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1화
타티아나와 렌스키가 식탁에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을 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세 남자가 있었다.
클레망과 빅토르 그리고 콩쿠르 측 직원은 가벼운 눈인사만 주고받고 서로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이 상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클레망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만약 렌스키의 어떤 말에 타티아나가 못 견뎌 하면서 그를 돌아본다면 지체 없이 끼어들 생각이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할진 타티아나의 요청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이 집이 랑스가의 것이란 점에서 클레망에겐 우선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은 것 같은데……?’
나름의 각오까지 하고 있던 클레망은 그렇게 긴장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연주회를 멋대로 내팽개칠 정도로 미치광이인 줄 알았던 렌스키는 생각했던 것보다 진지한 사람이었고, 성정이 부드러워서 이런 상황을 버거워할 줄 알았던 타티아나는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서로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오가는 말의 억양 등만 들어 보더라도 갑자기 싸우거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클레망은 조용히 무언가 이야기하는 타티아나를 지켜보았다.
‘영어를 할 때랑은 확실히 좀 다르네.’
타티아나는 영어를 할 때 조금 더 상냥한 어투를 쓰는 듯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어를 하는 타티아나에게서는 높은 격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드라마라도 감상하는 기분으로 클레망은 그녀의 억양과 태도를 기억에 담았다.
‘이야기는 잘 되었나?’
어느 순간부터 타티아나는 조금씩 웃기도 했고, 훨씬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렌스키와의 관계가 조금 좋아졌다는 것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지 느낌뿐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갑자기 방으로 향하더니 다이어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와 같이 쇼핑을 갔었던 클레망은 그 다이어리가 파이널리스트인 그녀의 친구가 준 힌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중요한 것을 렌스키에게도 공유해 준 것이다.
‘진심이야?’
클레망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타티아나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렌스키가 한 짓은 이렇게 잠깐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를 볼 생각 없다고 딱 잘라 버린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렌스키를 선심으로 대했다.
본래 악연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지금은 라이벌이기도 한 그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을 클레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오늘 만나 준 것도 그런데…….’
타티아나는 시간도 뺏기고 렌스키를 용서해 주고 다이어리까지 준 것 같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 상황 흐름은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착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클레망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타티아나가 뭘 어떻게 하든 그녀의 자유이니 클레망이 끼어들 권리는 없었다.
착한 그녀에게 왜 모질지 못하냐고 묻는 건 그것대로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아서 바라본다면…… 저런 애가 내 애인이라면 정말 걱정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 나머지 말실수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얼굴을 마주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실수로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면서 암묵적으로 두 사람은 그 부분을 건들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타티아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클레망은 거기에 적극 응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늘어놓아서 모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타티아나를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망은 적당히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이야기했다.
{지금 네 입장에서는 손해만 본 거잖아.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 다이어리까지 주고…… 안 그래?}
{아하하, 그렇긴 하죠.}
타티아나는 손해란 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밝게 웃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가치 판단에 대한 기준이 정확하게 서 있는 것이다.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타티아나는 설명했다.
{하지만 제가 손해 본 건 약간의 참을성과 15분 정도의 시간 그리고 3유로짜리 다이어리예요. 손해는 아주 사소한 데 비해 반대로 이득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한걸요? 안 할 이유가 없죠.}
{이득? 어떤 이득?}
{음악계 전체에 대한 이득이요.}
믿음이 서린 그 말에 클레망은 할 말을 잃었다.
열일곱 살 타티아나의 대답은 황당할 정도로 원대했다.
보통 사람들이 당장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득을 좇는 것에도 허덕일 때, 타티아나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렌스키라는 사람을 저울에 놓고 잴 때 단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만 따지고 있지 않았다.
그 관점과 기준은 마치 그 분야의 거물들이나 할 법한 것이었다.
클레망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런 걸 왜 네가 생각해?}
{음……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죠. 하지만 저같이 별난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타티아나는 그리 자신 있게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었지만, 클레망은 그녀의 말을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듣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과 의지가 갖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사람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 왔던 클레망은 타티아나를 보고 나서야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만난 지 며칠 안 되었어도 알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마음속으로 약간 감탄하면서 클레망은 피식 웃었다.
{별나긴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착각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요?}
{그…….}
그런데 이렇게 대충 수습하려던 이야기를 타티아나가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유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클레망은 결국 조금 더 제대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렇게 큰 바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모를 거라는 말이지.}
{아하, 제가 렌스키를 마음에 들어 해서 호의를 베푼 것처럼 보였나요?}
의외로 타티아나는 곧장 알아들었다. 그리고 별로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외의 반응에 클레망이 살짝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클레망도 착각하셨군요?}
{그……런 셈이지?}
{후후, 걱정 마세요. 그는 절 그렇게 우습게 보고 사과하러 온 것이 아니었어요. 만약 태도가 이상했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았을 거예요. 저도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답니다.}
타티아나는 당당하게 웃었지만 그래도 클레망은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더 강경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차치하고, 일단 보는 눈 운운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 보는 눈이 있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강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제가 여유를 가지고 그를 대할 수 있었던 건 제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장소도 빌려주시고 옆에 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클레망.}
{그 정도야 당연한 거지.}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나요.}
그녀는 선의로 사람을 대하고 솔직하게 감사를 표할 줄 안다.
겉으로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듯한 그 태도는 상대가 그 누구라도 덩달아 솔직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망은 멋쩍게 손을 저으며 느꼈다. 이런 사람이다 보니 누구라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여러 사람 고생시킬 것 같다는 불순한 생각을 하던 찰나, 마치 그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타티아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미덥지 않은 눈빛이시네요. 저에게 애인 관계인 사람이 있었다면 충분히 오해를 사고도 남았을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뭐, 뭐?}
{방금 그러셨잖아요. 제 애인도 착각할 거라고.}
클레망이 실수로 내뱉은 말들을 타티아나는 전부 똑바로 기억하고 있었다. 클레망은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타티아나는 한숨을 내쉬더니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짐짓 차분하게 보이려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번에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도망갔었던 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정신을 다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되레 깜짝 놀란 클레망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타티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정보들은 대부분 믿을 것이 못 되어요. 대부분 걸러 들어 주세요.}
{……?}
{인터넷에서 뭔가 보신 것 아니었나요?}
느긋하게 찻잔을 들고 이야기하던 타티아나가 의아해하며 클레망을 돌아보았다.
클레망은 그 말에 빠르게 동조했어야 했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상황을 눈치챈 타티아나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조금 더 진지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인지,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어요.}
조금 전 렌스키와 이야기할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가 펼쳐졌다.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도 타티아나에게서는 위엄이 느껴졌다.
애매한 변명 같은 것으로 벗어나려 해 봤자 그녀는 놓아주지 않고 캐물어 볼 것이 분명했다.
이미 아나스타샤에게 당해 봤던 클레망은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이어리를 사고 나서 점심 식사를 함께했을 때, 타티아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나스타샤에게 들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자 타티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저에게 애인이 있다고 말했다고요?}
{맞아.}
사실 큰 문제가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종의 이유로 타티아나는 연애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클레망이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나스타샤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을 때 가능한 상황이었다.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조금 전과 같은 강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