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6화 (1,196/1,277)

##  1196화

가스파르는 아나스타샤를 신뢰했다.

1라운드에서 그녀가 보여 주었던 퍼포먼스가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까, 그래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정도는 가뿐하게 쳐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 1시간 리허설 자리에서 아나스타샤는 어째서인지 불안한 연주를 했었고 협응력도 상당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불려 나와 긴장했기 때문에 그럴 순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었다.

훨씬 경험 많은 피아니스트들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으니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전에 보여 주었던 실력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가스파르로선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콩쿠르 일정의 압박에 결국 흔들려 버린 피아니스트를 보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없었다.

때문에 가스파르는 되도록 그녀를 안정시키는 데에 주력했고, 무엇이든 좋으니 준비해 온 모차르트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 연주하기만 하면 그 뒤를 알아서 받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7번은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 아니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젠장, 아직 안 됐나.’

지휘봉을 휘둘러 바이올린의 사운드를 억제하면서 가스파르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무대라는 곳에서 음악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무난한 대답은 바로 좋은 음악을 청중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것이 무탈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 단위로 연주를 하다 보면 정말 상상도 못 한 문제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오랜 시간을 무대 위에서 살아온 가스파르는 정말로 무대에서 중요한 건 다름 아닌 대범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실수를 하더라도 청중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절대 얼굴에 드러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나의 퍼포먼스였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스타샤는 완성된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음악에서는 그녀의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들끓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표정이나 태도에선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 무대에 능한 아나스타샤가 가뿐하게 연주해야 할 이 피아노 협주곡에 애를 먹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게 된다.

‘난감하군.’

어느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제 리허설 때 아나스타샤에게 그냥 조언만 하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왜 제대로 사운드 컨트롤이 안 되는지에 대해 물어봤어야 했다.

가스파르마저 아나스타샤가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에 속아 버렸던 것이다.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가스파르는 지금 이어지고 있는 음악만이라도 지켜 내기 위해 다시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반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다음 다시 오케스트라를 거기에 맞추어야만 했다.

‘뭔가 무리하는 것 같은데…….’

27번 협주곡을 골라 가지고 온 것을 보자마자 가스파르는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할 건지 알 수 있었다.

협주곡에선 되도록 힘을 숨겼다가 독주곡에서 터트리는 것이었다.

흔한 방법이고, 또 모차르트의 고전 협주곡에서 뚜렷한 장기를 증명하기 어렵다면 그게 차라리 현명할 수도 있었다.

그 작전을 알아차린 가스파르는 평범하게 거기에 호응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나스타샤는 자기 자신을 그저 조용하게 가라앉히고 넘어가야 할 타이밍에서 참지 못하고 불쑥 치솟는 감정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계산된 격양이라면 괜찮겠지만, 일관성 없는 감정적인 연주는 그저 음악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

아나스타샤도 그 부분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누르고, 앞서 실수로 튀어 나간 부분들을 상쇄하기 위해 전체 흐름에 조금 감정적인 사운드가 섞일 수 있도록 풀어놓았다.

여유가 생긴 틈에 바이올린들이 얼른 끼어들어선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높였다.

흔하게 연주되는 해석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행한 임기응변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다행히 아나스타샤의 실수는 음색에만 묻어나고 있었고 이 와중에도 박자와 리듬은 칼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쓴 1악장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2악장에서 아나스타샤는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진정해.’

2악장은 1악장보다 더 피아노가 담백하게 나아가야 하는 악장이었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리는 데엔 피아니스트의 몰입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낭만 시대의 협주곡 같은 연주를 하면 안 된다.

고전 협주곡엔 거기에 어울리는 테마와 사운드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낭만적 재해석을 하고 싶다면 이런 콩쿠르가 아니라 다른 무대에서 해야 한다.

적어도 고전 협주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이 상황에선 주어진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 감정을 절제하며 능숙하게 건반을 눌러 나갔지만, 이미 1악장에서부터 달려온 음악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무시할 순 없었다.

‘솔직히 이것도 대단하긴 한데…….’

음악 전체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중간에 바뀐 부분에 맞추어 전체적인 완성도를 재조정한다는 것은 베테랑 피아니스트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냥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긴 선을 그어야 할 때 처음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그 끝에 있는 결과는 큰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계속되는 불안정함이 이어질 것이라 예감했고, 그래서 아예 그 불안이 계속 묻어나도 마치 의도한 것처럼 들릴 수 있도록 곡 전체를 움직였다.

어린 피아니스트가 할 만한 일이라기엔 너무 파격적이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

어지간하면 가스파르는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말로 조언을 할 수도 없었고,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기에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하는 꿈틀거림이 느껴지던 2악장은 그렇게 흘러갔고, 마지막 3악장이 시작되었다.

‘차라리 조금 나으려나.’

다시 알레그로로 돌아온 템포로 경쾌한 음악이 펼쳐졌다. 그 위에서 아나스타샤는 아예 이 흐름의 결과를 제대로 제시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이제와 절제된 사운드를 깔며 다시 새 음악을 그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그녀가 시작한 음악을 적어도 일관성 있게 끌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음악가로서의 책임감과 각오가 느껴졌다.

가스파르는 솔직히 그녀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극한으로 몰아세워진 상황에서 무대에 선 연주자가 음악의 통제에 실패하는 일은 굉장히 잦다.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만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아나스타샤가 보여 준 태도와 임기응변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무엇 하나 가볍게 내던지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며 가지고 갔다.

심사 위원 같은 타인에게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음악에 진지한 것 또한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감점은 피할 수 없겠지…….’

아나스타샤 홀로 돋보이는 무대였다면 모를까, 이곳엔 천재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천재들을 심사하기 위해 모인 음악가들은 모두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협주곡이 아나스타샤에게 많은 감점을 가져오리란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쓰면 안 된다. 아나스타샤와 가스파르는 지금 이 음악에만 모든 신경을 기울이며 어떻게든 음악가로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빠르게 건반을 연주했다. 그녀의 수준 높은 테크닉은 이 정도의 패시지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로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고 가볍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오케스트라와 선율을 주고받으며 반복되는 봄의 테마를 이끌어 나가다가 깔끔하고 담백한 클라이맥스를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의 마지막 악장은 매듭지어졌다.

‘겨우 살았나.’

가까스로 이 연주를 음악으로 성사시켰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소와 함께 일어나서 청중들에게 꾸벅 인사한 아나스타샤는 이내 가스파르에게 다가왔다.

가스파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숨을 골랐다. 문제가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다는 의미로 칭찬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든 아나스타샤와 눈을 마주한 그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서도 가스파르는 그녀가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럼 안 되는데.’

연주가 불만족스럽다고 하더라도 빠르게 잊고 다음 무대에 집중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아나스타샤의 상태는 굉장히 위태로웠다.

일단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가스파르는 대기실 쪽으로 향하면서 아나스타샤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고심했다.

***

협주곡을 듣고 난 심각한 기분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를 아주 망쳐 놓은 건 아니다. 분명 아나스타샤와 오케스트라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음악은 어렴풋하게나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뭔가 되게 좋았는데?}

그래서인지 클레망은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고 있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연구를 해 본 적 없는 일반 청중들에겐 그저 좋은 음악으로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콩쿠르에서 연주해야 할 음악은 아니었다.

고전 협주곡에 대해 잘 아는 음악가들은 조금 전 연주가 잘못되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구성 악기조차 빼 버리고 단아한 사운드를 추구했던 이 곡의 의도를 무너뜨리고 아나스타샤는 정제되지 않은 미숙함으로 음악을 구성했다.

그 현상에 대해선 확실하게 느꼈지만 왜 그랬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낭만 시대의 화려한 테크닉이 휘몰아치는 곡들을 곧잘 연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 음악에 약한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 최고의 중앙음악학교에서 일곱 살부터 체계적으로 공부한 음악가라면 기본적으로 고전 음악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와 실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최근 보여 준 연주들을 보면 아나스타샤는 정말 시대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실력을 보여 주었다.

본래 실력대로라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서 발목 잡힐 일은 없었어야 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아 골몰하던 내 생각은 결국 전날 있었던 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와 마지막으로 했던 통화에서 찝찝함을 느꼈고, 그건 아마 아나스타샤도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

{아…… 예.}

{왜 그래? 방금 협주곡 이상했어?}

{그게…….}

난 어리둥절해하는 클레망을 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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