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6화
화장실 거울 앞에 선 나는 소리없이 절규했다.
‘그렇게 바보같이 빠져나왔어야 했어?’
내가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음악 정도로 한정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다른 주제더라도 아무 말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교를 위해 적당히 할 만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지금은 아나스타샤와 클레망이 이미 분위기를 다 띄워 놓은 상태이니 그 위에 가볍게 슬쩍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쉬운 일도 못 하고 도망쳤다. 뒤늦게 수치스러움이 몰려들었다.
‘왜 그랬지…….’
둘 다 내게 부담 같은 걸 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냥 요리가 나오기 전 잡담을 나누다 보니 아나스타샤는 대학교 생활에 관심이 있었고, 클레망은 한 교실이 쭉 같이 가는 음악학교 생활을 재미있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 연애 이야기까지 나온 거고.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들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나보다 훨씬 사교적인 아나스타샤는 그 흐름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딱히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난 그녀 앞에서 잘난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게 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거울을 보고 있자니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자괴감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나는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클레망과 가볍게 친해지는 과정이니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음악학교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니 첼로과에 남자 친구가 있는 라리사의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름은 공개하지 않고 그냥 친구의 이야기인 것으로.
대부분은 아나스타샤가 이야기할 테니 딱 그녀가 지키고 있는 선만 넘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나름의 각오를 다진 나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조금 전 나는 조금 이상했었다. 이젠 제정신을 차렸으니 무슨 이야기가 덤벼들든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이었다.
{아까 봤던 다이어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런데 자리를 비운 사이 이미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괜히 신경 써 주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했는데, 막상 둘 다 너무 태연하게 잡담을 다시 주고받기 시작해서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요리 나오는 게 늦네.}
{아마 조리가 오래 걸리는 메뉴가 있었을 거야. 우리 앞에 동시에 가져다주려고 기다리는 거 아닐까.}
{음…… 피자가 의심되는데요?}
{내가 시킨 게 범인인가?}
{웨이터 오면 물어볼래요? 어떤 메뉴가 가장 오래 걸렸는지.}
자리에 앉은 내가 분위기를 파악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아나스타샤와 클레망 사이에서 대화와 웃음이 오갔다.
뭔가 나 없는 사이 둘이서만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급속도로 친해진 느낌이었다.
설마 내 흉을 보거나 하진 않았으리라 믿지만,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러나 그걸 대놓고 물어볼 용기가 있었다면 자리를 뜨지도 않았겠지.
난 쓸데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 보는 척했다.
소외감까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런 내 우울함을 알아차렸는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타티아나.}
{아…… 전 괜찮아요.}
{나 사탕 있는데. 이거라도 먹을래?}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는 날 챙겨 주는 건 기뻤지만 그래도 사탕은 좀 아니다 싶다.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반대편에 있던 클레망이 킥킥대며 웃었다.
{난 하나 줘. 심심한데 먹고 있게.}
{여기요.}
{고마워.}
아나스타샤에게서 사탕을 받은 클레망을 보니 뭔가 이건 또 아닌데 싶었다. 아까부터 계속 뭔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멋대로 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면 종종 오기를 느끼기도 했다.
방금 했던 거절을 뒤집으며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주세요…….}
{어린애냐며?}
{이젠 상관없잖아요. 그냥 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챈 아나스타샤는 얼른 내 손에도 사탕을 쥐여 주었다.
무슨 사탕인지 받고 보니까 포장지에 제품명이 쓰여 있지 않아서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먼저 포장지를 깐 클레망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거…… 식전에 박하 사탕을 권할 줄은 몰랐네.}
{잠 깰 때 먹는 거예요.}
나도 포장을 까 보니 하얀 박하 사탕이 들어 있었다.
뭔가 달달한 것을 기대했던 난 황당하다는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장난스레 웃으며 자신의 사탕을 입속에 넣었다.
달라고 해 놓고 안 먹을 순 없었다. 나와 클레망도 박하 사탕을 입에 넣었다. 화한 맛이 강렬하게 퍼졌다.
정말 잠 깨는 용도로 먹던 것이라서 일반적인 박하 사탕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한동안 우리 사이엔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다들 입안의 사탕에 지배당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세상엔 참 기묘한 법칙이 존재한다. 얌전히 기다려야 할 때 그걸 못 참고 딴짓을 하는 사람에겐 천벌이 내리는 법칙이었다.
『□□□□ 메뉴 □□□□□.』
사탕이 전혀 녹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웨이터가 와선 접시들을 우리 앞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조금 급박해졌다. 입안에 있는 사탕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을 담은 눈빛이 오갔다.
그냥 냅킨에 뱉어도 아나스타샤가 기분 나빠 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클레망은 성의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빨리 깨물어 먹자.}
우리는 박하사탕을 으득거렸다. 접시를 놓던 웨이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설명할 틈도 없었다.
당황해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유지하며 웨이터가 우리 앞에 각자의 요리를 세팅해 준 뒤 물러났다.
그제야 우린 말을 할 수 있었다.
{입안이 소독된 기분이에요…….}
{입맛이 싹 돌지 않니?}
{진짜 기이한 취향이네. 타티아나, 네 친구 평소에도 저래?}
기가 막히다는 듯 클레망이 물었으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는 평소에도 종종 장난을 치곤 했지만 아직 어색해할 만한 관계에선 이미지 관리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계속 농담을 던지며 웃기만 했다. 클레망과 그녀 사이엔 어색한 기류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만난지 2시간도 안 된 사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다.
내가 자리를 뜬 사이 무언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난 마음속에 맴도는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눈치채곤 깜짝 놀랐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 난 두 사람이 잘 지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바라는대로 되고 나니까 불만을 가진다는 건 너무 얄팍하고 제멋대로였다.
클레망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아나스타샤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난 그 사실을 좋게 받아들이기로 하고는 포크를 들었다.
***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농담과 웃음이 오갔고, 거기에 나도 적당히 끼어 대화를 거들었다.
각자 주문한 요리도 모두 달랐기에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살짝 느꼈던 소외감 비슷한 감정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고 즐거운 기분만 남아 있었다.
요리들은 생각 이상으로 괜찮았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점심에 먹기 적당한 담백한 맛이었다.
계산은 전부 아나스타샤가 했다. 자기가 내겠다는 클레망을 무시하고 그녀는 꿋꿋하게 계산을 마쳤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서도 클레망은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네가 사 줄 줄은 몰랐어.}
{사겠다고 했잖아요.}
{얻어 먹자니 조금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더니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저희가 얻어 먹은 게 훨씬 많을 테니까.}
그녀가 말하는 저희엔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브뤼셀의 호스트 패밀리에 신세 지고 있는 피아노 연주자들의 입장이었다.
여기에 머물면서 우린 금전적인 보답을 전혀 하지 못한다. 중요한 콩쿠르에 참가한다는 이유로 그저 받기만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쯤 갚는 것도 괜찮았다.
아나스타샤는 시원하다는 듯 기지개를 쭉 켰다.
{더 놀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리프레시 정도로 만족하고 이만 돌아갈까요?}
이렇게 셋이서 노는 건 나름 즐거웠다.
클레망은 위트 있는 대화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대화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또 놀거리를 찾아다닌다면 정말 오후 시간이 전부 날아갈 것이 뻔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준비하고 있는 것에 보다 집중하여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클레망은 우리 피아노 연주자들의 입장을 잘 이해해 주었다. 그는 웃으며 아나스타샤의 의견에 동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건 이곳에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빅토르가 고생해 주었다.
그사이 식사는 했느냐고 물었더니 대충 먹었다고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았다.
빨리 돌아가서 그를 쉬게 해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중간에 내린 아나스타샤도 빅토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빅토르.}
{별말씀을. 들어가십시오, 아가씨.}
빅토르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아나스타샤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다가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도 돌렸다.
{이만 갈게. 안녕.}
{나중에 전화할게요, 아나스타샤.}
{오늘 재미있었어.}
나와 클레망도 인사했다. 오늘 모두 흡족한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우릴 내려 준 뒤 빅토르는 쉬러 갔고, 나와 클레망은 잠시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아직 귀가하지 않으셔서 둘뿐이었다.
{그럼…… 바로 연습하러 가려고?}
{잠깐 쉬었다가 하려고요.}
밖을 돌아다니며 쇼핑하고 식사한 것도 휴식에 속하긴 했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태로 무작정 피아노 앞에 앉는 것보다는 30분 정도라도 좋으니 조금 쉬면서 컨디션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물 한 잔만 마시고 들어가려고 부엌으로 향하려던 때에 클레망이 물었다.
{혹시 오늘도 관심 있는 콩쿠르 중계가 있어?}
{글쎄요…….}
콩쿠르 참가자는 24명으로 압축되었지만 그래도 난 그 모두를 알지 못했다.
오늘 무대에 오르는 사람 중 기억나는 건 이연주나 루이 디아라 정도였다.
둘 다 실력 좋은 연주자들이었으니 중간에 조금 틀어 볼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연주를 전부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세연이 파이널리스트가 된 지금, 내 목표는 그녀가 도달한 지점에 나도 도착하는 것 외엔 없었다.
{오늘은 연습에 집중하려고 해요. 중계는 혼자서 잠깐씩 보려고요.}
{아, 그래? 알았어. 그럼 편히 쉬어. 방해 안 할게.}
클레망은 쿨하게 이야기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내가 집중하는 사이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약간의 위화감도 있었다.
뭔가 날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았다.
‘같이 외출한 덕분인가.’
그래 봐야 두어 시간 정도였지만 그 정도면 친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난 며칠 안 남은 기간 동안 클레망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며 물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