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5화
단지 안내역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문구점과 서점을 돌아다녔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클레망은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걷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기분을 느껴 본 건 처음이었다.
만약 클레망이 어설픈 담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 상황의 부담스러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난 안내역일 뿐이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이쪽을 보면서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하든 말든 어차피 클레망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 두 사람에게 할 행동을 바꿀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앞으로 일주일 정도 후면 둘 다 벨기에를 떠날 사람들이었다.
그럼 각자 학생으로 돌아가야겠지. 클레망이 바라는 건 단지 그녀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가끔 벨기에에 있는 친구를 기억해 주고 전화나 SNS로 교류하는 것 정도였다.
지금 바랄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래서 클레망은 괜히 선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하고 힘든 콩쿠르에 참가한 아이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점심 식사도 결론적으론 클레망이 살 생각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서인지 클레망은 약간 방심하고 있었다. 떳떳하게 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티아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던진 질문에 완전히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저 애를 좋아하게 된 거죠?}
시간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신경이 과열되는 기분이 든다.
2초 정도 지났을 때 클레망은 이미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피식 웃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상상도 못 한 타이밍에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그야말로 얼이 빠져 버렸다.
그냥 친구로만 지내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은 나무젓가락처럼 약한 합리성 위에 세워져 있던 것뿐이었다.
아나스타샤의 한마디로 그 지지대가 부러지고 나자 클레망은 더 거짓말을 하기 어려워졌다.
타티아나란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다. 어제 처음 봤으니까. 하지만 짧은 만남만으로도 클레망은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
밤에 친구의 무대를 지켜보다가 눈물을 흘리던 옆모습이 지금도 클레망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정확하게 그때를 기점으로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는 건 부정할 순 없었다.
다시 기억을 돌이켜 보던 클레망은 바로 앞에서 아나스타샤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약간?}
지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매한 답이었다. 적당히 시간을 벌고 수습해서 어떻게든 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와, 깜짝 놀랐어요.}
{뭐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악의 대답을 하실 줄은 몰라서요.}
그저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온 대답이라는 걸 단번에 꿰뚫어 본 말이었다.
클레망은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으려던 머리가 다시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나스타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만만치 않은 사람일 것이란 느낌을 받았었다.
차 안에서 마치 무언가 재단하듯 바라보던 시선을 클레망은 기억했다. 그 시선은 타티아나의 경호원이 그를 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아나스타샤는 클레망을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다.
날카롭던 첫인상을 잊어버릴 정도로 부드러운 태도였던 터라 클레망은 그녀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본모습을 슬쩍 드러낸 아나스타샤는 역시 대충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히 농담하듯 웃고 있긴 하지만 만약 클레망이 그녀를 무시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든다면 단박에 그물을 던지고 화로에 불을 올릴 것이다.
{아니…… 당황해서 그래, 당황해서.}
{아, 그래요.}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클레망은 더듬거리며 다시 대답을 골랐다.
당장 그렇다고 타티아나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순 없었다.
이미 간파당한 것 같지만 일단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곳까지 따라 나온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야 했다.
클레망은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조금 더 말이 되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타티아나와는 어제 처음 만났어. 그러니 좋고 싫고를 이야기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안 그래?}
{제가 성급했나요?}
이번 대답엔 아나스타샤도 별수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이 정도면 어지간해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클레망의 뒤편을 힐긋 보며 아직 타티아나가 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재차 물었다. 그녀는 사냥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첫인상만이라도 이야기해 보죠.}
아나스타샤가 그물을 던졌다.
이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제오늘 만난 사람들끼리 친해지기 위해 나누는 대화의 일환이라면 거기에 응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피하는 건 글렀다. 차선책은 타티아나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녀가 오면 아나스타샤도 그만둬 줄 것 같았다.
일단 첫인상 이야기만큼은 정면 돌파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클레망이 대답했다.
{좋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야. 자기 일을 대하는 자세나…….}
{얼굴도 예쁘죠.}
{친구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기도 하고…….}
{집도 부자고요.}
{……그건 솔직히 무서울 정도던데.}
아나스타샤의 추임새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며 말을 이어 나가던 클레망은 결국 못 견디고 대답했다.
굉장한 가문이라는 건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타티아나에게서 체감되는 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차리는 것을 돕고 과일을 깎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리 부자더라도 해외에 나오면 결국 평범하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벨기에 현지에 차량과 경호원을 대동할 순 없다.
아마 이것도 최소한일 것이다. 클레망은 그녀의 집안 수준에 대해 감히 상상하는 걸 포기했다.
아나스타샤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타티아나네 아저씨가 경호원인 빅토르를 항시 붙여 놓고 있긴 하지만, 정작 저 애의 씀씀이는 그리 크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지금 뭔가 계속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클레망은 콩쿠르 때문에 집에 묵는 여자애한테 하루만에 빠져 버린 멍청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클레망과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이 아니다. 그 점을 절대 착각하면 안 된다.
클레망은 무작정 받아치기만 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속내도 조금 떠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물었다.
{아무튼 친구로서 걱정하는 거야? 그런 거지?}
타티아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거기에 걱정할 필요 없다고 덧붙이려고 하는데, 아나스타샤는 이미 그런 말을 한 순간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 말했다.
{뭐……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운 거니까요. 컨트롤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
{단지 이 틈에 미리 하나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유한 태도라 클레망이 당황한 사이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저 애한테는 이미 애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있어요.}
클레망은 그 말에 납득이나 실망이 아니라 의문을 가졌다.
직접 물어볼 순 없었지만 직감하건대, 타티아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딱히 없을 것이란 건 거의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음악학교의 교내 연애 이야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자신에게 질문이 오자 도망쳤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로 연상되는 바가 없어서 클레망은 확인하듯 물었다.
{같은 과에…… ?}
{그렇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클레망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여전히 정보가 부족했다. 판단이 흐려진 클레망은 멍하니 물을 마시다가 문득 상상 너머로 생각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게 혹시 네 이야기는 아니지?}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게 굉장한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말을 다 뱉고 나서였다.
왜 그런 의문을 느꼈는지는 클레망도 제대로 이유를 자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난처럼 말했다기엔 무게감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어이없어하거나 화내지 않고 눈썹을 조금 까딱이며 클레망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클레망은 얼어붙은 채 실언에 대한 처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그를 심하게 책하지 않았다.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알았는데…….}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친구가 걱정되어서 괜히 더 건드리지 말라고 충고하는 애한테 이상한 소리나 하고. 클레망은 자신의 멍청한 머리를 책상에 박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이미 애인이 있다면 정말로 클레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스트 패밀리로서의 의무만 착실하게 해야 했다.
이미 한번 정리했던 생각이 보다 확고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못 미덥다는 듯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망은 마지막 기회임을 느끼며 말했다.
{아, 그렇게 보지 마. 직접 물어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불편할 만한 주제를 괜히 끄집어내서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어색해지는 건 나도 싫어.}
타티아나는 상냥하고 차분하지만 아무 말이나 다 받아 주는 건 아니다. 클레망이 선을 넘는다면 상당히 버거워할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콩쿠르도 준비하고 있는데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절대 귀찮게 하진 않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나야말로 너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같은 학교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괜히 은근히 떠보듯 이것저것 캐물었다가 타티아나를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했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클레망이 웃자 아나스타샤는 약간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깐 정말 당황하셨던 것뿐인가 봐요? 역시 대학생의 여유인가요? 다시 봤어요.}
{잃었던 점수 회복한 거야?}
{보너스 점수를 더 드리고 싶네요.}
아나스타샤도 놀랄 정도로 미인이었지만 그녀에게 점수를 아무리 따 봐야 그리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클레망은 그냥 좋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고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속내를 약간 드러낸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타티아나가 돌아왔다.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
{응, 괜찮아.}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살피는 것 같았지만 나름의 각오 같은 게 되었는지 먼저 물어보았다.
{무슨 이야기 중이셨나요?}
클레망은 아나스타샤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태연하게 답했다.
{아까 봤던 다이어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어…… 그게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봐요?}
뭔가 타티아나의 눈빛에서 황당해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클레망은 그저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