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4화
난 오후 내내 방에서 피아노 연습에만 몰두했다. 그 누구도 날 방해하지 않았다.
2시와 4시엔 혹시 루트거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싶어 살짝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는 물론이고 아무도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연습하다가 조금 지치면 콩쿠르 중계를 틀어서 보기도 했다.
‘살짝 볼까.’
음악의 강력함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작용하기에 연습할 때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듣는 건 조심해야 한다.
내가 할 음악의 구조와 뉘앙스에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소리에 영향을 받아 흔들려 버리기도 하니까.
그러나 난 지금 다른 무엇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머리 아픈 일들을 모조리 건반 아래로 밀어 넣고 온전한 내 음악만 끌어 올려 앞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완전하게 이루어 놓은 이 음악들은 내 대답이자 증명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매우 견고하게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만약 지금부터 하루 종일 자다가 무대에 오르기 5분 전에 일어나더라도 난 지금까지 준비한 것들을 확실하게 선보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연주 중계를 보는 건 잠시 신선한 바람을 쐬는 일과 별다를 바 없었다.
‘괜찮네…….’
지금 무대에 오른 연주자의 음악은 호쾌하고 시원시원한 맛이 있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실력이었다.
단 30초 정도만 들었는데도 난 그가 꽤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연주를 들으면서 난 다시 콩쿠르 참가자들의 리스트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준결승은 하루에 4명이 연주하고 2명이 통과하는 기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4일째의 결과가 나오지 않은 지금, 총 6명이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되어 있는 것이다.
12명까지 뽑게 되어 있으니 이미 절반이 선출되었다. 한정된 자리가 줄어드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연습이나 할까.’
기분 전환도 마쳤으니 슬슬 다시 내 음악을 되새기며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내 잠잠하던 스마트폰이 메시지 알림을 띄웠다.
[나 리허설 갔다 왔어.]
아나스타샤의 메시지였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에 전화하고 나서 계속 아무런 연락도 없길래 그녀도 나처럼 연습에 집중하고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콩쿠르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모양이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난 그녀에게 물었다.
“플라지에 갔다 오신 건가요?”
-응. 방금 들어왔어.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엔 약간의 피로가 묻어났다.
준결승 무대를 안내받고 리허설을 하는 동안 긴장하고 집중한 나머지 상당히 지친 느낌이었다.
괜히 전화한 건가 싶어서 멈칫하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활기차게 말했다.
-아까 정확히 2시에 전화 오더라고. 내일 3시로 결정되었다고. 이야, 진짜 대단한 콩쿠르라니까?
“정확하게 24시간을 주는 거네요.”
-그러게. 근데 지금 5시 넘었으니까…… 사실상 22시간이지? 온전한 준비 시간은 아니잖아? 자는 시간도 있고.
“자는 것도 준비니까요.”
아무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참가자들을 몰아붙이고 공정성을 위해 시간제한을 빡빡하게 둔다지만 자는 시간까지 확인하고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결정한 것이 바로 24시간이리라.
아무튼 본격적으로 연주자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독주 프로그램은 원하는 것으로 받으셨나요?”
-응. 운이 좋았어.
“다행이네요.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실 수 있을 것 같다면…… 역시 알캉인가요?”
-맞아.
테크닉이 무척 뛰어난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난곡으로 악명이 높은 알캉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얻어 낸 몇 곡은 정말 테크닉에 한해서만큼은 충격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파이널리스트로 가는 중요한 무대에서 그녀의 최고 장기를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십년감수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번에도 쳤으니까 이번엔 심사 위원들이 안 받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한 번 더 듣고 싶었나 보네요.”
참가자가 지닌 음악적 스펙트럼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어 하는 이 콩쿠르 특성상 이미 한 번 본 것을 두 번 볼 필요가 없긴 했다.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캉으로 확인했다면 다음은 드라마틱함이라든지 섬세한 부분을 알아보는 것이 이곳의 일반적인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콩쿠르 측에선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에게 알캉을 요구했다.
좀처럼 듣기 힘든 귀한 음악이니 이참에 제대로 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과 국제 콩쿠르 준결승이라는 중요한 자리에서 알캉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한번 보여 보란 뜻이 느껴졌다.
아마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주목받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모르진 않겠지. 난 웃으며 그녀를 치켜세웠다.
“그만큼 기대하고 있다는 거겠죠.”
아나스타샤도 일단 독주곡 프로그램이 마음에 드는지 꽤 결심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바라던 것을 받았으니까 기대를 받는 만큼 잘해 봐야지.
물론 독주곡만 잘 연주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골치 아파하는 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협주곡 부분인 듯했다.
-그나저나 1시간 리허설 생각보다 어렵더라. 두 번 맞춰 볼 시간이 절대로 안 나와.
약간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협주곡에 아직 미숙한 건 나나 세연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열일곱 살인 우리에겐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가요. 세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죠.”
-이야기 들었었구나?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내가 조심스레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정리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건 세연이 말해 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거기다가 어떻게 이 1시간 리허설이라는 상황을 효율적이고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지 조언해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뭘 원하는지 생각하고 준비해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렇네요. 음…….”
짧은 시간에 오케스트라에게 내가 원하는 음악을 설명하려면 두루뭉술한 말로는 한계가 여실하다.
그러니 확실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대부분 콩쿠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아닌 다른 이야기는 할 틈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는 게 맞으니까…….’
솔직히 난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무대에 오르기까지 22시간도 안 남은 그녀에게 음악과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다시 머릿속을 정돈하고 난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 연주자로서 기대와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럼 내일 3시…… 긴장되시나요?”
-약간.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뽑힌 6명을 체크해 봤는데…… 솔직히 누가 떨어지고 통과하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본래 콩쿠르라는 것이 다 그런 법이지만 이 콩쿠르는 그게 조금 더 심해.
역시 그녀도 콩쿠르의 진행을 계속 지켜보면서 일단 12명 안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스튜디오4에선 다른 참가자가 연주 중이거든? 가만 들어 보면 정말 잘하는데, 이 사람도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내일 3시에 난 어떨지…….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런 긴장감은 계속 생각할수록 점점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도움을 주기 직전,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그 긴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겠지? 미련 없도록.
우린 어리고 미숙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선생님들에게 엄격한 레슨과 훈련을 받고, 혼자 방에서 연주 시간의 몇백 배에 이르는 시간을 투자했으며, 여러 무대에서 경쟁도 해 봤다.
“후후,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얼른 밥부터 먹고 다시 연습 시작해야겠어.
시원스러운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난 아나스타샤의 무대를 상상하다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녀라면 반드시 그 이상을 보여 줄 것이라 믿으며 웃었다.
***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준결승 5일 차.
‘내 차례는 내일이구나…….’
분명 오늘 내로 루트거에게서 전화가 올 테고, 난 플라지로 가서 준결승 연주자 등록과 함께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해야 할 것이다.
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벽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난 그것을 넘어서야만 했다.
‘3시만 아니길.’
그런데 지금 당장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내일의 내 무대가 아니라 오늘 아나스타샤의 무대였다.
그녀의 연주는 오후 3시부터였다. 난 그녀의 무대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제발 그 전에 루트거가 날 부르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다행히 그 기도가 닿은 것인지 2시가 넘어도 날 부르는 전화는 없었다.
약간 안심한 나는 중계를 기다리며 물이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
그런데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클레망이 날 돌아보았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사실 나는 그가 아직 살짝 어색했다.
아나스타샤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후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아서 아직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상적인 이야기까지 피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라서 난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물 마시려고요.}
{그래?}
{클레망도 무언가 드시겠어요?}
{그럼 같이 차 마실래?}
지금 내가 쭈뼛거리고 있다는 걸 클레망도 느낀 듯했다.
이렇게 먼저 제안해 준 것이 반가웠다. 난 부엌에서 차를 두 잔 끓여 거실로 가지고 갔다.
그때까지 별말 없던 클레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오늘 3시더라.}
{예?}
{아나스타샤의 무대 말이야.}
일부러 가만히 있었는데. 클레망 쪽에서 먼저 일정을 확인하고 이야기할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클레망은 설마 몰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거실에서 안 볼 거야?}
{그게…… 그래도 되나요?}
스마트폰으로 작게 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크게 보면 나도 좋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거실로 나와 자리를 차지하기엔 약간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내가 요청한다면 클레망은 두말없이 그렇게 하게 해 주겠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다면 안 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클레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어? 설마 내가 아나스타샤한테 화나 있다고 생각해?}
{그게…….}
{괜찮아. 아나스타샤는 어제 나한테 사과했었어.}
{그, 그랬나요?}
{응. SNS로 메시지 보냈더라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
그사이 아나스타샤가 나름대로 날 위해서 상황을 잘 수습해 주었나 보다.
그녀가 사과까지 한 줄 몰랐던 난 당황했지만, 어쨌든 클레망이 그 사과를 받아들여 주었다면 이제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난 한시름 놓으며 조금 더 편안하게 소파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