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6화 (1,176/1,277)

##  1176화

세연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난 남 일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대 연주자들에겐 충분한 연습 시간도 주어지고 협연을 할 때면 지휘자가 딸린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의 뒤를 맡아 준다.

하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부족한 조건들이 즐비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항상 연주자는 어떻게든 공연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준비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준비한 곡을 연주도 못 하고 버려야하고, 시간은 정말 촉박했으며, 생전 들어 보지도 못했던 곡을 연주해야만 했다.

세연이 잘하리라 믿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 세연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기우였구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번을 멋지게 연주한 세연은 독주곡 레퍼토리의 첫 곡인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또한 훌륭하게 연주해 냈다.

콩쿠르 측에서 요구한 이 곡은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서 한 달 내로 준비할 수 있는 수준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연주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면 상대적으로 굉장히 불리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멋진 해석을 숨김 없이 잘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펼치는 리스트 소나타는 그녀가 혼신을 다해 쏟아붓는 실력의 증명이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리스트 소나타는 나도 연주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일단 단악장 소나타라는 형식이야 제대로 모른다고 하더라도 연주하는 데에 큰 영향은 없으니 그냥 하나의 스토리로 인식하고 가면 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소나타에 들어가 있는 그 스토리 자체가 굉장히 장대하고 어렵다는 점이었다.

난 음악을 연구할 때 원전이 되는 예술 작품들부터 파고드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잘하는 편이었지만, 이 리스트 소나타만큼은 완벽하게 확신이 드는 주제 의식을 찾기 어려웠었다.

그만큼 이 곡엔 여러 주제가 섞여 있었다.

까다로운 악마의 춤과 웅장한 신의 음성,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리는 야상곡.

거대한 주제들이 이렇게 많은데 심지어 주제 변형 기법이라는 방식으로 모든 주제가 단 하나의 악장으로 얽혀 있다.

그냥 악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연주해 버리면 곡 전체의 느낌이 확 죽어 버린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이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주제의 독립성을 잘 살려야만 했다.

그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기술적으로도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열일곱 살이 제대로 연주할 만한 곡은 아니다.

만약 하더라도 기교에 치중하여 과시할 용도로 쓰는 것이 옳을 정도다.

그러나 세연은 그런 어려움의 기준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나름대로 충실하게 해석한 연주를 해내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감상자가 아닌 평가자의 입장에서 연주를 들을 수밖에 없는 나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진지하게 세연의 리스트 소나타를 분석했다.

도중에 불안한 지점들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되레 내달릴 땐 안정적이었던 음악이 잔잔하게 심오해지자 약간 어린애 투정같이 들리게 바뀌는 걸 보니 세연도 이 음악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음악 전체를 꿰뚫는 통일된 분위기는 분명하게 느껴져 왔다. 세연이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지닌 매력이 충실하게 발휘되는 멋진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세연은 이 음악을 어떻게 하면 보다 멋있게 표현할 수 있느냐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를 한 듯했다.

그것은 연주가 중간쯤 이르러서 웅장한 주제를 발전시킨 대목에 이르자 더욱 크게 두드러졌다.

‘확실히 멋지네…….’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하는 화음을 연달아 때려 넣으면서 장엄하게 진행되는 음악은 심지어 멜로디조차 옥타브 연주였다.

조금만 잘못하면 감정 과잉이 될 수도 있었으나 세연은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어뜨리지 않고 세련된 표현력을 펼쳐 냈다.

어떻게든 나름대로 멋지게 그려 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사실 이건 클래식 연주자보다는 락 스타의 기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지만, 정말 잘 어울렸다.

자신감 넘치고 멋있었다. 난 세연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내가 했다면 더 담백하게 했겠지…….’

앞선 연주에서 세연이 내 영향권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세연이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 둘 순 없었다. 모든 것은 세연이 원하는 대로다.

그래서 지금도 세연은 아주 영리하게 내 영향과 교수님의 가르침을 잘 정리하여 자신의 힘으로 잘 이용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구사하는 음악은 다른 누가 아닌 그녀만의 것이 되었다.

잔잔하게 정리되다가 푸가로 진행되는 음악을 들으며 난 미소 지었다. 이미 내가 걱정해야 할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보고 있는 건 역시 나였나…….’

지금 이 연주는 이틀 전 내가 연주했었던 메시앙의 기쁨의 성령에 대한 세연의 답이기도 했다.

세연이 내 음악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것을 완성하는 데에 내 도움을 조금 받으면 될 뿐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세연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준결승 무대를 보면서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내가 억지로 무언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녀는 잘할 것이라고.

이 순간 내 마음이 느끼는 진정한 감정을 솔직하게 돌아본 나는 그것이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곤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세연이 연주하는 푸가는 산뜻한 청량감으로 다가왔다.

‘깔끔하고 좋아.’

첫 주제를 살짝 변형한 푸가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정교함을 지니고 있었다.

또랑또랑한 세연의 연주는 전혀 부담감 없이 훌륭했다.

푸가는 화려한 클라이막스를 거쳐 다시 첫 주제로 이어졌고, 세연의 화려한 기교가 발현되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음악의 압력은 굉장히 강해서 여느 성인 연주자들 못지 않을 정도였다.

이전에 연주했던 카를 타우지히의 유령선을 들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세연은 거대한 표현을 멋지게 해내는 것에 능숙했다.

그만큼 기교가 받쳐 주기도 하고, 성격적인 부분도 상당히 작용하는 듯했다.

난 계속해서 이어지는 화려한 기교를 세연이 어떻게 펼치는지 즐겁게 지켜보았다.

정말 어렵고 고난이도의 구간이었으나 세연은 그야말로 전신을 써서 피아노에 모든 무게를 때려 넣으며 필요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그때 말했던 게 진짜였구나…….’

세연은 타우지히의 곡을 격렬하게 연주하면서도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랬던 이유를 타우지히가 생전에 했었던 버릇을 연구하다 보니 바로 내가 그렇게 퍼포먼스가 적은 타입이라는 걸 떠올리곤 날 토대로 연구했다고 했었다.

거기서 난 그녀가 날 따라 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는데, 세연의 말은 타우지히에서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연의 음악 연구는 작곡가인 리스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리스트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명성이 드높았다. 잘생긴 외모와 폭발적인 기교를 뽐내는 연주로 전 유럽을 석권한 사람이었다.

그런 리스트의 음악을 점잖게 연주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듯 세연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카멜레온과도 같은 유연한 스타일 변환과 그러면서도 음악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재능이었다.

왜냐하면 난 리스트의 음악을 연주할 때도 몸을 거의 흔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리듬을 타려고 하면 되레 음악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런데 세연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게 음악과 하나가 된 듯 움직이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면서 조금 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지금 리스트 소나타만큼은 나보다 저 애가 나을 것 같네.’

물론 난 이 곡을 레퍼토리에 넣지 않았으므로 연습을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피아노 연주자에게 있어서 그런 말은 정말 변명 이상이 될 수 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세연이 이룬 성과를 진지하게 보고 인정해야 할 때였다.

과격하게 세연의 모든 체력을 빨아들이던 주제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격식이 느껴지는 선율과 함께 천천히 모든 주제들을 총정리하기 시작했다.

녹턴에 가까웠던 주제를 살짝 변형시킨 형태였다.

그 구조를 분석하던 난 이제 이런 것도 큰 의미가 있지 않다는 걸 느끼며 생각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자 감미로운 선율이 내 귀를 간질였다. 세연의 선물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랑스럽게 속삭이던 주제는 서서히 그 속도를 높히고는 곧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필요한 테크닉은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다시 한번 옥타브로 이루어진 프레이즈가 무자비하게 전개되고 세연은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줄어드는 체력에 비례하여 곡은 더 힘들어지니 버티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세연은 이를 악물고 단 한 음도 대충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연주자인 나는 알 수 있었다.

‘다 왔어.’

마지막으로 화려한 합창으로 매듭을 지은 소나타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여운마저도 포함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메아리조차 그냥 울리게 두지 않고 정교하게 짜 놓았다. 세연은 어깨에 힘을 풀고 남은 선율을 유려하게 연주했다.

어둠의 환상이 잠시 흐릿하게 비추었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마치 꿈처럼 느껴졌던 30분이었다.

{와우…… 와.}

클레망이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며 감탄했다. 그가 이 곡을 어떻게 느꼈을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굳이 묻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클레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 곡이 30분이나 된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 듯했다.

30분이나 되는 곡을 지루하지 않게 전부 받아들이는 데엔 일종의 훈련마저 필요하다.

하지만 세연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설득력을 갖춘 연주로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마저 끌어들인 것이다.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때도 그랬지만, 세연의 연주엔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앞으로도 세연은 강점이 분명한 피아노 연주자로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녀의 강함과 성장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연은 준비한 곡을 한 곡 더 가지고 있었다.

환희가 가득한 적막 속에서 세연은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았다.

그 모습은 이미 콩쿠르 참가자가 아니라 개인 독주회의 연주자의 태도와 더 닮아 있었다. 단지 연주자가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여러 가지가 바뀐다.

마지막 한 곡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쥔 채로 세연은 다시 양손을 건반에 붙였다. 리스트 소나타를 시작할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그러나 이번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그보다 더 격정적이고 정열적이었다.

세연은 남아 있는 마지막 에너지와 집중력을 모조리 이 곡으로 불태우려고 하고 있었다. 그 각오를 직감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니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