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2화 (1,192/1,277)

##  1192화

요 몇 년 사이 나는 여러 매스컴에서 화젯거리로 오르내리거나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 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조금씩 무뎌져 가고 있었다.

인터넷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학교만 하더라도 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전부 귀담아 듣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적당히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게 벌써 오래전 일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사소한 가십 같은 것은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일 친한 친구가 그 가십에 일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배신감보다는 궁금증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나스타샤가 날 괴롭히기 위해 그런 말을 아무에게나 하고 다녔을 것 같진 않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기에 그랬으리라.

기본 생각의 가닥을 그렇게 잡아 나가니 충격은 조금 가셨지만, 그래도 그녀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우린 연애에 관한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는 유예를 바랐고, 아나스타샤는 확신을 바랐으니. 그건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것에 가까웠다.

머릿속에서 끼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생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타티아나?}

클레망이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난 멍하니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단 바로 수긍한 다음 나중에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든지 했어야 했다.

클레망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사람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바람에 그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느 정도 알아차린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설픈 거짓말로 수습하려 해 봐야 나만 우스운 꼴이 될 뿐이다. 난 짧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 애인 없어요.}

{아…… 그래?}

내 말에도 클레망은 그리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내 개인사가 어떻든 별 상관 없다는 듯 건조하게 납득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배려였다. 내가 먼저 무어라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에 클레망은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뭔가 잘못 들었었나 보네. 하하.}

{의사소통 문제였나 봐요.}

{서로 모국어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영어를 무척 잘하는 클레망과 아나스타샤 사이에 하필 그런 오해가 생겼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클레망은 이 엉망진창인 말도 받아 주었다.

대충 이 정도에서 수습하고 덮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에겐 무척 고맙지만 그래도 어색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전 이만 들어갈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이 정도는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너도 수고했어. 일단 좀 쉬어.}

어색함이 흘러넘치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나는 고요 속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헀다.

‘일단 렌스키…….’

그의 일은 적당히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 일이 남긴 했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렌스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아나스타샤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냐는 것이었는데…… 그녀에게 렌스키에 대해 보고하는 동시에 나 역시 그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째서 클레망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걸까.

아나스타샤가 그냥 취미 삼아 아무한테나 내 가십을 뿌리고 다닐 리는 없고, 그나마 상식적인 건 클레망이 날 귀찮게 할 것 같아서 그녀가 미리 선수를 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할 당시 난 클레망과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시간인데 아나스타샤가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이상했다.

‘어쩌지.’

복잡한 머리로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습관처럼 건반 덮개를 열고는 건반을 눌렀다.

누르지 않는 건반에서 소리가 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정해진 음정 사이의 중간 음이 나는 일도 없다.

이산적인 악기인 피아노는 아주 명료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일을 해낸다.

검지 손가락에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반의 감촉과 진동은 인과 관계가 또렷해서 좋았다.

멍하니 건반을 누르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일단 전화를 하자.”

해야 할 일을 혼잣말로 내뱉고 나니 조금 더 의지가 생긴다.

렌스키와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마 아나스타샤도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를 해서 알려 주고 분위기를 봐서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너무 따지고 들 필요는 없었다. 내 궁금증은 사소한 일이고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 비해 콩쿠르는 이제 3일 남았고, 오늘 참가자들은 결정이 된 상황이니 우린 내일 아니면 모레 무대에 올라야 한다.

이 중요한 시기에 괜한 이야기를 앞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스마트폰을 든 나는 지체 없이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머뭇거리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까닥이며 허공의 건반을 누르며 기다리니 신호가 두 번쯤 갔을 때 아나스타샤가 전화를 받았다.

-벌써 렌스키와 이야기 끝났니? 아니면 하는 중?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가 날 힘들게 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난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요. 그는 방금 갔고요.”

렌스키와 나누었던 대화를 간략하게 아나스타샤에게 전해 주면서 동시에 그가 어떤 태도였는지도 말했다.

먼저 우리에게 연락하고 저자세로 사과까지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데엔 그녀 역시 동의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사과를 받고 끝낼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과로 끝낸 거야? 그렇게 마무리 지을 건은 아닌데.

“당연히 아니죠. 다른 조건을 더 붙였어요.”

-아하하, 역시 우리 타티아나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 그래, 어떤 조건인데?

“그가 내팽개친 연주회를 갚기 위해선 다시 연주회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딱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이미 내가 무엇을 했는지 다 알아 버렸다.

-너 설마…… 같이 자선 연주회 하자고 했니?

“예…….”

아무 상의 없이 이런 걸 멋대로 결정하면 절대 안 된다. 죄인 된 심정으로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그럴 줄 알았어.

“미안해요. 멋대로 결정해서.”

-아니야. 넌 합리적인 일을 한 거잖니?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이야기 자체를 거부한 자신이 감정적인 거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통해 다음 진전을 만든 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나야말로 상당히 감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난 진심인 사람에게 모질지 못하니까.

그러나 누가 감정적이든 합리적이든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밝게 웃는 목소리가 지금은 그 무엇보다 날 기쁘게 만들었다.

-난 네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잔뜩 혼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야기가 부드럽게 흘러가자 약간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빨라질 것 같다.

아나스타샤 역시 즐거워하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만약에 뮤직 샤펠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이랑 결국 이야기해 봐야겠네?

이번엔 만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내가 이 정도로 노력했다면 그걸 수용해 줄 생각 정도는 충분히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 앞으로 렌스키와 아나스타샤의 관계도 조금은 나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실 건가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의미심장하게 웃는 소리를 들으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악연이라 생각했던 사람과의 일도 잘 해결했고, 그 과정을 친구가 받아들여 주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고 연주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정말 사소하다면 지금 털어 버리고 가는 것도 가능해야만 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가볍게 이야기하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망은 어떻게 했었나요?”

-어?

“그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슬쩍 떠보듯 이야기하자 이번에도 아나스타샤는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하, 내가 네 애인 있다고 한 거?

실제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로 그 말을 듣자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냥 이야기해 둔 거야. 일단 그렇게 해 놓으면 너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쉽잖니?

아나스타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인이 있다고 말하는 건 다른 이성과의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데 쓰이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다.

적당히 편하고 효과적이라서 달리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했으면 말했지, 그걸 아나스타샤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장난처럼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하니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난 왜 이렇게 예민한 사람인 걸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아나스타샤가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네가 하는 것보다는 내가 말하는 게 더 신빙성 있게 들릴 것 같아서 그랬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언제나 아나스타샤는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무작정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가십 등에도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긴 했지만, 적어도 아나스타샤는 내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난 되도록 평이하게 말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제가 말했어야 했어요.”

-직접?

“그게 예의니까요.”

거짓말에 속을 사람에게 예의를 차린다는 것이 우스운 소리라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건 네 말이 맞네……. 나도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어. 클레망에게 그리고 너에게도 예의 없는 짓이었네. 미안해.

“……괜찮아요.”

-혹시 곤란해졌니?

클레망과 사이가 조금 어색해진 건 맞다. 하지만 잘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아뇨……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렌스키와 약속한 일도 합리적으로 잘했다고 생각하신다면…… 다음부턴 절 믿어 주세요. 아나스타샤가 앞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이 정도면 할 말은 제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서로 기분 상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가볍게 잘 이야기한 것이다.

이제 이 이야기는 앞으로 꺼내지 않고 덮어 버리면 된다.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얼른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였다. 아나스타샤가 마지막으로 뭔가 확인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아주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잖아?

“예?”

-너 정말로 에르네스트에게 관심 없니?

마치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열네 살이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때 우리는 평범하게 이런 이야기들도 종종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젠 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건 이상했다.

아나스타샤의 태도 변화를 지켜봐 왔던 나는 지금의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상황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 정도는 웃으며 받을 수 있었다.

“못 본 지 한 달도 넘어서 얼굴도 까먹었는데요?”

-아하하, 그러니?

“솔직히 이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

농담을 하던 나는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걸 느끼곤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그 애랑 이야기해 봐. 아마 넌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영영 못 보는 건 아니니까 언젠가 볼 수 있긴 하겠지. 아마 콩쿠르가 끝나면 모스크바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 서로 성과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성과가 안 좋더라도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을 텐데…… 아나스타샤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별로 상관 없다고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는 그냥 잊어도 돼.

“무슨……?”

-아무것도 아니야.

전화는 멀리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참 좋지만,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정말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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