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8화
마지막 곡은 쇼팽의 스케르초 네 곡 중에서도 세연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3번이었다.
다른 곡들은 이 콩쿠르를 위해 새로 준비한 것도 있고, 무대에 올리기 직전까지 교정한 것도 많았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완성도를 끌어 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 스케르초 3번은 세연이 거의 5년 가까이 연습했었던 곡이다.
세연은 미숙했던 시절부터 피아노란 악기를 조금 알게 된 지금까지 계속해서 스케르초 3번을 쳐 왔으며, 연습실이나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 기억과 경험들은 그대로 그녀의 자신감이 되어 주었다.
그 한 곡에 대한 자신감은 비단 한 곡을 잘 연주하는 데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무대에 처음 막 섰을 때도 마지막에 보여 줄 것이 있다는 믿음은 세연이 정신을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한…… 크게 틀린 건 없었어.’
정신과 체력을 쏟아부어 이루어 낸 결과물에 대해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퍼부어 주었다.
절대적인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자신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연주에 임했을 때 연주자는 진정으로 청중들을 설득하고 이끌 수 있게 된다.
그 수준을 세연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큰 무대에서의 경험으로 세연은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다음에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정적인 청중들을 보며 세연도 여전히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젠 물러나야 할 때다. 세연에게 주어진 기회는 여기까지였으니까.
「후…….」
긴 한숨을 내쉬며 세연은 청중석 1열의 심사 위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침착한 눈빛으로 세연을 보고 있었다.
박수를 치거나 해서 동료 심사 위원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자중하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눈빛에서 전해져 오는 흡족함과 격려는 지울 수 없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세연은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든 세연은 눈부신 조명을 마주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연은 감사를 올렸다.
바로 앞에 있는 청중들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기회와 힘을 내려 준 피아노의 신이라도 좋았고, 혹은 쇼팽이나 리스트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세연은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그건 화면 너머에서 보고 있을 그녀의 교수나 친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도 표현한 세연은 환하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옆으로 돌아 무대를 빠져나왔다.
『□□ □□□□□.』
{최고였어요.}
연주자 대기실에 있던 직원들은 박수를 치며 세연을 맞이해 주었다. 세연은 밝게 웃으며 모두에게 답했다.
대기실 한쪽엔 그녀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 있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세연은 테이블 위에 있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뚜껑을 열 수가 없었다.
세연은 잠깐 낑낑거리며 뚜껑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남아 있던 체력들이 모두 방전되어 버렸다.
세연은 앓는 소리를 내며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죽겠네…….」
30분짜리 협주곡에다가 50분 가까이 되는 독주곡 프로그램을 연주했으니 체력이 바닥날 만도 했다.
축 늘어져 탈력감을 느끼면서 세연은 힘들어서 헥헥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이 힘든 느낌이 굉장히 뿌듯하기도 했다.
세연이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사이, 그 광경을 지켜본 직원이 다가와 물병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절 구하신 생명의 은인이세요…….}
{하하하. 제가 보고 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농담을 할 정도의 힘과 여유 정도는 있다는 걸 확인한 직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목을 축인 세연도 늘어진 자세를 바로잡고 똑바로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자기 차례가 다 끝났고, 이 대기실에서 보이는 태도가 심사 위원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마냥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세연이 그간 배운 것은 단지 피아노를 잘 치는 법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또렷해진 눈을 한 세연이 물병을 테이블 위에 돌려놓고 고개를 들자 직원이 말했다.
{정신이 좀 드셨다면 이후 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이야기였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다음 연주자인 휴고 페테르센 님의 연주가 있고 나서 30분 후에 나온다고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자정이 넘겠네요?}
{맞습니다. 그때까진 가급적 이곳에 있어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앞으로 2시간 30분 정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묵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나와도 될 정도.
하지만 그렇게 돌아갔다가 내일 오전까지 푹 자 버릴지도 모른다.
호스트 패밀리 식구들이 있으니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직원은 만에 하나 있을 불상사는 미리 차단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세연은 시계를 다시 확인하며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편하게 씻고 일단 좀 눕고 싶다. 하지만 어쩐지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드레스는 갈아입어도 되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미리 알려 드리건대 만약 파이널리스트가 되신다면 그 순간 여러 카메라가 집중될 겁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보이실지 미리 생각해 두시길 바랍니다.}
역사가 깊은 콩쿠르와 함께해 온 홀의 직원답게 그는 연주자가 고려해야 할 부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나 체면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2시간 30분 동안 편하게 쉬면 되겠지.
그러나 세연은 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풀어놓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가 피아노의 신이 화나서 결과를 뒤집으면 어떡해?’
통과 여부는 심사 위원이 정하는 거니 상관없겠지만, 지금 세연이 여기서도 자세를 꼿꼿하게 하려는 이유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해하시고 이곳에 머물러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임세연 님을 도와줄 다른 직원들을 부르도록 하죠.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정중하게 안내해 준 직원은 이내 대기실 밖으로 휙 사라졌다.
세연은 그의 말을 듣고 일단 2시간 30분 정도는 별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직원이 도와줘야 한다는 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는데, 그걸 이해한 건 5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임세연 님. 앞으로 이동하실 땐 항상 저희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어…….}
갑자기 나타난 2명의 여직원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뭔가 다른 직원들과는 조금 다른 정장 차림이었다.
작은 무전기 같은 것도 가지고 있고, 그냥 콩쿠르 직원이라기보다는 거의 경호원 같은 느낌이었다.
‘벌써 출세한 느낌이네.’
세연은 평소 타티아나가 빅토르라는 경호원과 함께 다니는 걸 보면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재벌가의 영애이니 사실 경호원이 10명이 붙어도 안 이상했지만…… 세연에겐 정말 꿈같은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꿈이 지금 이루어졌다. 세연은 정말 큰 콩쿠르에 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물론 궁금한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여쭈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혹시 오늘 결과 나온 건가요……? 그래서 이렇게?}
세미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고 나서도 이런 직원들이 붙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연주를 마치자마자 바로 따라붙는 걸 보니 조금 이상했다.
어차피 파이널에 가는 건 지금 있는 참가자의 절반밖에 안 되고, 세연도 바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고 있으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직원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어 설명했다.
{아뇨, 아직. 결과는 오늘 자정 즈음 나올 겁니다. 하지만 올해는 파이널리스트들에 대한 규칙이 바뀌면서 보안 일정 역시 바뀌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번 피아노 콩쿠르 때를 예로 들자면, 임세연 님의 결과는 오늘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요일에 24명의 연주가 모두 끝난 후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세연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 왔다. 역사가 긴 콩쿠르인 만큼 쌓인 정보 역시 많았다.
가장 최근인 4년 전 정보로 보면 지금 직원이 말한 것과 같았다.
1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세연은 오늘 연주를 마치고 일주일 동안은 가만히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 직원의 말투에서 예상컨대 아마 직원들이 따라붙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세연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매일 차례대로 2명씩 뮤직 샤펠music chapel에 가는 거였죠?}
{예, 맞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분들에게 입궁 전 준비할 시간이 있었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들에겐 의무적으로 미발표 협주곡이 주어지며, 그것을 연습할 시간이 딱 일주일 주어진다.
그다음 바로 파이널 무대에서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있어 온 이 가혹한 심사를 공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콩쿠르엔 특이한 규칙이 많았다.
워털루에 있는 뮤직 샤펠이라는 곳에 모든 파이널리스트를 가두고,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며, 그곳에서의 연습 시간까지 철저하게 감독하고 감시하는 직원들을 두는 것 등이었다.
세연은 그 흉흉한 이야기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 혹독한 콩쿠르의 규칙들이 늘 똑같은 것이 아니라 더더욱 치밀하게 매번 변화한다는 점이었다.
직원은 다시 한번 혼동하지 않도록 설명하겠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릅니다. 하루에 참가자 4명의 실력을 한 번에 확인하고 곧바로 파이널리스트를 선출한 후 곧바로 뮤직 샤펠에 입궁시키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하루에 담당해야 할 참가자가 적어져서 더 집중적인 케어가 가능하게 되었죠.}
이번에 바뀐 규칙으로 인해 세미파이널 라운드 이후 호스트 패밀리에서 심신을 추스를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로 인해 생긴 장점들은 꽤 괜찮았다.
일단 제일 큰 건 뮤직 샤펠에서의 기간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기존엔 전체 심사가 끝난 후 다음 주부터 들어가는 것이었으니 1주였지만, 이번엔 개별 심사를 하고 파이널리스트로 확정되면 바로 들어가니 2주의 기간이 주어진다.
미발표 협주곡을 받아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2주로 기간이 길어진 건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물론 그만큼 다른 참가자들도 똑같은 조건이니까 상대적으로 좋아질 건 없지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파이널 무대의 퀄리티 상승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연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집중적인 케어라……. 보안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보안 문제도 있고요.}
{복잡하네요.}
이미 일정에 대한 이야기는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세세하게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만약 파이널리스트가 되면 당장 내일 몇 시에 들어가게 되는지, 혹은 그 안에 있는 기본 생활 용품은 무엇이 있는지 등.
하지만 지금 세세하게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통과자도 아닌데 유별나게 구는 것밖에 안 된다.
세연은 지금 제일 똑똑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을 고민하며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직원이 피식 웃었다.
{곁에서 상세하게 안내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2명의 직원은 정말로 세연의 담당이 된 것 같았다.
물론 당장 몇 시간 후에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겠지만…… 세연은 그런 것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할 것 없는 거 맞죠?}
{예.}
{조금 자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그럼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드레스는 갈아입지 않고 버틸 수 있어도 일단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고 싶었다.
직원은 세연을 조용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거기엔 직원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잠깐 사라졌던 다른 한 직원은 세연의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의상실에서 소지품들을 가져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세연은 가장 먼저 가방에서 스마트폰부터 꺼내서 전원을 켰다. 현대인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베개까지 가져다준 직원들은 마지막까지 방 안에서 세연이 혹여 불편해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휴고 페테르센 님이 연주를 마치시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옆으로 눕자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졸린 눈으로 세연은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원이 켜지자마자 갑자기 미친 듯이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메시지들에 답장하고 나면 시간이 다 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킥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