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84화 (1,184/1,277)

##  1184화

나와 아나스타샤는 다이어리를 세 개나 샀다.

용도도 없으면서 여유 있게 사 놓는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래도 비싸거나 크지도 않은 물건에 너무 야박하게 굴 필요도 없었다.

막상 이렇게 보니 하나만 고르기 어렵기도 했고.

클레망도 하나 사려나 싶었는데 그는 자물쇠 달린 야광 다이어리를 그냥 구경만 하고는 내려놓았다.

신기해할 건 다 신기해했으면서 막상 사려니 민망해졌던 걸까. 뒤늦게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이었다. 이미 소용없다는 걸 알긴 하려나 모르겠다.

펜이나 다른 문구도 사 갈까 하다가 그렇게 사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이 불어날 것 같아서 적당히 그만두었다.

{서점은 걸어서 그리 멀지 않아.}

문구점을 빠져나온 우리는 나란히 서점으로 향했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따스한 5월 오전의 햇살을 받으며 브뤼셀 거리를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단지 걷기만 하는데도 온몸에 활력이 감도는 것 같았다.

조금 조용해질 때면 옆에선 아나스타샤와 클레망이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두 사람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렇게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악보는 어디에 있으려나.}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클레망은 악보들이 있는 곳으로 우릴 안내했다.

꽤 큰 서점답게 악보들도 있을 만한 건 거의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방앗간 앞 참새처럼 두리번거리며 악보들을 살폈다.

이번 콩쿠르에서 연주할 곡들은 종이 악보는 물론이고 태블릿 컴퓨터에도 다 담아 왔지만, 그럼에도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도 그중 한 권을 뽑아 들더니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보기에 편한지, 기호들은 어떻게 써 놓았는지 등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거 어때? 타티아나.}

{헨레네요. 음…… 제가 알기로 헨레보다는 베렌라이터를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역시 그렇구나. 내가 모스크바에서 원래 보던 것도 베렌라이터였어. 여기 있으려나.}

{찾아볼까요?}

다시 책장을 뒤적이던 아나스타샤는 원하던 악보를 찾아냈고, 페이지를 휙휙 넘겨 보더니 조금 전에 골랐던 것과 진지하게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다른 출판사 것은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본 것 같은데…… 어지간하면 보던 걸 보는 게 낫다.

그렇게 악보를 놓고 의견을 나누는 우릴 보던 클레망은 뒤편에 와서 슬쩍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이걸 읽고 그런 연주를 해낸다는 게 신기하네…….}

{클레망 씨는 피아노 쳐 본 적 없어요?}

{기억도 안 나는 꼬맹이 시절에 쳤던 적 있긴 한데, 다 까먹었지.}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았다는 듯 양손을 탈탈 털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 같진 않았다. 약간 남아 있던 불씨가 어제 다시 타오르게 된 것이다.

{어제 봤던 연주는 정말 대단했었어.}

다시 한번 그가 감탄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대단하다는 말 외엔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이었나 보다.

아나스타샤도 그를 보더니 적극 동조했다.

{저도 세연 임이 그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어요. 작년에 미국에서 봤을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너희 정말 전 세계에서 만나는구나?}

{운이 좋았죠.}

그녀는 내가 모르는 세연의 실력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선 아나스타샤가 우승하긴 했지만…… 지금 세연이 파이널리스트가 된 상황에선 어쩐지 한발 뒤처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 차례는 아직 안 왔으니까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딱히 긴장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도 준비한 나름의 음악을 선보이고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제대로 잘 해낸다면 파이널 라운드에도 갈 수 있겠지.

나와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었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속 악보를 구경하던 클레망은 악보가 암호문처럼 보였는지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그 한국 아이는 원래 효율성을 중시하나 봐? 메시지에 다른 이유도 적지 않고 보낼 정도로.}

그의 궁금증은 세연에게로 향했다.

아무 설명 없이 다이어리를 사라고 하고, 그걸 무턱대고 사는 우리가 신기해 보인 모양이다.

어쩌면 연주자들에 대한 편견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대신 웃으며 말했다.

{아하핫. 원래는 말 되게 많아요. 메시지 보낼 땐 상황이 꽤 급박했었나 봐요.}

{폰 뺏기기 직전에 간신히 쓴 건가?}

{아마도요.}

그녀는 손을 들더니 악보 위를 툭툭 치며 피아노 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효율성 따지는 성격이면 기악 같은 거 못 해요. 5분 연주하려고 500시간을 연습해야 하는 분야인데요?}

{그, 그런가?}

압도적으로 비효율적인 시간의 규모에 놀랐는지 클레망이 더듬거렸다.

물론 꼭 그만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쉬운 프레이즈라면 훨씬 빠르게 완성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말 어려우면 500시간도 부족할 수도 있다.

새삼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난 살짝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엔 이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죠.}

세상엔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정말 많다. 그림이나 소설 영화 등 그 종류는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중 음악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동물들까지 활용하며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내면에 작용하는 이 위대한 힘을 조금이나마 다루려면 그에 걸맞은 노력이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음악의 신자인 내 의견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낮게 웃더니 클레망에게도 물어보았다.

{클레망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음악이 익히는 효율은 나쁘지만 제대로 구사하기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도 했다가 울리기도 하는 굉장히 강력하고 효율적인 무기가 된다는 거.}

{당연히 동의하지.}

클래식이라는 음악의 한 장르에만 국한될 것 없이 클레망은 자신이 평소 듣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가수가 얼마나 좋은 음악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큰 사랑을 받는가를 이야기하던 클레망은 가만히 듣는 우릴 보더니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 미안. 너희는 피아니스트인데 내가 다른 이야기를 했나?}

{아뇨,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간에 음악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오래된 클래식 음악과 최근의 음악은 아예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있지도 않았다.

17세기 이후의 음악들은 대체로 같은 시스템 위에 올라가 있다.

제일 큰 차이를 하나 짚자면 가사를 실을 수 있는 노래들이 호소력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조금 더 유리한 면이 있다는 점일까.

대신 가사 없는 순수한 음악은 언어로는 파고들 수 없는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기도 했다.

한동안 우리는 악보를 앞에 두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류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는 이미 경지에 올랐죠. 러시아에서 어떤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아요?}

{별명까지 있어?}

왜 갑자기 또 내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의 옆에 달라붙어선 그녀가 더 말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살 것 다 샀으면 이만 가자고 하자 아나스타샤는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날 가지고 노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

그렇게 다이어리도 샀고 악보도 샀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서 아직 1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아나스타샤는 우릴 돌아보았다.

{그럼 식사하러 갈까요?}

{그래. 뭐가 좋을까?}

{전 딱히 가리는 게 없어요. 타티아나는 너무 매운 음식만 아니면 괜찮고요.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망은 잠시 고민하더니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근처를 잘 알긴 하지만 그래도 되도록 좋은 곳에 데려다주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검색을 마친 그는 우리에게 화면을 보여 주며 확인까지 했다.

우린 입맛이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서 흔쾌히 클레망이 골라 준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서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한 레스토랑이었다. 겉보기에 꽤 좋아 보였다.

{예전에도 왔던 적이 있는데 깔끔하더라고. 가깝고, 가격도 합리적이고.}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머, 제가 사기로 해서 신경 써 주신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사도 되는데?}

{괜찮아요. 안내자로 끌고 다녔는데 밥까지 얻어먹으면 미안하잖아요.}

그 정도로 염치없진 않다는 듯한 어투에 클레망은 피식 웃었다.

같이 다니면서 이제 클레망은 우리 옆에 있는 것도 별로 어색해하지 않았다.

가벼운 농담 같은 건 얼마든지 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우린 레스토랑 안으로 올라가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웨이터가 바로 와선 주문을 받아 갔다.

주문도 클레망이 프랑스어로 대신해 주어서 우린 요리를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주문을 다 하고 기다리는 사이에도 우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생인 클레망과 우리 사이에 접점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방금 했던 콩쿠르나 음악 이야기도 클레망이 어제 세연의 무대를 본 덕분에 성립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지금 우리가 똑같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1학년 때 만난 클래스가 그대로 11학년까지 간다고?}

{예. 모두 전공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것도 대단하네.}

잘 상상이 안 간다는 듯 클레망은 신기해했다. 그리고 내가 중간에 편입해 왔다는 데엔 더더욱 놀라워했다.

그가 보기엔 내가 중앙음악학교에서 모든 걸 갈고 닦은 사람처럼 보이나 보다.

우리 역시 클레망의 대학교 생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자유로운 대학교의 학기제는 아나스타샤가 관심 있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얼마 전엔 우리 과에서 캠퍼스 커플이 생겼었는데 한 달 만에 헤어지고는 다음 학기 쉰다고 하더라고.}

{그냥 그런 이유로 휴학해도 돼요?}

{상관없지.}

대신 졸업이 늦어질 뿐이라며 킥킥 웃던 클레망은 반대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리고 보니…… 11년 동안 같은 사람만 보는 음악학교는 어때? 사이가 틀어지면 곤란할 것 같은데. 휴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자연스럽게 대화는 교내 연애로 흘러갔다. 뭔가 어색할 것 같았는데 막상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아나스타샤와 클레망이 무엇이든 말하기 편한 분위기를 조성한 덕분이었다.

되도록 같은 과에선 조심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럼 같은 과가 아니면 연애 대상으론 어떤 사람이 괜찮은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기악 전공자면 기악 실력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 얼굴이나 성격보다?}

{아하하하, 그것도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무리 잘생기고 예뻐도 음악가로서의 기량이 너무 떨어지면 기본적으로 연애 대상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런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한데.}

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아나스타샤와 둘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렇게 연애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드물었다.

내가 이야기를 피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도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심일까? 난 평소 봐 왔던 그녀를 떠올리며 지켜보았다.

하지만 마냥 방관자처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말없이 있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클레망이 대화의 틈에 나를 끼워 물어보았다.

{타티아나는?}

{예?}

{방금 했던 이야기에 덧붙일 의견 없어? 별 관심 없는 이야기면 말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배려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난 바보처럼 굳어 버렸다.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말들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꿰뚫어 볼 것이다.

{전……. 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 그래.}

난 그간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는 걸 지론으로 삼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도망 외엔 도저히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타티아나가 도망쳤다.

클레망은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감쌌다. 두 사람이 열일곱 살이라는 걸 순간 망각했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 둘 다 잘 어울려 주려고 한 덕분에 너무 편하게 느꼈던 것이 문제였다.

학생이라는 공통분모로 흥미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한 건 좋았는데, 갑자기 연애 이야기로 넘어간 건 허들에 그대로 들이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가 괜찮아 보이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결국 변명이지만 클레망은 아나스타샤에게 약간의 책임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가 이런 주제를 불편해하는 친구라는 걸 안다면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물을 마시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클레망의 시선을 느끼곤 쓱 돌아보더니 웃었다.

{클레망 씨.}

{응.}

{저 애를 좋아하게 된 거죠?}

갑작스럽게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클레망은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벌렸다.

방금 도망친 타티아나처럼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그냥 보내 준 것과 달리 자신을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