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79화 (1,179/1,277)

##  1179화

디아네 란츠호프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채점표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오늘 무대에 서야 하는 4명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었고, 그중 2명에겐 이미 점수가 부여된 후였다.

디아네는 세 번째 참가자의 점수를 고민하며 턱을 괴었다.

‘어떻게 할까…….’

한국에서 온 임세연. 디아네는 그녀의 1라운드를 다시 떠올렸다.

하이든의 소나타 16-52, 쇼팽 에튀드 25-5, 리게티 에튀드 5, 타우지히의 유령선. 전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인상 깊었다.

그래서 세미파이널리스트로 통과시키는 데에 모든 심사 위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은 24명 중 반절 안에 들 수 있느냐는 다른 이야기였다.

‘올해는 규칙이 바뀌어서 조금 번거롭네.’

이전과 같은 규칙이었다면 24명의 연주를 차례로 쭉 다 들어 보고 채점표에 따라 줄을 세워서 위쪽 12명만 파이널로 보내면 되겠지만, 하루에 4명씩 즉각 심사하는 것으로 바뀌어 심사 위원들은 24명 전체의 어렴풋한 실력 평균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결과도 빨리 받아 보고 뮤직 샤펠로 입궁도 1주 먼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디아네는 매일 몇 명을 파이널 무대로 보내야 할지 평가하며 그야말로 고뇌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심사 위원도 있었다.

그러나 디아네는 파이널리스트들의 라인업을 잘 구성하는 데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다.

복잡한 머리로 채점표를 내려다보던 디아네는 다시 규칙은 차치하고 지금 무대에 섰던 연주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임세연이 연주한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번과 의무곡인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리스트 소나타 그리고 쇼팽 스케르초 3번이었다.

‘이미 좋은 피아니스트지.’

디아네는 음악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심사 위원이었다.

연주 중에 실수로 음표 하나를 잘못 치는 것 같은 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해석을 아예 엉뚱하게 해 오거나 음악 전반에 대한 큰 흐름이 없고 중구난방이라면 그건 음악가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세연은 디아네가 보기에도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였다.

나이는 열일곱 살. 인풋을 아무리 많이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섞어서 자신의 음악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재능이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임세연은 마치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쓰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나게 수준 높은 연주를 자신만의 색채감으로 표현했다.

그건 아무리 좋은 교수에게 수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디아네는 지금까지 어린 천재를 정말 많이 만나 왔지만, 이번 콩쿠르에서야말로 특출한 천재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그중 1명이 바로 이 임세연이었다.

‘일단 이 두 곡은 테크닉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자기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좋았어.’

일단 쇼팽의 스케르초 3번은 완전히 자신만만해서 연주하는 것이 훌륭했다.

귀엽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거기에 대해선 다른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만약 모든 곡을 이 스케르초처럼 연주했었다면 아마 임세연은 파이널리스트가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높은 상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역시 디아네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에겐 무척 생소한 음악이었을 텐데도 세연은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이 이해한 바를 청중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건 디아네를 설득하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합리적인 구조성과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작곡가도 흡족해하는 것 같고…….’

심사 위원은 디아네이지만 이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를 작곡한 건 아니다.

디아네가 이 곡을 처음 본 건 두 달 정도 전이었다. 그사이 연구를 깊게 하긴 했지만 아직 확고하게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작곡가인 네르미나 양켈의 반응은 디아네의 심사에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

일단 테크닉이나 음악을 성립시키는 능력은 차치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잘 따라갔는지 아닌지 정도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두 곡은 충분히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심사 위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다른 두 곡이었다.

‘우연일지 아닐지 궁금한데…….’

임세연의 리스트 소나타는 굉장히 높은 곳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건 피아니스트로서 정말 멋진 일이었지만, 역시나 곡의 난이도 때문인지 빈틈이 있어서 견고함이 부족했다.

나이를 놓고 본다면 그것도 굉장한 실력임에는 틀림없다.

전 세계에서 겨우 한 줌 정도가 아마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지금 디아네는 그 한 줌보다 더 적은 수의 인원을 뽑아야 했다.

이곳에서 나이를 따져 점수를 더 주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음악만 놓고 보자면 임세연의 리스트 소나타는 간신히 파이널의 경계에 턱걸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게 한계인 것 같지 않았다.

일반적으론 콩쿠르에서 최선을 다하여 연주하는 곡들은 거의 한계에 다다라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임세연의 연주에선 발전 가능성이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그건 더 높은 곳으로 가겠다고 계속해서 손을 뻗는 적극적인 태도가 음악에도 그대로 묻어난 덕분이었다.

디아네는 그것을 똑바로 구분해야 했다.

과연 임세연이 정말로 궁극적인 음악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인지, 아니면 단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연습한 것뿐인지.

{뭘 그리 고민합니까?}

하염없이 돌아가던 펜이 툭 떨어졌다. 놀란 디아네가 옆을 보니 심사 위원 안토니오 발디니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여기 모인 심사 위원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디아네는 그의 의견도 듣고 싶어져서 슬쩍 물어보았다. 모든 심사 위원은 개별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방금 아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잘하던데요.}

안토니오는 바로 대답했다.

{솔리스트로서의 역량은 아직 꽉 차지 않았는데도 이미 상당하더군요.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역시 그렇죠?}

{하지만 협주곡은 약간 운이 좋았다는 느낌이 있군요.}

그런데 그의 의견도 디아네와 비슷했다.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임세연은 아무 문제 없이 연주를 해냈지만 그건 가스파르의 오케스트라가 잘 맞춰 준 덕분이기도 했다.

디아네의 귀를 속일 순 없었다. 임세연은 협연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이보다 더 대규모의 그리고 보수적인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파이널에서 임세연은 두 곡의 협주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토니오 역시 같은 의견을 전했다.

{파이널에서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요? 습득력? 아니면 오케스트라와의 호흡?}

{둘 다죠.}

깐깐한 성격답게 안토니오의 평은 가차 없었다. 협연자로서 세연은 약간 부족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협주곡들을 연주하더라도 그럴 텐데. 하물며 뮤직 샤펠에서 받아 연습해야 하는 협주곡이라면 더더욱 불안해진다.

그러나 디아네는 무작정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올해는 2주가 주어지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글쎄요.}

{습득력 부분에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협주 능력이야 사실 개인 실력보다는 상성이니까…….}

기간이 늘어난 대신 무대의 수준도 높아져야 할 테지만 그건 어떻게든 잘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디아네는 임세연이 그럴 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번엔 협주곡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독주곡도 한 곡 더 해야 한다. 임세연의 솔리스트로서의 역량이 한 번 더 빛을 발할 기회다.

{그나저나 디아네.}

{예?}

{이미 임세연 양을 옹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디아네는 멈칫했다.

디아네가 바라보자 안토니오는 껄껄 웃었다.

{자기 의견을 적으시죠.}

지금까지 안토니오는 자신의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디아네가 스스로에게 깊게 묻고 답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대충 이쯤 하면 되었다는 듯 안토니오는 돌아앉아선 채점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디아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임세연에게 점수를 매기는 펜에선 망설임이 사라졌다.

***

어두컴컴한 휴게실 한구석에서 일어난 세연은 눈가를 비비며 습관적으로 스마트폰부터 찾아 들었다. 시간은 자정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면서도 긴장을 아예 풀지 못하다 보니 몸이 저절로 시간에 맞추어 일으켜진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쭉 켠 세연은 컨디션이 한층 좋아졌다는 걸 느끼며 직원을 기다렸다.

그리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세연을 이곳에 데려다주었던 2명의 직원이 찾아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예. 한숨 자고 났더니 살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이동할까요?}

준비하거나 할 것도 없이 세연은 그녀들을 따라 움직였다.

도달한 곳은 청중들이 다 빠져나간 스튜디오4였다.

심사 결과까지 보기 위해 남아 있는 청중들도 몇 있긴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대부분은 빠르게 돌아간 후였다.

{이곳에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내에 따라 앞에서 세 줄 떨어진 좌석에 앉은 세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스마트폰을 열었다.

잠들기 직전에 했던 메시지들에 또 답장이 와 있었다.

세연은 일단 박 교수와 부모님의 메시지에 다시 답장을 하고, 이어 호스트 패밀리의 멜리아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하니 조금 더 긴장됐다.

‘타티아나는 자는 걸까?’

타티아나는 마지막으로 잘했다는 메시지만 보내곤 그 후로 말이 없었다.

자는 거거나 아니면 심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녀는 말이 그리 많은 성격이 아니었으니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 무대 앞으로 심사 위원들이 걸어 나왔다. 때가 왔음을 느끼며 세연은 침을 삼켰다.

마이크를 잡은 건 심사 위원장 테오도르 블랑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 1일차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오늘 멋진 무대를 보여 주신 4명의 피아니스트 모두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홀 안엔 어림잡아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테오도르의 말소리만 들렸다.

계속 무어라 하는 말이 프랑스어와 번갈아 들렸지만 솔직히 세연은 들은 것들을 그냥 반대편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안내 멘트는 그리 길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종이쪽지를 한 장 펴더니 말했다.

{한국, 임세연.}

세연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주위의 박수 소리가 세연에게 향했다. 열일곱 살의 나이로 파이널리스트가 된 그녀에게 순수한 축하를 보내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세연은 멍하니 주위를 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사방으로 인사했다.

정신없이 인사하는 와중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세연의 이름을 부른 테오도르 위원장은 쪽지를 다시 접어 버렸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직감했을 때, 테오도르의 발표가 이어졌다.

{이상입니다.}

오늘 연주했던 4명 중에서 파이널에 간 것은 임세연 혼자였다.

세연이 고개를 돌리자 휴고 페데르센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었던 그를 기억하는 세연은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리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씁쓸하게 다시 정면만 바라보았다.

발표가 끝나고 테오도르가 무대를 빠져나가자 이어 홀 안에 여러 소리가 퍼졌다.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들이 많은 것을 느끼면서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움츠러들었다.

{신경 쓰지 마, 파이널리스트! 그리고 축하해.}

화들짝 놀란 세연이 돌아보자 어느새 고개를 든 휴고가 작게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선 축하의 의미 외엔 다른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한참이나 어린 세연이 통과하고 자신이 떨어진 것이 편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휴고는 어른스러운 대응을 보였고, 거기에 세연은 무척이나 감사했다.

{고마워요, 페데르센 씨.}

{리스트 소나타 쳤다며? 통과할 만하네. 나는 마지막에 실수해서…….}

{아쉬워요.}

{어쩔 수 없지, 뭐.}

시원하게 승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며 휴고는 웃었다.

{파이널에서도 멋지게 잘해 봐.}

{감사합니다.}

세연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휴고는 손을 흔들며 일어났고, 다음으로 세연의 곁에 다가온 것은 자신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오늘 인터뷰 등은 없지만 사진은 찍히실 겁니다. 염두에 두고 움직이시길 바랍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호스트 패밀리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그, 그래요?}

콩쿠르 측에서 차량까지 준비해 주는 모양이다.

이전과 달리 확연히 대우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세연은 새삼 파이널리스트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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