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2화
세상엔 정말 많은 콩쿠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파이널리스트들 관리를 엄중하게 하기로 유명했다.
모든 통신 기기를 뺏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감금한 다음 상시 감시원까지 붙이는 건 오래전부터 있어 온 전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감금하는지는 아직 당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
세연이 방금 전에 그렇게 감금된 것 같은데…… 이렇게 짧은 문장만 간신히 남길 수 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던 걸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당장 스마트폰부터 내놓으라고 하나……?’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지금부터 2주간은 연락 두절 상태가 되는 것이니 적어도 마지막으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할 기회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자체적인 규칙을 수없이 가지고 있는 콩쿠르이다 보니 무엇이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세연의 상황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뿐이었다.
“다이어리…… 다이어리라…….”
숨겨진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계속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방 안을 세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아나스타샤로부터 전화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난 그녀가 왜 전화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혹시 방금 메시지 받았니?
난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예.”
-뭐라고 왔어?
“다이어리를 사라고…….”
아나스타샤는 작게 침음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똑같네. 우리들한테 공통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란 거지……. 뭘까 이게? 다이어리를 사 달라는 거라면 둘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텐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금 더 단서가 있다면 모를까, 추리력이 뛰어난 아나스타샤도 이렇게 갈피를 못 잡을 정도라면 내가 알 방법은 없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아나스타샤가 진지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야 해. 그 애가 남긴 유언이니까.
“유, 유언이라뇨?”
-그 말을 끝으로 연락 끊겼잖아. 그리고 SNS 봤어? 연못 사진을 찍어 올렸던데.
깜짝 놀란 나는 전화를 연결해 둔 그대로 세연의 SNS를 켰다. 정말로 몇 분 전에 연못 사진과 마지막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가 남길 만한 글이라기엔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도 장난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이런 건 싫었다.
“무서운 말씀 마세요.”
-농담이야. 그나저나 진짜 뭘까…… 이걸 애너그램으로 재조합하려면 모음은 u,a,i,a…….
“하지 마시라니까요…….”
본격적으로 해독하려고 하는 아나스타샤를 말리고 난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약간 낯이 익은 연못이다 싶었는데 뮤직 샤펠에 대해 조사했을 때 봤던 연못이었다.
역시 도착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SNS에 사진을 게시하고 간신히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SNS를 올릴 틈에 메시지를 길게 보내 주지…….’
우선 순위가 조금 바뀐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세연에겐 SNS도 중요했을 것이다. 내가 가치 판단을 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 세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우린 우리대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조언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뮤직 샤펠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이겠죠.”
-다이어리가 필요하다고? 나 이미 있는데.
“저도 있어요.”
-그 애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새것을 사라는 것 같아요.”
-왤까…….
외국에서 콩쿠르에 참가하고 활동하려면 스케줄 관리나 중요한 메모 등을 위해 다이어리는 필수였다.
그냥 쓰던 다이어리를 뮤직 샤펠 안에 들어가서 써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세연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메시지까지 한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 보지 않으실래요?”
-응?
“다이어리가 비싸거나 큰 물건은 아니니까…… 일단 새 다이어리를 사서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이유에 대해선 나중에 뮤직 샤펠에 들어가서 세연에게 물어보면 되고요.”
말을 맺고 나서야 난 그것이 파이널리스트가 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도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내 즐겁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거기 들어가는 방법 말고는 그 애한테 물어볼 방법이 없는 거지? 갑자기 의욕이 생기는데?
“저도요. 왜 세연이 이런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남겼는지…….”
여전히 세연의 상황은 알 길이 없고, 그녀의 메시지는 의미불명이지만 그건 둘째로 쳐도 될 것 같았다.
다이어리는 이미 파이널리스트가 된 세연이 보낸 힌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약간의 호기심과 의욕을 얻었다.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닐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아나스타샤도 시원하게 말했다.
-그럼 다이어리는 언제 사려고?
“당장 내일 무대에 서게 될지도 모르니 일찍 사는 게 낫겠죠? 11시니 여유도 있고…….”
내가 시계를 보며 웅얼거리자 아나스타샤가 제안해 왔다.
-같이 사러 갈래?
“좋아요!”
고민하지 않고 난 바로 대답했다.
날짜로 치면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녀와 오랫동안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처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자주 봤으면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적당히 약속 시간을 잡고 내가 아나스타샤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알겠어. 일단 난 만나기 전까지 이 애너그램의 비밀을 더 풀어 볼게.
“애너그램에 꽂히신 것 같네요.”
-재미있잖니? 이따 봐.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괜히 더 장난스러워진 건 아마 세연이 보낸 메시지를 근거로 우리가 주도적으로 움직이기 위함이겠지.
그 생각을 알 수 있었던 나는 빙그레 웃으며 스마트폰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바로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밖의 날씨를 살피고 적당한 외출복을 꺼냈다.
티셔츠를 입어도 될 만한 날씨였지만 혹시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너무 덥지 않게 입는 것이 핵심이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가지고 있는 옷이 몇 벌 없어서 금방 결정할 수 있었다.
‘저녁 전에는 돌아와야겠지.’
준비를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돌아보고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클레망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그는 내 발소리가 들리자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 어, 나가려고?}
{예, 잠시…… 다이어리 좀 사려고요.}
{다이어리? 왜?}
{친구의 유언이에요.}
{유, 유언?}
{아, 말실수했어요.}
아나스타샤의 말을 듣고 난 뒤라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클레망은 정말 괜찮은 것이 맞는지 기웃거리며 날 살폈다.
‘묘하게 적극적이네.’
월요일인 오늘, 랑스 부부는 각자 볼일로 집에 없었다. 대신 일찍 방학을 맞이한 클레망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원래 부모님이 맡고 있던 호스트 패밀리의 일까지 넘겨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고 했다.
내가 움직이면 최선의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마음씀씀이는 무척 고마웠다.
난 천천히 지금 다이어리를 사러 가야 하는 상황을 그에게 설명했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니 굳이 이렇게까지 말할 건 없었지만, 클레망은 어제 세연의 무대를 같이 본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친절한 만큼 나도 친절해야 했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클레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차 물었다.
{어디서 사야 하는지는 알아?}
{어딘가엔 있겠죠……?}
{백화점 같은 곳에 가 봤자 원하는 건 안 팔걸?}
이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까 일단 빅토르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으로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클레망은 브뤼셀을 잘 아는 자신에게 물어봐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나도 살 게 있긴 한데. 음…… 데려다줄까? 그게 내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굴면 거절하기 정말 어렵다. 그의 말대로 이건 연주자의 케어에 들어가기도 하고.
하지만 흔쾌히 같이 가자고 하기엔 조금 난감했다. 일단 난 빅토르와 개인 차량이 있어서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딱히 집주인이 같이 동행하지 않아도 움직임에 제약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다이어리를 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난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약속을 잡은 상황이었다.
세연의 마지막 메시지를 따른다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지만 아나스타샤와 돌아다니면서 놀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클레망이 끼면 아무래도 그도 신경 쓰게 되어 버린다.
적당히 거절하려고 마음먹은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친구와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요. 그녀의 의사도 물어볼게요.}
{아, 당연히 같이 놀자거나 하는 건 아니야! 차로 데려다주기만 하고 난 내 볼일 보러 갈게! 그리고 돌아올 때 다시 데리러 가기만 하면 되잖아? 중간에 신경 쓸 일 전혀 없……. 아니, 잠깐만. 브뤼셀 시장 한복판에 그냥 둬도 되나……?}
클레망은 허둥지둥 변명하듯 말하더니 이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도 모르는 열일곱 살짜리가 두리번거리고 다녀도 되는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경호원이 있으니 그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상관없겠지만 클레망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브뤼셀에 머무는 날 도와주는 건 호스트 패밀리 사람들이 맡은 일이었다. 뭐든지 내 멋대로 굴 수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어지간하면 랑스가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주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플라지 빌딩에 갈 때 데보라 아주머니가 날 태우고 다니면서 행복해하시는 걸 본 적이 많다.
단지 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들인데 그것조차 내가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 무작정 거절하는 건 상당히 실례되는 일이었다.
조금 생각해 본 나는 클레망에게 말했다.
{근처까지라면 괜찮아요. 전 클레망에게 귀찮은 일이진 않을지 걱정되는걸요.}
{귀찮다니? 내가 먼저 제안했잖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저번주에 백화점에 갔을 때도 아나스타샤와 함께 왔던 레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자기 볼일도 있다고 했으니 중간엔 아나스타샤와 둘이서 돌아다닐 수도 있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금방 준비하고 오겠다는 클레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켜져 있는 텔레비전을 껐다.
***
조수석에 앉아 있는 클레망의 표정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면허를 딴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빅토르는 그 말을 듣더니 대번에 그가 운전하는 차에 내가 타는 걸 반대했다.
빅토르는 진지하게 압력을 행사하면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가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하자 클레망은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빅토르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탔다.
왜 내가 아니라 그를 옆자리에 태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당히 불편한 것 같았다.
클레망은 조금 우울해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조금 무례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절할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상황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다행히 도로를 따라 몇 분 안 가서 우리는 거리에 나와 있는 아나스타샤와 만날 수 있었다.
“안녕!”
“어서 타세요, 아나스타샤.”
놀러 나가고 싶다는 의사가 가득해 보이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온 아나스타샤는 폴짝 뛰듯 차에 올라탔다.
“빅토르도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쪽은?”
클레망이 어색하게 눈인사를 보내자 난 얼른 아나스타샤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동행자가 있다고 미리 전화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바로 알아봤다.
“집주인 아드님? 아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까딱이며 클레망을 쳐다보았다.
쿨하게 같이 가도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지금 처음 보는 것이니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혹시나 싶어 노심초사 지켜보고 있는데,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오늘 잘 부탁해요?}
{그…… 그래.}
클레망은 그 손을 잡고 악수하면서도 여전히 어색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