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3화
아나스타샤와 나는 성격도 취향도 정말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잘 맞는 편이었다.
평소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단지 몇 마디만 나누었는데도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난 지금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겉으론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와중에도 혹시나 날 상처 입힐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적당히 끊었으면 됐잖아.’
조심스러운 건 비단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레망에게 거짓말한 것을 놓고 난 화를 내거나 왜 그랬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거짓말 같은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대신해 줄 필요는 없다고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딱 거기까지만 하고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렌스키에게도 너그럽게 굴었는데 아나스타샤에게 그리하지 못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마치 그간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길게 이야기하긴 어렵지…….’
내가 늘 그렇듯 아나스타샤 역시 모든 것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않았다.
때문에 적당히 말을 하다가 만 것이겠지만, 난 조금 더 생각이 많아졌다.
잊어 달라는 예전 말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유예를 길게 끌고 갔던 건 나 역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날 묶어 두었던 검은 새의 기억과 감각으로 보아도 명확한 결론을 떠올릴 순 없었다.
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대부분의 판단 기준을 세상의 상식에 두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걸 의식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미 난 상식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건 꽤 최근의 일이었다. 이런 면에서도 아나스타샤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팔을 다친 이후로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아나스타샤도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에르네스트가 완전히 나을 때까진 어쩔 수 없이 이런 고착 상황이 계속될 것이리라 생각했기에 일단 눈앞에 닥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우선하려 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와 따로 이야기를 했었던 걸까.’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에르네스트와 연락조차 안 되는 한 달 동안 난 정말 답답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묻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난 복잡한 머리에서 갑자기 이상한 말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집중하면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에르네스트에 관한 건 지금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네.
슬쩍 돌려 의문을 표해도 아나스타샤는 적당히 동조하기만 했다. 더 이상 무언가 말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뚜껑을 덮어 버리는 것 또한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조금 답답한 채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화상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야…….’
일단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알아본 다음에 그녀가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밖에 오가지 않는 전화로 언변이 좋은 아나스타샤를 상대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불쑥 그녀에게 제안했다.
“잠깐 만날래요? 아나스타샤.”
-지금?
“예. 곧 점심이기도 하니…….”
-우리 할 이야기는 대충 다 한 것 같은데.
갑자기 나온 말에 아나스타샤는 살짝 당황해했지만 금방 평온하게 되돌아왔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녀가 더 말하기 전에 억지라도 부리려는 찰나,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넌 오늘 이미 오전에 시간 많이 뺏겼잖아. 나도 오늘은 진득하게 연습 좀 하고 싶은데?
“어차피 식사하고 산책 정도는 하시잖아요.”
서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건 누가 져 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말로 아나스타샤를 이기는 건 어려웠다. 그녀는 다른 명분들도 끌어와선 가져다 붙였다.
-에이, 아까 렌스키 만날 때 내가 그쪽으로 갔었다면 모를까, 막상 너한테 전부 맡겼던 주제에 다 끝났다고 만나는 건 너무 염치없잖아.
“지금 전화도 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저희가 취해야 할 입장 중 하나를 보였을 뿐이에요. 덕분에 이야기가 잘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우리 둘 다 렌스키를 만나 주었다면 그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냉정한 입장을 유지했던 아나스타샤에게도 적합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이야기도 아나스타샤는 그냥 가볍게 흘려 넘기더니 내가 머뭇거리는 타이밍에 명확하게 다시 한번 거절했다.
-그래도 오늘은 미안해서 안 되겠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일단 오늘은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난 아쉬움에 그냥 물러서지 않고 말꼬리를 잡았다.
“미안하시다면 더더욱 만나서 점심 식사라도 사 주세요.”
-저번에 샀는데 또 사라고?
“아, 그게…….”
아나스타샤는 순식간에 내 말문을 틀어막아 버렸다.
뭔가 머릿속으론 반박이 떠오르긴 했지만 정작 말로 내뱉으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냐는 투정 같은 말만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 그렇게 말을 잘 못 하는 편은 아닌데, 아나스타샤와 본격적으로 말다툼이라도 한다면 난 3분도 안 되어서 질 자신이 있었다.
도저히 말로는 안 될 것 같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면서 침묵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멋대로 네 이야기를 해서 미안했어. 클레망에겐 나중에 내가 사과할게.
“알겠어요.”
-그럼 또 연락해.
가느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분명 모든 이야기가 잘되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에르네스트와 이야기해 보란 말이 왜 나왔는지도 불명이고 예전에 진지하게 했었던 이야기는 다 잊으라는 말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듯한 태도도 의문이다.
난 스마트폰을 든 채로 잠시 생각하다가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살짝 실망하며 화면을 보자 그간의 통화 목록이 나왔다.
꺼진 전화기에 열 번도 더 전화를 건 증거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난 습관적으로 건반을 눌렀다.
연습을 시작할 때 나는 방해받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 둔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켜 둔 채로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혹시라도 아나스타샤가 다시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도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
퀸 엘리자베스 사무국의 플로렌스는 여러 참가자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참가자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눈여겨보는 참가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였다.
그래서 아나스타샤의 순서가 바로 내일 3시로 정해졌다는 말이 나왔을 때 플로렌스는 약간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연락해 주고 싶어.’
세상은 스타를 필요로 한다. 어떤 분야든 간에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계에선 그것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 스타를 선출하는 관문인 콩쿠르의 관계자로서 플로렌스는 아나스타샤에게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참가자 중 최연소로 어린 피아니스트였지만 그녀가 보여 주는 퍼포먼스는 그 누구와 비견해도 압도적일 정도로 화려하고 뛰어났다.
플로렌스는 잘만 하면 아나스타샤야말로 다른 피아니스트들을 제치고 높은 순위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응원한다고 해서 규칙을 위반하며 편의를 봐줄 순 없었다. 플로렌스는 시간을 기다렸다.
1분 1초가 너무나 느리게 흘러간다는 기분을 느끼며 초조하게 사무실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정확하게 2시 정각이 되자마자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플로렌스.}
건너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본적으로 아나스타샤는 발랄하거나 따뜻한 성격이 아니었다. 안내에 협조적이긴 했지만 늘 쿨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플로렌스는 순간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아마 그녀가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즈마일로바 님. 바로 통화가 연결되어서 다행이네요. 가끔 참가자분들이 연습에 집중하시느라 전화 연결이 잘 안 되는 일도 있거든요.}
-{그럴 땐 어떻게 하는데요?}
{호스트 패밀리 보호자에게 연락하거나, 아니면 직접 찾아가야죠.}
심지어 집이 아니라 근처 연습실에서 스마트폰을 꺼 놓고 연습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땐 정말 온 동네 연습실을 다 뒤져봐야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어쩐지 전화가 올 것 같았어요. 스마트폰을 켜 놓고 있길 잘했네요.}
{정말인가요?}
-{그냥 느낌이죠.}
플로렌스는 아나스타샤를 담당하면서 그녀가 실력도 좋고 쿨한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거기에 머리도 명석하고 감도 굉장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플로렌스가 웃으며 물었다.
{준비하고 계셨다면 다행이에요.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알고 계시겠죠?}
-{플라지로 가면 되죠?}
{제가 모시러 갈까요?}
-{아뇨, 플라지로 갈 땐 반드시 불러 달라고 저희 집 아저씨가 신신당부하셔서. 아저씨에게 부탁할게요.}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조금 이따가 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플로렌스는 피아니스트의 상태에 민감하다. 전화로 느낀 아나스타샤는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꽤 신경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세미파이널 무대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열심히 해야지.}
담당 피아니스트가 긴장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플로렌스가 맡은 일이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에게 안내해야 할 목록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는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