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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83화 (1,183/1,277)

##  1183화

초면인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나서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저 앞 큰 사거리에서 우회전이요.}

클레망은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 빅토르에게 길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빅토르도 이미 이 근처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이곳에 사는 클레망보다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앞좌석의 두 남자를 보니 일단 목적지까지 가는 데엔 아무 문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아나스타샤에게 관심을 돌렸다.

며칠 만에 그녀를 보니 정말 반가웠다.

콩쿠르를 앞둔 긴장과 연습 때문인지 약간 피곤해 보였다. 혹시 그녀의 눈에 나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걱정되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챈 아나스타샤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방긋 웃었다. 나도 웃으며 적당한 이야기를 던졌다.

“레아는요?”

“학교 갔지. 요즘 시험 기간이라서 힘들어 죽겠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보니 클레망 씨는?”

“대학생이신데…… 시험을 다른 걸로 대체해서 학기를 끝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것도 돼?”

졸업을 앞둔 학년이나 대학원생이라면 모를까 1학년이 그러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 학생이 뛰어나기만 하다면 대학교 시스템에서 빠른 길을 찾아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클레망이 그만큼 뛰어난 걸까?

아나스타샤와 주고받은 러시아어 사이에 그의 이름이 나온 것을 눈치챘는지 클레망이 룸미러를 통해 이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난 그를 소외시킬 생각이 없었다.

{대학생이시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학생증 보여 줘야 하는 건가?}

{아하하하, 아뇨.}

클레망이 정말 어떻게 이 시기에 학기를 마친 건지 궁금해진 우리는 이것저것 학교 이야기를 물어보았고, 그가 명문대인 겐트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과 1학년인데도 벌써 교수님들의 눈에 들어서 여러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되레 별것 아닌 것처럼 적당히 숨기려는 투였다.

그러나 이미 클레망이 꽤 대단하다는 걸 알아챈 아나스타샤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머리 좋으신가 봐요? 겐트 대학교는 뢰번 대학교랑 같이 벨기에에서 최고로 좋은 학교로 알고 있는데.}

{뭘……. 남들만큼 할 뿐이지.}

{남들만큼 해선 절대 그 대학교 못 갈 걸요?}

더 비행기를 태우려 하자 클레망은 손사래를 치더니 갑자기 우리 쪽으로 이야기 방향을 틀었다.

{너희야말로 대단한 것 아니야? 피아노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건 내가 들어도 알겠던데.}

단순한 립 서비스 같은 건 아니었다. 어제 그가 세연의 무대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던 것을 난 옆에서 똑똑히 봤다.

역시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이 더 대단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 칭찬 열차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지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열차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전 피아노만 간신히 칠 줄 알고. 진짜는 여기 있는 타티아나죠. 이 애는 공부까지 잘해요.}

{그래?}

{우리 학년 수석이거든요. 내년에 예게Егэ 치면 얼마나 고득점을 낼지 궁금하네요.}

{예게가 너희 대입 시험이야? SAT 같은?}

{맞아요.}

{아나스타샤, 그만하세요…….}

아직 시험을 치른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당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건 피아노뿐이기도 하고.

다급하게 아나스타샤를 말리자 그녀가 장난이었다는 듯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클레망 씨는 타티아나의 안내역으로?}

{그러려…… 아니, 음…….}

말을 더듬던 클레망은 운전석의 빅토르를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원래는 차가 필요할 테니까 운전만 해 주려고 했었는데…… 경호원이 있는 줄은 몰랐지.}

{아하, 호스트 패밀리로서?}

{그렇지. 그게 우리 가족의 의무니까.}

아나스타샤가 짚어 준 단어를 캐치하여 클레망은 딱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의무라고까지 할 건 없지 않나 싶지만 우리가 콩쿠르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호스트 패밀리의 진심 역시 의심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다는 걸 알기에 다른 말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클레망은 작게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난 필요 없는 것 같고…… 있으면 방해나 되겠지. 문구점까지 얼마 안 남았어. 거기 도착하면 난 따로 움직일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여자애 둘이 다이어리를 사러 가는데 옆에 있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나 보다.

우리가 친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정말 어색하기만 할 것 같긴 하다.

그렇게 클레망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려 할 때였다. 아나스타샤가 불쑥 끼어들어선 그에게 물었다.

{따로 뭐 하실 건데요?}

{어…… 나도 살 거 사고…….}

{살 거요? 뭔데요?}

{……책?}

대충 넘어가지 않고 계속 묻자 클레망은 어정쩡하게 답했다. 계획 없이 있다가 그냥 아무 단어나 말한 것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말꼬리를 잡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저도 모스크바에 두고 온 악보를 다시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서점 가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문구점 갔다가 서점에 같이 가는 건 어때요?}

살가운 제안에 클레망은 물론 나도 당황했다.

클레망이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그가 있어 우리가 불편한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딱히 타협하려고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종종 차갑게 군다는 걸 아는 나는 그녀가 클레망에게 실수라도 하면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 쪽에서 이렇게 먼저 친근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고 내 멋대로 말해 봤는데. 어떠니? 타티아나.}

{전 괜찮아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받아 준다면 내가 거절할 이유도 없다.

단둘이 놀고 싶긴 했지만 클레망이 있어도 크게 문제 될 것 같진 않았고.

되레 발을 빼려 하는 건 클레망이었다.

{방해되지 않겠어?}

{클레망 씨는 운전 말곤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 지역에 밝은 프랑스어 사용자가 얼마나 필요한데요.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문구점을 알려 주셨으니 거기에 악보를 살 서점과 점심 식사를 할 만한 음식점도 골라 주시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클레망에게 동행을 제안하고는 당근도 던졌다.

{그렇게 해 주시면 답례로 점심 식사 정도는 살게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진 않았다. 클레망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아나스타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셋이서 같이 다니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면 상관없다.

분위기도 좋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빅토르가 슬그머니 물었다.

“식사까지 하시는 겁니까? 아나스타샤 아가씨.”

“타티아나랑 같이 밥 먹고 싶은데 안 되나요? 시간도 괜찮은데. 쇼핑 마치고 나면 거의 1시 가까이 될걸요?”

“그렇긴 하군요.”

아나스타샤의 말엔 빈틈이 없어서 빅토르도 알겠다는 듯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위화감을 느낀다는 걸 알았는지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빅토르는 옆자리에 있는 분을 경계하는 것 같은데?”

“예?”

내가 반문하자 빅토르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전혀 아닙니다. 아가씨들이 누굴 만나 무엇을 하든 제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니…….”

“그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정말 간섭 안 하는 사람 없던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도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빅토르가 마치 귀찮은 오빠처럼 클레망을 경계한다는 건가?

하지만 빅토르는 무작정 내 주변에 간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난 이곳에 와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알레한드로를 만나거나 마누엘과 카페에 갔을 때도 빅토르는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부분은 아나스타샤가 확실히 오해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밥만 먹을 거니까요. 진짜로.”

나도 아무 생각 없다. 어떻게 보더라도 같이 식사까진 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식당까지 추천받는다면 클레망만 따로 떼어 놓는 게 더 이상하다.

아마 아나스타샤도 그런 자연스러움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둘만 노는 건 추후 내가 불편해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빅토르는 짧게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죠.”

이 모든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클레망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음 교차로가 나오자 빅토르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다.

난 그를 앞에 두고 우리끼리 이야기한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나스타샤가 상냥하게 나와 준 덕분에 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내를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은 한 커다란 건물 앞이었다. 클레망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브뤼셀 남부에서 가장 큰 문구점이라고 한다.

{원하는 건 여기서 사면 될 거야.}

차에서 내리자 클레망은 살짝 앞장섰다.

원래 여기까지만 우릴 안내하고 가려고 했다가 더 안내하려니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가 바로 그 뒤를 따르자 금방 분위기가 밝아졌다.

{클레망 씨도 다이어리 사지 그래요?}

{글쎄.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희는 어제 파이널리스트가 된 애가 사라고 해서 사는 거랬지? 그래서 어디에 쓰려는 건데?}

아나스타샤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몰라요.}

{어?}

{그냥 사는 거예요. 기왕이면 예쁜 걸로.}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단한 콩쿠르 도전자들을 보는 듯하던 클레망의 눈빛은 갑자기 초등학생을 보는 것처럼 바뀌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유는 정말 없었다. 우린 세연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따를 뿐이었으니까.

{저쪽에 있겠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뿐인 간판들을 보면서 클레망이 우릴 이끌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 큰 문구점을 샅샅이 뒤지고 다닐 뻔했다. 아나스타샤가 같이 가자고 붙잡은 게 정답이었던 것이다.

불과 몇 분 되지 않아서 우린 노트와 다이어리 등이 가득 꽂힌 매대 앞에 설 수 있었다.

{괜찮은 거 많은데?}

아나스타샤가 흥얼거리며 매대 앞에 서서 다이어리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그녀 옆에 서서 살펴보았다.

피아노나 음악과 관련된 디자인인 다이어리도 많았지만 굳이 그런 걸 살 필요는 없었다.

세연의 진의를 모르는 이상 되도록 무난하게 생긴 걸 사는 걸 좋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캐릭터가 있거나 화려한 건 피하려 하고 있었다.

{이거 봐 봐. 어떠니?}

{괜찮네요.}

우린 알록달록한 다이어리들 사이에서 무난한 걸 몇 개 찾아 놓았다.

꼭 하나만 사란 법은 없으니 여유분으로 몇 개 더 사 놓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다이어리들을 골라 놓고 고개를 들었다.

클레망은 옆에서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돌아보았는데 때마침 다이어리를 구경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필요는 없는데, 이거 자물쇠가 달려 있잖아. 이 작은 다이어리에 보안 기능도 있다는 게……. 게다가 이거 야광이기도 하다?}

{야광?}

{밤에도 책상 위에서 바로 찾을 수 있겠어. 이렇게 보면 꽤 밝아.}

그러면서 클레망은 손을 말아 쥐고 다이어리에 대고는 눈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보면 야광으로 빛나나 보다…….

뭔가 기능성에 꽂혀 버린 것 같은데. 겐트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 천진난만하게 다이어리를 신기해하는 걸 보니 조금 재미있었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를까 다이어리는 빛이 없으면 어차피 내용을 못 읽…….}

{이, 이건 어떤가요? 아나스타샤?}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길래 난 얼른 그녀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클레망의 동심을 지켜 주고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내려다보더니 이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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