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87화 (1,187/1,277)

##  1187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 셋째 날이 밝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시간은 계속하여 흐르고, 거대한 대회는 계속된다. 어젠 이연주와 루이 디아라가 좋은 평가를 받고 파이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렇게 될 것 같더라.’

저녁에 연습하다가 잠깐 두 사람의 중계를 확인했던 나는 5분 정도만 보려고 했다가 그대로 음악에 붙잡혀선 30분 이상 보고 말았다.

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만큼 두 사람은 정말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었다.

이연주는 여러 교수님을 사사하며 필요한 센스만 잘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연주자였다.

모든 음에 자신의 사인을 새겨 넣은 것처럼 그녀의 음악은 눈을 감고 들어도 그 주인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또렷했다.

특별히 심사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녀는 이미 한 음악가로서 자신만의 성취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루이 디아라는 프랑스에서 이미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음악가답게 큰 무대에서도 자신의 화려한 실력을 드러내는 데에 익숙했다.

난 프랑스에서 봤던 그를 기억한다.

루이는 높은 열정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였는데 그게 재작년 일이었다. 2년 사이 그는 더 굉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 다 이곳에 오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였고,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단히 붙잡았다.

난 뉴스를 보며 마음속으로 두 사람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제 3명…….’

파이널리스트는 총 12명을 뽑는다. 심사에 따라 변동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수에 맞춘다고 봐야 했다.

내 머릿속에선 남은 자리가 몇 자리인지도 자연스럽게 계산되었다.

물론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을 할 뿐이니까. 하지만 순서가 뒤로 가면 갈수록 계속 남은 자리를 의식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장한다고 해서 달리 좋아질 건 없었다. 이겨 내지 못한다면 떨어질 뿐이다.

자꾸만 앞서 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현실에 집중시키며 난 일찍 파이널리스트가 된 세 사람을 떠올렸다.

‘오늘 뮤직 샤펠에서 세연과 만나겠네.’

세연이 이연주를 보면 무척 반가워할 것 같았다. 난 이렇게 정보를 알 수 있지만 통신이 차단된 세연은 누가 오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도 꽤 잘 어울렸던 것 같으니 고립된 곳에서도 잘 지낼 것 같았다.

거기에 루이 디아라만 약간 붕 뜨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프랑스어밖에 하지 못하기도 하고. 하지만 성격 좋은 한국 연주자들이 그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았다.

아마 통역기를 써서라도 친하게 잘 지내겠지.

뮤직 샤펠에서의 상황을 상상하는 건 꽤 재미있었지만 지금 내 상황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난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미 내 곡들은 지금 당장 무대에 서도 아무 문제 없이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협주곡과 두 개의 독주곡 레퍼토리 모두 완성되어 있었지만 계속 확인하고 디테일 수준을 높히는 데엔 끝이 없었다.

빵으로 대충 아침 식사를 하고 내리 2시간을 연습에만 몰두했다. 몸이 살짝 지치기 시작한다는 걸 느낄 즈음 난 연습을 멈추고 침대맡에 앉았다.

“차라리 빨리 하고 싶어.”

빨리 결과를 받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조급해진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은 정해진 속도로 흘러 다가오겠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혼자서 방금 연습했던 음악을 정리하며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던 나는 지금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친구를 떠올리고는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혹시나 싶어서 보니 오전에 아나스타샤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었다. 난 웃으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습은 다 했니?

그 따뜻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나처럼 뒤쪽 순번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마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대부분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동지애를 느끼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혹시나 하는 투로 물었다.

-순서 언제라고 연락 오거나 한 건 없었니?

“예, 전혀.”

-언제 오려나? 기대되네. 그나저나 나 어제 연습 되게 괜찮았다? 새로 산 악보 봤는데 눈에 잘 들어오더라.

그녀는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을 짚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넘어갔다.

마치 우리가 지금 신경 써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음악뿐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아나스타샤의 악보를 기준으로 놓고 우린 다시 음악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난 그녀가 말하는 의견을 듣고 충실하게 응해 주었다.

일단 경쟁자인 상황이긴 하지만 지금 우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지이기도 했다.

이 교류가 무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우린 진지하게 음악가로서의 대화를 나누었다.

한 10분 정도 이야기했을까. 나도 아나스타샤도 서로 잘 해낼 것이란 믿음을 다시 확인하고는 웃을 수 있었다.

“악보도 잘 구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어제 나가길 잘했어.

다시 생각해도 즐거웠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 역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점심에 그녀와 잠깐 만나서 쇼핑하고 식사했던 건 한숨 돌리기에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물론 우리 둘만 있었던 건 아니고 클레망도 있었지만……  그가 있어서 더 좋았던 점도 많았던 것 같다.

가만 생각해 보던 난 아나스타샤에게 하지 않았던 말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지금 하기로 했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아나스타샤.”

-어? 무슨 말이니?

“그…… 제가 갑자기 클레망을 동행시켰는데 잘 받아 주셨잖아요. 덕분에 분위기도 좋았고요.”

내가 아나스타샤의 성격을 안 좋게 보고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난 그녀가 오해하지 않고 들어 주리라 믿었다.

어제 헤어질 때까지 웃으면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그렇게 감사를 전하자 아나스타샤는 크게 웃었다.

-아하하! 그 소리였어? 당연하지. 너랑 같이 있어야 할 사람인데.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못되게 굴면 그게 돌고 돌아 내게 피해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난 그녀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것이 조금 기뻤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사실 받아 준 건 그 사람이 다 받아 준 것 같긴 하지만.

“예?”

-그 사람 확실히 좋은 학교 다니는 것 같긴 하더라. 눈치가 빨라.

난 한 번 되물은 후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물을 수도 없었다.

분명 어제 점심의 상황을 받아 준 것은 아나스타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냥 립 서비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니 지금 단둘이 통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제도 느낀 것이었지만 아나스타샤의 태도는 클레망에게 묘하게 후했다. 정말 마음에 든 사람한테나 그런다는 걸 아는 나는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칭찬해 줬다고 전해 드릴까요……?”

-아니? 뭐 하러? 이런 건 그냥 우리끼리 알고 있는 거야.

“그런 건가요?”

-어라…… 뭐야? 아니면 내가 그 사람 험담이라도 하길 바랐니?

“아, 아뇨. 아니에요.”

내가 급히 부정하자 다시 아나스타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자주 대화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험담을 주제로 삼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으로 동질감을 구축하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레망을 억지로 희생양 삼을 순 없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나스타샤는 그 점을 높이 샀다. 나 역시 그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슬그머니 난 다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조금 더 이야기를 한 우리는 슬슬 주고받을 만한 것들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작정하고 잡담만 하자면 밤을 새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되도록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부류의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해야 할 때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연습하러 가야겠다. 너도 연습?

“예. 독주곡을 집중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미 완벽하지 않아? 또 가다듬니?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나요.”

내 음악은 완벽하지 않고 나 역시 완벽하지 않다. 부족한 점은 여전히 너무 많고 늘 신경을 집중하고 제대로 해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후회 없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 생각은 단순히 의욕이 조금 나는 문구 같은 것이 아니라 삶의 신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고 엉망진창인 일이 많았지만 난 스스로를 내팽개치지 않고 다시 집중했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기도 했다.

1시간 정도만 더 연습하고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껐다.

필요한 연습을 정확하게 해내고 나자 시간 역시 딱 바랐던 만큼 흘러 있었다.

슬슬 정말로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컨디션 관리 역시 연주자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피아노 건반 덮개를 닫고 일어났다.

오늘도 오전엔 아주머니가 없었다. 점심은 알아서 챙겨 먹어야 했다.

그런데 집에 남아 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오전 내내 연습한 거야? 계속 소리 들리더라.}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클레망이 내 발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오전은 이 정도로 하려고요.}

{상당히 오래 하던데. 같은 화음을 계속 치는 것도 연습이지?}

{맞아요.}

딱히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내 나름의 연습을 했더니 클레망은 그걸 꽤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 연습 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해 봐야 큰 의미는 없을 것 같고, 당장 필요한 건 따로 있었다.

{식사하셨나요?}

{아직.}

{그럼 같이 드실래요? 샌드위치를 만들어 볼까 해요.}

어젠 그가 점심 식사를 사 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망은 스마트폰을 소파 옆에 내려놓더니 웃었다.

{내 것도 만들어 주면 고맙지.}

내가 부엌으로 향하자 그도 따라와서 무언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었지만 딱히 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난 냉장고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냄비에 물을 받아 계란을 넣고는 타이머를 13분에 세팅했다. 그렇게 계란을 삶는 사이엔 토마토를 썰고 베이컨을 구웠다.

빵은 프라이팬에 굽는 데에 2분 정도 걸린다. 난 정확하게 같은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시간을 쟀다.

이렇게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은 오케스트라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만드는 데엔 15분 정도 걸렸다.

재료가 더 있으니까 다른 것도 조금 더 만들어 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제 보니 클레망도 점심을 많이 먹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맛있게 드세요.}

클레망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살짝 그의 표정을 살펴 보니 맛있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역시 요리한 걸 다른 사람이 먹어 주는 걸 보는 건 기분이 좋다.

{그럼 오후엔? 연습이야?}

{그렇죠.}

적당한 이야기에 적당히 답하면서 우린 느긋한 점심 식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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