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7화 (1,177/1,277)

##  1177화

클레망은 연신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집안 사정상 클래식 음악을 들을 기회는 분명 많았지만,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릴 때면 클레망은 항상 3초도 참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클래식 음악 같은 것은 도저히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콩쿠르 참가자가 집에 머물면서 연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흥미를 끌 만한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지만 클레망이 그것을 끝까지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건 유치한 고집이자 콩쿠르 후원자인 부모님에 대한 약간의 반발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만난 것을 계기로 클레망은 얌전히 앉아서 클래식을 들어 볼 수 있었고, 평소 가지고 있던 편견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저런 어린애도 이 정도로…….’

물론 반드시 나이에 따라 실력이 가늠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 퍼포먼스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20대 중반 정도가 한계고 예술가로서의 창의력 역시 젊을 때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건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라 미술이나 문학 등 여러 분야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열일곱 살이란 나이는 정말 어려도 너무 어렸다.

같은 나이인 타티아나만 보더라도 앳된 느낌이 있는데, 텔레비전 속 임세연은 그보다 두 살은 더 어리게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펼치는 연주는 클레망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모차르트 협주곡 15번은 편안하게 클레망의 편견을 녹여 버렸고, 이후 이어진 두 곡은 강렬하게 다가오며 클레망을 뒤흔들었다.

클레망은 마지막 곡을 준비하는 임세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준비한 곡들을 버리기까지 해야 하는 콩쿠르 무대에 당당히 올라선 저 작은 체구로 열 배는 커 보이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경의와 존중이 그의 태도에 담겨 있었다.

‘다음 곡 이름이 뭐더라…….’

분명 처음에 안내자가 설명해 주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클레망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대부분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찾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바로 중계되고 있는 곡의 제목을 혼자서 찾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클레망은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아들 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 써 준 것은 타티아나였다.

{쇼팽의 스케르초 3번이에요.}

{어…… 어?}

{이제부터 시작될 곡 제목이요.}

눈이 마주치자 타티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클레망은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소리를 내었다가 한참 지나서야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텔레비전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클레망은 원하던 정보를 듣고도 콩쿠르 중계에 집중하지 못했다. 타티아나의 다정한 속삭임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한참을 멍하니 타티아나의 옆모습을 보던 클레망은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텔레비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임세연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여 청중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스케르초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사실 소나타인지 스케르초인지 제목을 듣는다고 해도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작되는 곡을 들으면서 클레망의 뇌리에 기억된 스케르초의 이미지는 굉장히 강렬했다.

무겁고 웅장하게 깔리는 저음과 이어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화음.

어떠한 주제가 또렷하게 존재하는 곡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나 클레망의 머릿속에선 이미 두 명의 검투사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세 번 검을 부딪친 검투사들은 곧 뒤엉켜서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눈으로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불꽃이 튀는 소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갈수록 음악은 격정적으로 변해 갔고, 클레망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클래식 중에 이런 음악이 있는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들어 봤을 텐데.’

양손으로 빠르게 내리꽂는 박자감은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고 싶어질 정도였다.

분명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어쩐지 락 음악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임세연이 연주하는 스케르초는 멋있었다.

하지만 곡 전체가 그저 내달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강렬한 도입부가 끝나고 곧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며 천천히 흘러갔다. 마치 반짝이는 강물을 노래하는 듯한 구간이었다.

클레망은 지루하다는 생각 없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초반의 그 격렬한 구간 없이 바로 이런 선율이 들렸다면 조금 졸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선 부분과 한 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자 전혀 따분할 일이 없었다.

귀는 음악에 집중하면서 클레망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타티아나는 어떻게 듣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집중할 땐 다른 사람 같기도 해…….’

타티아나는 가만히 앉아 화면만 보고 있었다. 다리를 꼬거나 소파에 드러눕지도, 앞으로 구부정하게 있지도 않은 곧은 자세였다.

밝게 웃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돕거나 클레망이 곡 제목을 알고 싶어 하자 바로 눈치채곤 살짝 알려 주던 그 착한 여자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소파에 앉아 있는 건 그야말로 프로 피아니스트였다.

눈빛과 태도만으로도 저런 분위기가 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조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천사나 악마의 형상을 만들던 조각가들이 피아니스트라는 개념을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아마 이런 조각상을 만들 것이다.

클레망은 음악을 배경으로 해서 약간 다른 방향의 감상 시간을 가졌다. 잔잔한 음악을 충실하게 즐기는 데엔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벌써 시간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나서야 클레망은 잠깐 집중하는 사이 4분이나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간 동안 온전히 음악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타티아나에게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런 반성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임세연이 첫 주제를 반복하면서 클레망의 신경을 빼앗았다.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조용하던 음악이 자연스럽게 격렬하게 변화하더니 다시 가라앉았다.

이번엔 무언가 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클레망도 그저 음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눈과 귀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느껴졌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꽂혀서 당기는 낚싯바늘과도 같았다. 클레망은 거기에 끌려가며 저항할 수 없었다.

물살을 가르며 임세연이 이끄는 곳에 도착했을 때, 스케르초의 마지막 피날레가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왔다.

‘할 말이 없네.’

가장 빠르고 가장 화려한 마지막 장면을 놓고 클레망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클레망은 이 곡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끝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음악적 흐름이 하나로 향하고 있었다.

단지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숙하고도 위엄이 넘치는 음악은 클레망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클래식 음악 연주를 보면서 멋있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하기 어려웠는데, 지금 클레망이 느끼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음악들의 원류였던 한 유산의 웅장함이었다.

임세연은 양손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서 음악을 치솟아 오르게 하다가 한 번에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연달아 건반을 치며 마지막 방점을 확실하게 찍었다.

그것으로 8분가량 이어진 쇼팽의 스케르초 3번의 연주가 끝났고, 거기에 대한 찬사가 엄청난 박수로 이어졌다.

『브라바.』

『저 애라면 올라가겠는데…….』

클래식 애호가인 부모님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클레망은 약간 기분이 좋았다. 임세연의 연주는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들었는데 옆에선 떨어질 것 같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모두가 좋게 평가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제일 기뻐하고 있을 사람이 있었다.

클레망은 타티아나와 함께 그녀의 친구의 연주에 대한 감상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옆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클레망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타티아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 울 정도였나?’

솔직히 정말 멋있었다곤 생각했다. 클래식에 대한 편견이 모조리 박살 났을 정도로 이번에 가만히 앉아서 들어 본 클래식은 충격적이고 훌륭했다.

만약 기립 박수를 보내야 한다면 얼마든지 보낼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슬프거나 환희에 차서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감상 포인트가 약간 다른가…….’

일단 클레망은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고, 타티아나는 전문가일 테니 느끼는 바도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클레망은 적당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눈가를 약간 일그러트린 채 울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눈을 감지 않고 박수를 받으며 인사하는 화면 속 임세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 줘야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클레망은 그녀가 대체 어떤 감정으로 우는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는 사이, 타티아나가 옆에서 오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눈물로 반짝이는 그 눈을 마주한 클레망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타티아나는 얼굴을 가리며 피하지도 않고 잠시 클레망을 바라보더니 손바닥으로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미안해요.}

{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봐?}

나름대로 농담이랍시고 나온 말이 정말 끔찍했다. 클레망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바랄 바가 없네요.}

그 말을 듣고 클레망은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친구이자 경쟁자인 임세연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는 건 프로 피아니스트로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라던 것이 충족되었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 나온 말인지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클레망은 아직 타티아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녀는 얼마 안 가 떠날 사람이니 친해질 틈도 별로 없다. 그래도 클레망은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마음속 무언가를 느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클레망은 점차 차분해졌다. 그는 테이블 옆에 있던 티슈를 집으며 물었다.

{티슈라도 쓸래?}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눈물 맺힌 눈으로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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