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5화
클레망과 차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보긴 했지만 프랑스어 방송들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은 클레망과 대화하는 데에 쓰였다.
그는 실수로라도 내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 위해 주의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젠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그 정도는 받아 줄 여유가 있었는데, 저번에 식사 중에 도망가고 아나스타샤가 거짓말까지 한 판국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리수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남은 건 콩쿠르 이야기뿐이었다.
{오늘 리허설하라고 연락 오겠네?}
{예. 그런데 2시엔 오지 않았으니 다음은 아마 4시예요.}
{그것도 아니면 음…… 7시나 9시인가?}
{맞아요. 그중엔 반드시 오겠죠.}
다행인 것은 클레망이 내 일정에도 꽤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클레망은 중계를 몇 번 보더니 클래식도 들을 만하다고 느낀 듯했다.
그 후로는 내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중계 추천을 받거나 날 돕기 위해서 솔선하여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 클레망의 행동은 무척 고맙고 기쁘다.
난 그를 이쪽으로 조금이나마 끌어들인 책임을 지기 위해 그의 궁금증에 최대한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3시에 가까워졌고, 텔레비전에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오프닝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잘하기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미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끄고 대기실에서 준비 중이다.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 기도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난 화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메라는 무대를 비췄고, 거기엔 이미 오케스트라를 위한 의자와 보면대 등이 모두 세팅되어 있었다.
사회자가 여러 언어로 콩쿠르의 시작을 알리고 나자 옆에서 차례대로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들어왔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음악가들이 조용히 자기 악기를 조정하며 준비하는 모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이 무대에 오르면서 생겼던 소음들이 조금 가라앉을 즈음, 그다음으로 지휘자인 가스파르와 피아노 연주자인 아나스타샤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엄청난 박수 소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묶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무대 위로 올라온 아나스타샤는 정말 아름다웠다.
첫 무대에서 입었던 베이지색 드레스도 예뻤지만 지금 입은 붉은 드레스는 이목을 확 끄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 드레스를 오더할 때 아델리나는 콩쿠르의 진행과 각 무대의 중요도 등을 상세하게 물어본 바 있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의상을 어떻게 순서대로 갖추어야 최고로 돋보일 수 있을지 기획한 것이다.
아델리나와 아나스타샤의 감각은 매우 정확했다.
준결승 5일 차 오전 세션 첫 무대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나스타샤에게선 이번 무대에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오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클레망이 물었다.
{아나스타샤 말이야, 키가 크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더 커 보이네.}
{173cm라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아나스타샤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큰 키였는데, 비율도 좋은 데다가 지금은 하이힐에 드레스라 그런지 가스파르와 비교해도 그리 작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무대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시선을 맞추고 있는 나와 달리 클레망의 시선은 내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해서 난 그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절 보시죠?}
{아니, 뭐…….}
클레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우물쭈물했지만 어떻게 봐도 내 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163cm까지 자랐던 내 키는 더 자라는 일 없이 멈췄다.
솔직히 아나스타샤만큼 크진 않아도 평균을 넘을 정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평균 이하에서 멈춰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평균과 2cm 차이밖에 안 난다. 거의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응원이나 하자. 아, 인사한다.}
혹시라도 한마디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클레망이 얼른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고 화면에 집중했다.
가스파르와 짧게 악수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청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굉장한 환호가 쏟아졌다.
그녀가 앞서 보여 주었던 무대에 대한 강렬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청중들이 많은 듯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로 향했다.
정제된 고요 속에서 평화로운 음악이 서서히 스며들듯 시작되었다.
‘따뜻한 소리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7번. K.595
모차르트가 사망한 해인 1791년 발표된 곡으로, 생전 모차르트가 연주회에서 연주한 마지막 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칭송받으며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그것을 잘 관리하는 데에 실패하여 30세 즈음엔 금전적인 문제에 허덕이던 모차르트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음악가로서 연주회를 성공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피아노 협주곡 26번의 발표가 실패하고, 그 후 더더욱 모차르트는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이 암울한 시기에 마지막으로 작곡한 것이 바로 이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곡이야.’
실패를 딛고 3년 만에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내기 위해 쓴 곡이라는 배경 설명만 듣고 떠올릴 수 있는 건 영웅적인 테마를 주제로 한 강렬하고 화려한 음악일 것이다.
특히 모차르트는 청중들을 어떻게 열광시켜야 하는지 잘 아는 음악가였고, 자신의 천재성을 휘두르는 데에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활을 걸고 성공시켜야만 했던 협주곡에서 모차르트는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빼 버렸다.
많은 목관, 금관 악기 중에서도 화려한 사운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두 악기가 없으니 자연스레 음악은 소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들려오는 것은 그저 상냥하고 부드러운 봄의 노래일 뿐이었다.
어떤 이유로 모차르트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깊은 깨달음의 결과라는 해석도 있고, 실패에 의한 자포자기가 드러난 것이란 말도 있었다.
이 협주곡을 발표한 해에 모차르트는 돌연 사망해 버렸고, 결국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으로 남아 수많은 사람의 자유로운 해석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이 27번 곡에 담긴 모차르트의 진의에 대해 파고들진 못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이 곡을 택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다음 무대를 위한 기반을 다지려는 느낌이야.’
한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마친다면 상관없겠지만 준결승 무대에 선 피아노 연주자는 제대로 완성된 한 프로그램을 연주해야만 했다.
당연히 많은 곡이 하나로 연결되면 그중엔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곡이 있고,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지금 중요한 곡은 바로 알캉의 곡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조용하고 섬세한 면모를 드러내며 서서히 청중들을 물들이다가 본연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독주곡들을 차례로 올려 완전히 휘어잡으려는 작전으로 보였다.
애초에 아나스타샤쯤 되는 비르투오조가 화려한 카덴챠의 20번이나 웅장한 24번이 아니라 소박한 27번 협주곡을 택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너무 명확한 이유가 느껴져서 되레 난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3분 남짓 되는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마무리되고, 아나스타샤의 피아노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힘을 들여 연주할 곳도 아니었기에 그녀의 연주는 아주 감미로웠다.
오케스트라가 깔아 놓은 폭신한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편승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쭉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3악장에선 살짝 본모습이 나오겠지.’
그 정도면 적당하다. 너무 튀어나오지 않고 청중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정도.
옆을 돌아보니 클레망도 눈을 못 뗄 정도로 집중해서 보기보다는 그냥 편안하게 힐링하듯 듣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제시한 이 흐름에 순응하는가 싶던 아나스타샤에게서 몇 번의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
클레망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음악에 예민한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 더 앞장서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려 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주 조금이었다. 때문에 큰 차이 없이 음악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자연 풍경을 그리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이따금 표현하는 감정의 격류는 그 음악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었다.
‘이럴 거면 굳이 27번을 할 이유가 없는데.’
좋게 말하자면 굉장히 세련된 표현 방식이었다.
현대 피아니즘의 정수를 담은 아나스타샤의 터치는 화려한 음색을 자아냈다. 소리가 반짝거린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200년도 넘은 고전 피아노 협주곡 중 그런 음색을 받아 줄 수 있는 곡은 한정되어 있었다.
특히 이 27번 협주곡은 수수한 뉘앙스가 중요한 곡이기 때문에 피아노가 조금만 튀어도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기 일쑤였다.
협주곡으로도 튀어 보려 했다면 차라리 다른 걸 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도전적으로 이 곡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한계를 뚫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기엔 정돈되지 않은 들쑥날쑥한 느낌이 있었다.
수많은 참가자와 음악을 맞춰 온 오케스트라는 그런 아나스타샤의 주문에 응했다.
정말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놓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멋진 발맞춤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렇게 오케스트라가 아나스타샤에게 맞춰 주자 그녀는 더더욱 본래 나아가려던 방향을 잃어버린 듯했다.
차라리 뻔뻔하게 실수는 실수로 넘기고 되돌아왔어야 했는데, 무리해서 수습하려다가 그것을 도우려 하는 오케스트라와 뒤섞여 버린 상황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지금 곡의 완성도는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아마 심사 위원들은 훨씬 날카롭게 듣고 있을 것이다.
‘제발.’
무대에 서는 것은 곧 외줄을 타는 묘기와 같다.
균형을 조금 잃는 것도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지고, 떨어지면 그대로 끝장인 것이다.
그러나 진짜 프로들은 떨어질 때도 줄을 붙잡을 줄 안다. 그리고 어떻게든 무대를 성공시킨다.
‘할 수 있어.’
지금 무대에 있는 음악가들은 전부 프로였다. 순간의 기지가 몇 번이나 발휘되고 서로를 지지하며 다시 동요를 가라앉혔다.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들과 연주하는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곡의 초반이니 조금 점수를 깎아 먹었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 난 숨을 죽이고 무대를 지켜보았다.
내 두 손은 어느새인가 모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