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8화
각자 접시에 놓인 샌드위치는 두 개씩이었다.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니까 클레망이 먹는 양을 고려하여 좀 더 만들었는데, 막상 한 개를 먹고 나니 어느 정도 배가 불러서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클레망 역시 빠르게 먹진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먹으면서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정말 요리 잘한다, 타티아나.}
{재료가 좋은 덕분이죠. 단순한 샌드위치일 뿐인데요.}
{난 같은 재료로 해도 절대로 이런 맛 못 내.}
클레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물더니 바로 이거라며 탄성을 냈다.
난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워 취미로 삼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클레망은 다시 한번 놀라워했다.
그런데 그가 놀라는 포인트는 우리 집에 셰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칠 걸 염려하면서도 칼을 쓰는 것에 도전했다는 점이었다.
앞에 있는 날 있는 그대로 봐 준다는 것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클레망은 내 배경을 이유로 태도를 바꾸거나 하지 않았고, 은근히 재미있는 사람이라서 편안하게 대화하기에 좋았다.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클레망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 전문 분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어제 콩쿠르 중계 봤어.}
{아, 정말요?}
{응. 전부 집중해서 본 건 아니지만…… 다른 걸 하면서 옆에 틀어 놓고 그냥 듣기도 했지.}
그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불과 그저께만 하더라도 클레망은 스스로 클래식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평범하게 팝 음악 등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이 세연의 무대를 보고 난 뒤 그는 클래식에도 분명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자인 내가 옆에 있어서 일부러 맞춰 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즐거워하며 감탄하는 것이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어제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그대로 파이널에 갔더라고. 뭔가 내가 맞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가요? 재능이 있으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재능?}
{좋고 나쁨을 분간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재능에 속하죠.}
무언가를 좋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 속에서 특별함을 제대로 알아보고 가치를 판단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콩쿠르 세미파이널쯤 되면 이미 못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각자의 음악을 최고의 기술로 펼쳐 내는 가운데 크게 드러나는 건 음악성이나 개성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레퍼런스를 잘 모르는 클레망이 그것을 듣고는 기술에 현혹되지 않고 제대로 음악적인 부분을 짚어 냈다면…… 그건 꽤 재능이 있는 편에 속했다.
이런 사람은 듣는 귀를 성장시키는 건 물론이고 음악을 직접 배우더라도 빠르게 잘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재미있어하며 바라보자 클레망은 약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평가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괜찮아요. 콩쿠르를 제대로 즐기시는 것 같아 좋네요.}
다른 청중들도 모두 나름의 기준으로 참가자들을 평가하고 있다.
애초에 콩쿠르 자체가 평가를 받는 자리이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난 클레망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대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내 말에서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약간 더 적극적인 태도가 되었다.
{오늘 추천하는 연주자는 없어? 네 추천이면 조금 더 제대로 집중해서 들어 보려고.}
{음…….}
그 말에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어제도 그는 똑같이 물어봤었는데 난 이연주나 루이를 떠올리고도 그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혼자서도 이렇게 들어 볼 정도로 흥미를 느끼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클레망이 제대로 클래식 음악을 들어 보려고 하니 나도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연주자의 일은 그저 피아노를 치는 일에만 있지 않다.
콩쿠르 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세미파이널 라운드 정보 페이지에 들어갔다. 하룻밤 사이 갱신된 페이지엔 4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중국의 장 레이, 러시아의 세르게이 파바노비치 티토브, 일본의 야마네 슈이치.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였다.
솔직히 말해 이 중에서 잘 안다고 할 만한 연주자는 없었다. 페이지를 알려 주자 클레망도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러시아 둘, 중국 하나 일본 하나네.}
{그렇네요.}
{저 두 사람은 잘 몰라?}
같은 러시아 출신이니 접점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난 잠시 생각하고는 답했다.
{세르게이 파바노비치란 분은 정말 유명한데 직접 뵌 적은 없고…… 렌스키 로마노비치는 만난 적 있어요.}
{어때? 잘해?}
무어라 말해야 할지 어려웠다.
일단 세르게이의 경우는 차치하고, 렌스키와는 같이 무대에 설 기회도 있었는데 트러블이 생겨서 결국 엎어졌었으니까.
물론 렌스키도 실력은 좋을 것이다.
카즈호프 인터네셔널 같은 큰 기업의 후원을 받는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 실력과 명성은 어느 정도 보증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 주최했던 연주회에서 그가 의욕 없이 굴던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약간의 선입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쨌든 그가 자처한 이미지였다.
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그걸 적당히 희석하여 좋게 봐 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클레망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 주기로 했다.
{저와는 약간 악연이 있어서 제대로 평하긴 어렵지만…… 실력은 있어요. 저번 연주도 조금 들어 보니 괜찮았고요. 그러니 한번 들어 보세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악연?}
{예.}
{설마.}
험담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전부 사실뿐이다.
클레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네가 화를 내는 건 뭔가 상상이 안 가네.}
{저 화내면 무서워요.}
{그래?}
클레망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웃었다. 내가 진지하게 노려보자 그는 모른 척하며 샌드위치를 한 입 물었다.
식사 후엔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연습을 했다. 다른 신경 쓸 일들은 일단 파이널리스트가 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 일념으로 난 모든 집중력을 내 음악에만 쏟아부었다.
그런데 클레망에게 렌스키를 추천해 준 탓인지 시간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신경이 약간 그쪽으로 향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곡인지만 볼까.”
잠깐 휴식 겸 보는 건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난 콩쿠르 중계를 틀었다.
시간에 조금 늦어서 그런지 이미 렌스키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두운 정열이 휘몰아친다. 마치 검푸른 회오리를 보는 듯하다. 난 이 곡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슈만 판타지 op.17.
슈만이 작곡한 수많은 피아노 곡 중에서도 위대한 명곡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곡이다.
‘이런 연주를 할 줄 알면서…….’
세미파이널에 올라오기 전에도 어떤 연주를 했는지 봤지만 그때도 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면서 상황에 따라 대충 하자는 말을 한다는 것이 지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도저히 폄하할 수가 없었다. 음악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곡은 베토벤의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모금에 참가하기 위해 슈만이 작곡한 곡이다.
베토벤에 대한 짙은 존경과 추억을 담은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슈만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베토벤에 대한 연구도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음악사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 그리고 애정이 없다면 연주할 수 없는 곡인 것이다.
멍하니 듣는 사이 슈만 판타지의 2악장이 끝나고 3악장으로 접어들었다.
3악장의 부제는 별의 관. 상당히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부제에 걸맞게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음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을 구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연주자들도 무척 많다.
하지만 렌스키는 이 3악장도 굉장히 아름답게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여 연주해 냈다.
렌스키는 분명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음악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증명은 달리 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 음악이 증거였으니까.
‘그래…….’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연주회가 끝난 뒤 그는 잠시 모스크바를 떠나 있었다고 했다.
다른 연주회를 하지도 않고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처음 봤을 때의 그와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밤늦게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거기엔 렌스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
세미파이널 넷째 날. 뉴스에선 전날 있었던 이변으로 조금 소란스러웠다.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세르게이 파바노비치 티토브가 세미파이널에서 탈락한 것이다.
파이널리스트가 된 2명은 중국의 장 레이와 러시아의 렌스키였다.
여러 음악 평론가 등이 세르게이의 탈락을 놓고 그 이유를 분석하고 진지하게 다루었지만 난 사실 그렇게까지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우승 후보 같은 건 없다.
애초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30세 미만의 연주자들만 참가시키는 콩쿠르 같은 걸 열 이유도 없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혹독한 규칙 안에서 모두 최대한의 압박을 받으며 무대에 선다.
그 속에서 본 컨디션의 완전한 실력을 못 낸다면 결국 한 번쯤은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삐끗하여 미끄러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게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때문에 난 다른 연주자의 탈락을 보고 그것을 내 일처럼 여겼다.
물론 통과 역시 그만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어제 네가 말했던 렌스키가 정말로 파이널에 갔네. 잘하던데?}
{그렇죠.}
아침에 거실에서 만난 클레망이 꽤 본격적인 자세로 말을 걸어왔다. 중계를 집중해서 제대로 본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낸 만큼 제대로 응해 줄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렌스키가 연주했던 곡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해 줄까 싶어서 잠시 차라도 한 잔 마시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내 담당인 루트거였다.
잠시 클레망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아 들자 그가 경쾌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러네요, 칼스도르프 씨. 이제 때가 온 건가요?”
-예?
“내일 제 차례라서 그걸 알려 주려고 전화하신 것 아닌가요?”
이번 주에 그가 날 찾을 이유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루트거는 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독주 프로그램과 순서를 알려 드리는 건 무대에 서기 24시간 전입니다. 지금은 오전이지 않습니까.
“어…… 그런가요? 그럼 왜…….”
엄격한 콩쿠르의 규칙은 1시간도 유연하게 쓰이는 법이 없었다. 만약 내가 내일 3시에 무대에 서야 한다면 오늘 알려 주는 것 역시 3시였다.
생각이 어긋나서 내가 당황해하자 루트거는 그제야 용건을 전달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연주했었던 렌스키 로마노비치라는 분 있잖습니까? 그분이 오늘 뮤직 샤펠로 입궁하기 전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꼭 만나야겠다며 요청해 오셔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겁니다.
“……? 절 만나겠다고요?”
-예. 만약 승낙하신다면 가는 길에 카페 같은 곳에서 잠시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놀란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루트거가 이어 말했다.
-이런 일은 흔치 않은데 규정상 안 되는 건 아니라서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스마트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파이널리스트가 된 렌스키가 굳이 날 만나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다. 설마 놀리거나 도발하려고……? 그 정도로 미친 사람이라면 안 만나는 게 낫다.
하지만 전날 나는 그를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피했다가 만약 내가 떨어진다면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못 볼 확률이 높았다.
한참 고민하던 난 통화하는 채로는 생각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일단 전화를 끊고 3분 내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
{무슨 일이야? 타티아나.}
지금 의견을 구할 수 있는 건 클레망 아니면 아나스타샤뿐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라면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난 그나마 중립이라고 할 수 있는 클레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나와 렌스키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요약하여 이야기해 주자 클레망은 관계 없는 사람인데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하나로 답을 내었다.
{그럼 카페 같은 곳이 아니라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
{그, 그래도 되나요?}
{일단 여기가 네 홈그라운드니까. 그 사람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소리를 하면 내쫓아 버려도 되고.}
당연하다는 듯 홈그라운드라는 말을 하는 걸 들으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다시 루트거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