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9화
그냥 바로 집으로 와도 좋다고 하니 루트거는 약간 당황스러워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며 받아들였다.
지금 렌스키는 파이널리스트로서 벨기에의 모든 매스컴에 얼굴이 올라와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행적에 이목이 쏠릴 그와 외부의 공개된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프라이빗 룸이 구비된 장소도 있긴 하지만 그곳에 드나드는 것 자체도 볼 사람이 많다.
클레망이 그를 집으로 부르자고 한 건 나와 좋은 사이라고 하기 어려운 렌스키를 상대하기 편한 곳으로 끌어들이자는 단순한 아이디어였지만 막상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니 이보다 좋은 방법도 없었다.
주소가 밝혀진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어차피 렌스키는 몇 시간 후면 뮤직 샤펠에 감금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난 청소를 해 놓을게.}
{감사해요.}
클레망이 집을 청소하는 사이, 난 방으로 돌아가선 거울을 보며 지금 상태를 살폈다.
렌스키가 만나자고 한 것이 나쁜 의도일 것 같진 않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 의중을 확실히 아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미 파이널리스트인 그와 신경전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신경전의 기본은 외견이다.
편한 옷을 입고 있어도 딱히 흠잡힐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얕보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단정하게 준비를 하던 나는 아나스타샤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렌스키한테 무슨 연락 없었니? 잠깐 보자거나 하는.
역시 아나스타샤에게도 똑같은 요청이 갔었나 보다. 내가 수긍하자 그녀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난 거절했어. 하지만 넌 네가 바라는 대로 해, 타티아나.
렌스키를 만나면 안 될 이유 백만 가지를 늘어놓으며 날 설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아나스타샤는 쿨하게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너에게 전부 떠넘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친 않지만…… 넌 그 사람이랑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거잖아?
“예, 맞아요.”
-그 사람도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조금이나마 생긴 거라면 이번엔 말이 조금 통할 거야. 네 어른스러운 방식이 그 사람을 바꿀 수도 있겠지.
말다툼 정도나 했던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렌스키를 돌려놓기 위해 본격적으로 대결까지 나섰다가 무시당했었다. 아마 제일 많이 상처받은 건 그녀겠지.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원한을 덮어 놓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한을 앞세워서 날 조종하려 들진 않았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인 것처럼 약간 먼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어투로 말할 뿐이었다.
-그건 아마 좋은 일이 될지도 몰라…….
뛰어난 실력을 가진 렌스키라는 연주자가 조금 더 진지해진다면 음악계에 그리고 렌스키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인내와 이해를 해 줘 가면서 좋은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조금 알겠더라고. 너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걸.
예전부터 아나스타샤는 내 오지랖 넓은 성격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만큼 날 믿어 주는 것도 그녀였다.
조금 미안하고 창피해져서 어색한 웃음소리를 대답으로 보내자 그녀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따라 웃었다.
-이따가 전화 줘.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거울 속 나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혼자서 렌스키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태도를 취하며 내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아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다시 거실로 나오자 클레망도 막 청소를 마친 참이었다.
{악연이긴 한데 중요한 사람인가 봐?}
{글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수 있어?}
렌스키가 작년 메세나 연주회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난 클레망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괜한 고정 관념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할 장소까지 빌려주었는데 정작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면 정말 답답할 것이다.
클레망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던 난 간략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분을 말해 주었다.
작년에 메세나 협회에서 소속 연주자들을 모아 연주회를 하기로 했지만 렌스키는 내내 의욕 없이 굴었고, 결국 아나스타샤를 이용해선 연주회를 팽개치고 나가 버린 것까지.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있는 사실만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클레망은 어이없어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난 그저 그가 인과 관계를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 우리 입장에 동조해 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당사자인 내가 조용히 있자 클레망은 이내 화를 누그러뜨렸다. 일단 호스트로서 가만히 지켜봐 주는 역할에 충실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해야 할 설명을 마치고 우린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클레망은 더 캐묻지 않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고, 난 렌스키를 만나서 오갈 대화 등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온 것 같네요.}
그렇게 10분 정도 기다렸을 때였다. 집 앞 도로에 차량 한 대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나가 볼게요.}
사실 호스트인 클레망이 나가 보는 게 맞겠지만 지금 렌스키와 접점이 있는 건 나였으니 내가 나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차에서 내린 렌스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카페가 아니라 가정집 마당에 내렸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그의 이름을 부르자 렌스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가끔 보긴 했어도 이렇게 알은척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 상황이 어색한 듯 그가 말했다.
“카페 같은 곳에서 보게 될 줄 알았는데.”
“되도록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서도 렌스키는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카페 같은 중립적인 곳이 아니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이자는 클레망의 작전이 시작부터 잘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조용하긴 하네.”
짐짓 여유로운 척 렌스키는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주위를 보더니 귀 부근을 긁적였다.
나와 렌스키만 말하고 있긴 하지만 거실 쪽 벽엔 클레망이 서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옆엔 언제 왔는지 모를 빅토르가 있었다.
그리고 렌스키의 뒤엔 그를 따라온 콩쿠르 측 직원도 함께였다.
무척 신경 쓰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쪽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위기에 따라 렌스키는 식탁에 앉았다.
난 그에게 물었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 그냥 물이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신가요.”
딱히 차 대접을 제대로 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니라서 난 그가 말한 대로 물만 한 컵 따라서 가져다주었다.
“먼저…… 파이널리스트가 되신 것 축하드릴게요.”
“고마워.”
“중계는 슈만 판타지만 봤는데, 호평을 받아 마땅한 좋은 연주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연주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파이널리스트가 된 렌스키에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찬사였지만 내 말엔 살짝 뼈가 있었다.
그 정도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작년엔 그렇게 하지 못했냐는 의미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가 먼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나 역시 유연하게 그를 대할 방침을 정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까 뭔가 나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가 나와 버렸다.
렌스키는 식탁 위에 양손을 가만히 올려 둔 채로 날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한 곡이라도 들어 줘서 고마워.”
“…….”
혹시 내 심기를 못 읽은 건가 싶어서 다시 이야기하려는 찰나, 렌스키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사실 너한테만 연락한 건 아니야.”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투로 그는 자신의 결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담당자에게 부탁해서 너와 네 친구인 아나스타샤 둘 다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봤었어. 그런데 아나스타샤에겐 단칼에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렌스키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나스타샤가 내게 전화를 해서 무언가 언질을 주진 않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물론 렌스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난 굳이 먼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가 생각하기에 달렸다.
어쨌든 내가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으로 앉아 있음을 파악한 렌스키는 잠시 할 말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건 반쪽짜리 자기만족이란 것도 알아. 하지만…… 너라도 들어 주겠다고 해 줬으니까 마저 이야기를 해 볼게.”
렌스키는 진지하게 날 똑바로 바라보며 사과했다.
“작년 메세나 연주회에서 내가 프로 의식 없이 군 것과 너희들을 무시했던 쓰레기 짓들, 모두 사과할게.”
“…….”
약간 놀라웠다. 렌스키가 변명 같은 것 없이 이렇게 확고하게 사과할 줄은 미처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유명한 연주자로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훌륭한 연주로 파이널리스트에 꼽히기까지 했다.
연주자로서 자존심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러야 할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 최고의 순간에 그는 내 앞에서 자세를 낮추고 사과했다.
난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순간을 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의 진심이라는 걸 이렇게 표현해야만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 걸까? 하지만 살짝 삐딱하게 보면 실력으로 취한 입장을 앞세워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금 더 파악하기 위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중에 너희가 해낸 연주회를 보고 정말 후회 많이 했었어.”
정작 그에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계기는 작년에 있었던 것 같다.
연주회가 끝난 후에 메세나 협회의 매니저인 발레리 르포비치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약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사과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진심인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이런 사과를 받고도 냉랭하게 대하면 영영 척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난 내 성격을 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분명히 난 후회할 거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고 치고 마무리 짓기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난 지금 혼자가 아니다. 아나스타샤의 믿음까지 맡고 있으니 이야기를 마친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
그런데 보다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냥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였다고 말할 순 없었다.
만나지도 않겠다고 했던 그녀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난 조금 더 렌스키와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