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0화 (1,190/1,277)

##  1190화

렌스키와 만난 건 불과 1년 전이다. 20대인 그의 겉모습은 1년 정도의 시간으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체격이나 얼굴은 물론이고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나 태도에서는 1년 만의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보이고 있었다.

‘이전엔 조금 달랐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음악보다는 카즈호프 인터네셔널이라는 기업을 앞세워 자신을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음악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그게 제일 쉽고 알기 편한 소개란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그런 태도를 했단 건 그 자체로 우릴 같은 음악가로 취급하지 않겠단 의사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실력 행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고.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원한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원한을 알고도 렌스키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나를 마주 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와 음악가 대 음악가로서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어떤 후회를 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난 차분히 렌스키에게 물어보았다.

경계심과 기쁨이 혼재된 감정을 정돈한 결과였다. 너무 차가울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대했더니 그는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난 자선 연주회에 진지하게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최선을 다하려 하는 너희에게 불만이 있었어.”

“지금은요?”

“……이렇게 말하면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작년의 그가 보기에 우린 그저 애송이였던 모양이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납득하기 쉬웠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단 부분은 조금 더 듣고 싶어졌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때가 아니라 이제 와 사과를?”

“내가 정말 무엇 때문에 음악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기 위해서 한동안 모스크바를 떠나 있었거든. 한동안은 작은 도시들만 돌면서 자선 연주회를 했었어.”

난 그간 그가 무엇을 했었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자선 연주회들을 했었다면 그 기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행적들은 그대로 그의 진심을 반영할 터였다.

딱히 찾아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말을 조금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대가에 따른 서비스를 당연하다 여기던 그가 다른 답을 찾아다니다가 시간이 걸린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살짝 내 시선을 피하며 이어 말했다.

“연주회에 너희를 초대할까 하기도 했는데 그건 그것대로 너무 오해를 사게 될 것 같아서…….”

“파이널리스트란 결과를 얻은 지금은 저희가 무어라 한들 상관없어질 테니 적당한 타이밍이라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적어도 내가 존중도 실력도 없는 쓰레기는 아니라는 걸 음악으로 증명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거니 싶어서…….”

진지해져 달라는 우리의 부탁을 끝까지 무시했던 그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공개된 콩쿠르가 그나마 빠르게 우릴 만날 수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의문점이 없는 건 아니다. 콩쿠르라면 어차피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첫 라운드가 끝난 후에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는데 그는 우릴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다시 우릴 마주해야 할지 갈등하다가 뮤직 샤펠에 감금되기 직전에 일단 사과부터 하자고 결심을 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

내가 작정하고 삐딱하게 나가기로 생각했다면 이 자리에서 그에게 따져 물을 수도 있었다.

내가 파이널에 못 갈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냐고 한다면 그를 코너로 몰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몰아붙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고개를 숙인 렌스키는 이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 난 되도록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렌스키는 갑자기 불안해했다.

“잠깐만…… 이게 아닌데…….”

“뭐가요? 사과가?”

“그, 사과는 진심이고! 굳이 이런 때를 택한 이유에 다른 뜻은 없었어. 정말이야.”

당황해하는 그를 보니 조금 재미있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보다 훨씬 물러 터진 나는 지금 그를 마주하면서 이전의 인상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가 잘못했던 일은 사과한다 해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1년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사람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항상 내게 기적과도 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예술가라는 부류가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했고.

조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사과를 받아들이긴 어렵겠네요.”

“아.”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도 아니고 말이죠. 렌스키 로마노비치. 당신이 한 일 때문에 연주회가 취소될 뻔했어요. 제가 그때 급히 다른 연주자를 구하고 프로그램을 재조정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나요?”

“…….”

당시 나와 아나스타샤는 경력 없는 16살이었다. 협회 연주자 중 이름값이 높은 렌스키가 주역으로 이끌어야 하는 연주회였던 것이다.

렌스키가 빠진 자리를 그만큼 명성 있는 에르네스트로 채우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쉽지 않았을 거다.

냉정하게 그 사실을 다시 꼬집자 렌스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테이블을 내려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메세나 협회에 기부라도 할까?”

렌스키는 지금 장난하거나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필사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나온 말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렌스키 로마노비치.”

“……어?”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무엇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는지 돌이켜 보셨다고.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깨달으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어째서 기부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제야 난 처음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용서 같은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정말 잘못했다 생각하시고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이곳에서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돌아가서 메세나 연주회를 열어 주세요. 피아노 연주자 세 명이 하는 것이면 되겠네요.”

“뭐? 그 말은…….”

렌스키는 깜짝 놀라더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황망했다.

“나도 그런 생각은 했었어……. 하지만 염치없이 그런 제안을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제가 먼저 제안했으니 괜찮은 거죠?”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엔 정말 이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이 섞여 있었다. 내가 너무 무르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단지 딱딱한 정론을 들이밀었을 뿐이다.

그가 정말로 쇄신하고 앞으로도 거듭나고 싶다면 제대로 된 방법은 연주회로 갚는 것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장난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네 말대로 제대로 사죄할게.”

다행히 렌스키는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의 눈에 힘이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회를 줘서 고마워.”

난 먼저 다가가거나 용서한 적 없다. 기회를 만든 건 이곳까지 찾아온 그였고, 난 그저 그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알려 주었을 뿐.

물론 이후에 그의 연주회에 참석해 주어야 하겠지만……. 메세나 활동 중인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후원 연주자로서 내 활동이 근래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니 마침 잘된 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설득하지……?’

갑자기 렌스키를 껴서 자선 연주회를 하자고 하면 아나스타샤가 노발대발 화를 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또 사고 쳤다며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친구로서 옳았던 건지는 자신이 없다.

상의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대화 도중에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뒷수습에 대한 걱정에 머리가 조금 아파 왔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라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아나스타샤에게 잔뜩 혼날 상상만이 가득했다.

가만히 날 보던 렌스키는 시간을 보더니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럼…… 뮤직 샤펠에서 기다릴게. 너와 아나스타샤라면 반드시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진심이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어지럽던 머리를 렌스키가 조금 말끔하게 해 주었다.

자선 연주회는 나중의 일이다. 지금 나와 아나스타샤 앞에 닥친 일이 일단은 가장 중요했다.

여기서 결과를 내지 못한다 해서 연주회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나스타샤를 기분 좋게 설득하려면 파이널리스트가 되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보는 쪽이 유리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난 문득 이미 파이널리스트인 세연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아,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얼른 방으로 향한 나는 짐 속에서 다이어리들을 꺼냈다. 세연의 말을 듣고 사 놓은 것들이다.

잠시 다이어리를 내려다보며 난 고민했다.

혹시나 싶어 세 개나 샀으니 여유분은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을 보여 준 렌스키에게 약간의 상으로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무난한 갈색 다이어리를 하나 가지고 방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렌스키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뭐야 이게? 다이어리?”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요.”

“?”

렌스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더 캐묻지 않고 얌전히 다이어리를 받았다.

“고마워.”

짧게 인사를 남긴 그는 직원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고, 15분 정도 이어진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렌스키가 탄 차량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무의식중에 하고 있던 긴장이 약간 풀어진 것 같았다.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소파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데, 차 향기가 났다. 고개를 드니 클레망이 내 옆에 찻잔을 놓으며 물었다.

{방금 그 남자랑 정말 악연인 것 맞아……?}

{설명드리지 않았었나요?}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불필요한 험담같이 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 말해 주기만 했는데, 어쨌든 좋은 관계라 하긴 어려웠다.

클레망은 그래도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듯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도 그렇게 친절하게 해 주면…… 여러모로 착각하지 않겠어?}

{착각이요?}

{그, 저 사람이나 아니면 네 애인이라든가…….}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또 무슨 이야기인가 싶다.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클레망은 순간 실수했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은 내 궁금증을 더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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