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0화
홀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메라 렌즈들이 세연에게 집중되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가 되면 벨기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걸 세연은 정말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세연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안내하는 두 직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리바리하게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앞만 보고 가셔도 됩니다.}
{예…….}
세연은 떳떳하게 걸으려 애썼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기자들은 오늘의 결과를 취재하고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일단 만족한 듯했고, 세연은 무사히 사무실까지 갈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대기하면서 세연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파이널리스트라고…….’
조금 전의 기자들이나 옆에 있는 직원들을 보자 현실감이 확 들었다.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엔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도전했다. 모두 각국에서 손꼽히는 천재들이다.
그런데 그중 단 12명에게만 주어지는 자리에 세연이 첫날부터 자리를 얻어 낸 것이다.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세연은 한국에서도 그리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굴하지 않고 처음부터 높은 곳을 목표로 했고, 도달했다.
멍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박 교수와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사무실로 한 부부가 들어왔다. 세연의 호스트 패밀리 부부였다.
{아주머니!}
{해냈구나, 세연아!}
그간 세연을 진짜 딸처럼 대해 주었던 멜리아는 세연을 끌어안고는 한참이나 칭찬해 주었다.
세연은 그제야 비로소 멍하니 풀어져 있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멜리아의 남편인 세바스티안과도 포옹하고, 세연은 환하게 웃었다.
{아까 연주 마치고 바로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죄송하긴, 뭘! 괜찮아. 그사이 잘 쉬었니?}
{네, 조금 잤어요.}
{아하하, 피곤했겠네. 하긴 그런 연주를 했는데 안 피곤할 수가 없지.}
멜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해도 꿈만 같다는 듯 양손을 뻗어 세연의 어깨를 쥐었다.
{우리 집에서 파이널리스트가 나오다니…… 너무 행복하구나. 정말 경사네, 경사야. 뭔가 기념이라도 해야겠는데.}
호스트 패밀리의 입장에서도 파이널리스트가 나온다는 건 굉장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여건만 되면 파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건이 안 될 것 같다. 세연이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옆의 직원을 바라보자 그 눈빛을 알아챈 멜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니?}
이번에 규칙이 바뀌면서 파이널리스트들의 일정도 변화했다는 건 멜리아도 안다.
세연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일정대로라면 내일 오전 11시까진 뮤직 샤펠에 입궁하게 되어 있습니다.}
약간 곤란해하는 세연 대신 직원이 설명해 주었다. 차라리 사무적으로 설명하는 게 지금은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멜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여유가 없어요? 저번엔 적어도 주말은 같이 보낼 수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아쉽지만 규칙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직원의 대응은 차분했다.
{그간 호스트 패밀리로서 최선을 다해 주신 분들과 임세연 님이 마지막으로 여유 있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정을 당기는 대신 뮤직 샤펠에서 준비할 시간이 늘어났으니 결과적으로 임세연 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명은 들어서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이렇게 막상 닥치니까 조금…….}
멜리아도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단지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세연은 그렇게 아쉬운 것이 멜리아만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살짝 손을 뻗었다.
손을 쥐자 멜리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무튼 그럼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되는 거죠?}
{잠시 여기 서면을 확인하고 사인 부탁드립니다. 그 후 임세연 님과 자택으로 돌아가시고…… 저희도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직원은 호스트 패밀리에게 필요한 서류 몇 장을 건넸다. 세연은 그 서류보다는 이어진 직원의 말에 집중했다.
이제 설명도 마쳤으니 직원들도 퇴근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바로 뒤따르겠다니?
마치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투였다. 세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직원이 빙그레 웃었다.
{근처에서 묵고 오전에 시간 맞춰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 프로페셔널한 태도에 세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멜리아가 서류를 제출했고, 세연은 호스트 패밀리 부부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밤중 브뤼셀의 도로는 차가 별로 없어서 가로등 불빛만 휙휙 지나갔다.
창밖을 보던 세연은 약간 여유가 생겨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축하 메시지가 또 수십 개나 와 있었다.
그것들을 쭉 살펴 본 세연은 먼저 한국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오전 8시경이었다.
세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세연의 부모님은 딸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어로 듣는 칭찬은 세연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서 세연은 박 교수에게도 전화했다. 교수 역시 담담하게 세연의 실력과 떨지 않고 연주했던 것을 평하고 칭찬했다.
세연은 이제 박 교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때문에 그것을 만족시켰다는 걸 느꼈을 때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기쁨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메시지함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의 메시지도 있었다. 파이널 라운드 진출을 축하한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마음 같아선 그냥 전화해서 이 기쁨을 전하고 칭찬도 더 듣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무조건적으로 세연을 우선시하는 사람들과 이 두 사람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세연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무턱대고 내세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두 사람은 정말 착하고 상냥하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웃으며 들어 주고 원하는 반응을 해 주겠지만 그건 너무 일방적인 태도였다.
세연의 손가락은 한참이나 화면 위를 배회했으나 결국 마음을 굳혔다.
지금은 우선 적당히 메시지로만 답장을 하고 마음이 조금 추슬러지고 나면 전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정말 고맙다고 답장을 보내고 난 세연은 스마트폰을 끄고 좌석에 몸을 뉘었다.
{시간이 늦었네.}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세연은 여전히 드레스 차림에 메이크업도 그대로였다. 연주를 하면서 땀도 흘린 터라 지금 이대론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멜리아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일단 편하게 씻으라고 권했고, 세연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제대로 씻는 데에만 30분 넘게 소요되었다.
전부 마치고 나자 이미 뭔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멜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피곤할 테니 일단 쉬렴, 세연아. 그게 낫겠지?}
내일 아침엔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밤새도록 파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연은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쏟아부은 터라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고, 멜리아와 세바스티안 부부도 늦은 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렸었기에 쉬어야만 했다.
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멜리아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할 수 있겠니? 우리 집 파이널리스트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싶은데.}
{기대할게요, 아주머니.}
{그래. 푹 쉬렴.}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온 세연은 바로 침대 위로 엎어지는 대신 달빛이 들어오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간 세연이 썼던 침대와 의자, 피아노 등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듯했다.
세연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웃으며 혼잣말했다.
「고마웠어.」
조용한 방에 울려 퍼지는 건 세연의 목소리뿐이었지만, 분명 무언가 돌아온 답이 있었던 것 같다고 세연은 생각했다.
***
세연은 평소 잠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긴장하고 무대에 선 후에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니 8시간을 푹 자더라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콩쿠르 측 직원들이 말해 주었던 일정에 따르면 11시까지 워털루에 도착해야 했고,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10시에 일어났다간 대참사를 맞게 될 상황이었다.
「어…….」
그래서인지 세연이 눈을 떴을 땐 오전 7시였다. 알람은 8시에 맞춰져 있었는데도 그보다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이다.
멍하니 아침 햇살을 받고 있자니 전날 있었던 일들이 뭔가 거짓말 같았다.
세연은 이 멍함을 떨쳐 내기 위해 대충 세수만 한 다음 거실로 나섰다.
멜리아는 아침 일찍부터 세연을 위해 부엌에서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주머니.}
{잘 잤니?}
행복이 가득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멜리아가 답했다. 그녀는 이어 세연에게 손짓했다.
{정말 일찍 일어났구나?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씻거나 짐 쌀 것이 있으면 먼저 하렴.}
{아…… 그럴게요.}
그것도 문제였다. 2주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세연은 자신의 짐을 다 풀어 놓은 상태였다.
그것만 캐리어로 두 개였는데 중간에 산 물건들도 있어서 캐리어에 다 들어가긴 할지 의문이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세연은 얼른 방으로 다시 돌아가 캐리어를 채우기 시작했다.
뮤직 샤펠이란 곳에 가면 아마 필요한 건 거의 다 지원해 주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다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짐을 싸고 있는데 세바스티안이 문을 노크했다.
{세연아, 바쁘겠구나.}
{아! 아저씨.}
한창 정신없을 때긴 했다. 세연이 돌아보자 세바스티안은 바쁜 와중에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여자애가 짐 싸는 걸 내가 도와줄 수도 없이 부탁할 것만 하나 있는데, 말해도 될까?}
{부탁이요? 뭔데요?}
{염치 없는 부탁이긴 한데…… 이전에 친 곡들의 악보 있잖니. 혹시 괜찮다면 하나쯤 여기 두고 가 줄 수 있나 해서.}
‘악보?’
세연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바스티안이 설명했다.
{어디 쓸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구나. 걱정하지 말렴. 파이널리스트가 썼던 악보라고 제대로 자랑할 생각이니까.}
{아하하하하.}
미처 세연이 생각하지 못한 아주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호스트 패밀리에 지원했던 이 부부로선 파이널리스트가 묵었다는 것이 정말 큰 자랑인 것 같았다.
그러니 세연이 그 흔적으로 악보를 남기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세연이 캐리어에 넣으려고 옆에 쌓아 두었던 악보들을 보더니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중 절반을 집어 세바스티안에게 건네주었다.
{세미파이널에 썼던 건 다 드릴게요.}
{괜찮겠니?}
{쇼팽은 저도 아끼는 거긴 한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리스트 소나타 악보는 산 지 얼마 안 돼서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쇼팽의 스케르초 악보는 5년 넘게 거의 닳도록 보면서 필기도 많이 되어 있었다.
악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연에게 있어서 이 악보는 그만큼 추억도 많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드리고 싶어요.}
세연은 그간 신세진 것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심지어 오래 있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떠나야 하는 것 때문에 아쉬움이 굉장히 크기도 했다.
이렇게 악보를 남기고 가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세바스티안도 세연이 쉽게 악보를 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고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고맙구나, 세연아.}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짐을 줄여야 했거든요.}
{짐이 많으면 캐리어를 하나 더 줄 테니 편하게 싸려무나.}
{정말요?}
가장 반가운 도움이었다. 세연이 눈을 빛내자 세바스티안은 껄껄 웃고는 캐리어를 가지러 갔다.
세연은 오늘 떠나기 전까지 두 부부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