 펼쳐졌다.
지시어가 바뀌었다. 그란디오소grandioso. 즉 웅장하게란 의미다.
그 지시에 걸맞게 주어지는 음악 역시 오페라적인 장대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마치 신의 언덕으로 가는 길목에 선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던 세연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