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81화 (1,181/1,277)

##  1181화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짐도 싸야 했고, 멜리아가 한껏 차린 아침 식사도 해야 했다. 그리고 복장도 후줄근하게 할 순 없으니 신경 써야 했다.

그나마 7시에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1시간만 더 늦게 일어났다면 세연은 정말 고생해야 했을 것이다.

간신히 준비를 다 마치고 나니 10시경이었다. 마치 세연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듯 누군가가 현관을 두드렸다.

멜리아가 문을 열어 주자 어제 봤던 직원 2명이 그곳에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임세연 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아직도 아쉬워하는 멜리아는 세연을 힐긋 보고는 직원에게 물었다.

{저희가 데려다주면 안 되나요? 마지막인데.}

{죄송합니다. 입궁하는 과정도 촬영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퀸 엘리자베스의 파이널리스트가 되는 순간 정말 프라이버시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야말로 모든 장면이 세계에 보여진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세연은 정말 이대로 촬영당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져서 몇 번이고 거울을 보았다.

다행히 아침에 바쁜 와중에도 멜리아가 도와준 덕분에 세연의 외견엔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직원들도 세연을 보고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짐이 많으십니까?}

{캐리어 세 개 분량이에요.}

{도와드리죠. 천천히 다시 살펴보시고…… 10분 정도는 괜찮으니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딱딱한 어투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직원들도 참가자들이 호스트 패밀리 가족들과 느긋하게 인사를 나눌 시간조차 없는 것에 대해 꽤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세연은 직원들에게 캐리어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고는 다시 멜리아와 세바스티안에게 돌아와선 두 사람을 껴안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아주머니, 아저씨.}

{우리야말로.}

부부 역시 세연을 끌어안은 채 기쁘게 말했다.

{너라면 그곳에 가서도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등 하는 거 아니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 투로 주고받는 말들은 그대로 세연에게 강한 지지와 힘이 되어 주었다.

멀리 한국에서 온 어린 피아니스트를 이렇게 잘 대해 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덕분에 세연은 가진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세연은 자신이 파이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데엔 호스트 패밀리의 역할도 정말 컸다고 생각했다.

{몇 등을 하든지 간에 다시 돌아올게요.}

콩쿠르가 끝나면 이렇게 허겁지겁 움직여야 하진 않을 것이다.

세연은 반드시 여유를 두고 다시 와서 제대로 인사하고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부부는 행복하게 웃으며 다시 세연을 강하게 안아 주었다.

마지막 인사까지 마친 세연은 더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웃으며 돌아섰다.

정말 특별한 기회를 거머쥐어서 가는 것이니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가시겠습니까?}

{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세연을 안내했다. 도로가엔 검은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밴에 올라타자 직원이 뒤쪽에 있는 캐리어들이 제대로 실은 것이 맞는지, 놓고 가는 짐이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세연에게 확인했다.

{제 가방이랑 스마트폰도 챙겼고…… 다 됐어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창밖을 보니 멜리아와 세바스티안이 길까지 나와선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세연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브뤼셀에서 정들었던 집과 거리를 떠나 도로로 빠져나오는 데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긴장되는데…….’

앞자리에 탄 두 직원이 말이 없어 세연은 뻘쭘함을 느끼며 마치 납치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로 가는지는 안다. 브뤼셀 남부로 20km정도 떨어진 워털루였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생전 처음 가는 곳이라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가자마자 세연은 그곳에서 2주간 감금 비슷한 것을 당할 예정이었다.

브뤼셀에서의 2주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앞자리의 두 직원은 세연의 담당이자 감시자이기도 했다.

‘지금부터라도 잘 보여야 하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밉보여 좋을 건 없을 것 같았다.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한참 눈치를 살피던 세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말씀하시죠.}

운전대를 잡은 직원이 딱딱하게 말했다. 언뜻 화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어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런 태도였다.

세연은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절 담당하시는 것 맞죠?}

직원은 룸미러로 세연을 힐긋 보더니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그사이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직 이름을 듣지 못해서요…….}

한참 동안 봐야 하는데 이름도 모르고 계속 무서운 직원이라고만 생각하면 기분도 위축된다.

세연은 적어도 두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아 두어야 앞으로 편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원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세연에게 물었다.

{제가 자기소개를 안 했습니까?}

{예? 어…… 안 하셨을걸요?}

『알마. □□□ □□□? □ □□□?』

『□□□ □□ □□□.』

갑자기 두 사람이 프랑스어로 대화하기 시작했지만 세연은 어쩐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세연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 뵙자마자 바로 이름부터 밝혔어야 했는데 약간 혼동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조금 긴장해서…….}

머쓱하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세연은 약간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태도가 딱딱하고 사무적이긴 하지만 직원들도 같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약간 여유가 생긴 세연은 살짝 까불어 보기로 했다.

{이름 안 알려 주시는 것도 콩쿠르 규칙인 줄 알았어요.}

{아무리 엄격한 규칙을 준수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세연의 농담에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답하더니 결국 피식 웃었다.

눈앞의 신호등이 빨갛게 바뀌어 차량이 멈춰서고, 그사이 두 직원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늦었지만 소개드리겠습니다. 전 아나이스 그리고 이쪽은 알마입니다. 앞으로 임세연 님의 모든 편의나 안내, 보안, 통역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할 테니 편하게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세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비로소 서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눈 덕분인지 차량 내 분위기는 한층 편안해졌다.

워털루 동쪽에 있는 뮤직 샤펠까진 30분 정도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세연은 지금 가는 곳에 대한 것이나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더 물어보기도 하면서 두 사람과 더 친해져 갔다.

차량이 숲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세연은 슬슬 다 왔음을 직감했다.

{와…….}

숲 가운데로 난 도로를 따라가니 갑자기 마법처럼 넓은 부지가 드러났다.

거기엔 작은 연못도 있었고, 무엇보다 눈길을 확 끄는 건물이 두 채 있었다.

전면이 유리로 된 긴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고, 그 앞에 있는 흰색으로 칠해진 2층 건물이 바로 뮤직 샤펠 본관이었다.

1939년 지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양식이었다. 최신식 현대 박물관이나 고급 별장 등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었다.

뮤직 샤펠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원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문 음악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활용되어 왔다.

상주 음악가들도 있고, 각 분야에 대한 마스터들도 있어서 끊임없이 음악 연구와 연주회 활동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사실상 대학이 아닐 뿐이지 거의 거기에 준하는 곳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연은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2주만이라도 꿈의 공간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긴장되었던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 차에서 내리자마자 산책부터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세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한 번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음대로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기자들이겠지……?’

이미 차량이 들어서는 길목부터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나이스가 미리 말했던 것처럼 입궁하는 과정 자체도 중요한 기삿거리로 쓰이는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 파이널리스트란 입장은 벨기에에서 그만큼 중요했다.

경거망동했다간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세연은 들떠 있던 마음을 다시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아나이스가 모는 밴은 건물 옆 주차장에 멈춰 섰다.

{입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연이 내리자 조금 더 가까이에서 기자들이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

물론 이곳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허가를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나름대로 세연도 카메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아나이스의 뒤를 따르다가 기자와 눈을 마주치면 웃어 주기도 했다.

아예 반응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나름대로 쿨하고 멋진 파이널리스트를 잘 연기해 낸 것 같다고 생각한 세연은 본관 입구 앞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대로 안쪽을 구경하고 싶어져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 근처에 있던 직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리둥절해진 세연이 그 남자를 올려다보자 아나이스가 설명했다.

{임세연 님. 지금부터는 외부와 그 어떤 통신도 하실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 등 전자 기기들은 모두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아.}

올 것이 왔다.

이미 이렇게 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때가 닥치니 쉽지 않았다.

세연은 딱히 자신이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벌써부터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얌전히 규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연은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하고는 넘기려다가 멈칫했다.

{마지막으로 SNS에 사진 하나 올려도 되나요?}

{……그러시죠.}

어쩐지 직원의 표정이 요즘 애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이긴 하는데……

허락을 받아 낸 세연은 마지막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궁리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이 굵은 세연이라도 뮤직 샤펠 본관 입구를 배경으로 하여 셀카를 찍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들 바쁘고 진지한데 혼자 놀러 온 것처럼 굴 상황은 아니었다.

어영부영 대충 앞에 있는 연못에 포커스를 두고 사진을 찍은 세연은 그대로 SNS에 짧은 글을 투고했다.

이 SNS는 세연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벨기에에 와서 있었던 일들이 하루하루의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2주 동안은 하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생겼다.

{아.}

{무슨 일이죠?}

{그…… 혹시 지금이라도 필요한 물건 사러 갈 순 없겠죠?}

{…….}

친절하던 아나이스도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썼다. 무서워진 세연은 그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일기장으로 쓰던 SNS에 접속하지 못한다면 아날로그 방식으로라도 일기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오는 건 정말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다.

하루하루 꼼꼼하게 일기를 써서 기록하면 추억으로 깊게 남을 일인데,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잊거나 헷갈려지기라도 하면 억울해서 못 산다.

하지만 세연의 짐에는 연구용 노트만 몇 권 있을 뿐이었다. 그런 노트의 아무 페이지에 대충 일기를 휘갈겨 쓰고 싶진 않았다.

예쁜 일기장 같은 것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인다.

우왕좌왕하던 세연은 결국 자신의 일기장은 포기했다. 대신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길게 쓸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기는 데에 성공한 세연은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직원에게 넘겼다.

그러고 나선 심지어 가방 안까지 검사당한 후에야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속세로부터 단절되는 것 같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세연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아침부터 뉴스에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첫 파이널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난 기사들을 넘겨 보면서 세간의 평가를 살폈다.

그런데 화제의 파이널리스트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다이어리를 사.]

난데없는 말에 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제의 연주나 뉴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웬 다이어리?

메시지를 들여다보던 난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흘러나왔다.

난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연은 뮤직 샤펠에 들어가기 직전에 내게 마지막으로 다이어리를 사라는 조언을 남긴 것이다.

“대체 왜?”

이 의문의 조언에 대한 궁금증은 날 한참이나 궁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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