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7화 (1,197/1,277)

##  1197화

클레망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른다. 그냥 좋은 연주였다며 적당히 만족해하고 있다.

청중이 만족했다면 거기에 굳이 전공자의 관점을 들이밀어서 찬물을 굳이 끼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청중의 기분이나 감상을 망가뜨릴 자격까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하며 넘기려니 여러 가지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일단 클레망은 호스트 패밀리로서 물심양면으로 날 도와주려 하고 있었고, 최근엔 클래식 음악 감상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꽤 괜찮은 감식안을 보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따져 보았을 때 클레망에게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는 건 그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무시에 가까운 일이 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조심스럽게 클레망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실력을 다 못 낸 것 같아서요.}

{그게 제실력이 아니었다고?}

예상대로 그는 깜짝 놀랐다.

아나스타샤가 리듬을 틀리거나 미스를 하는 등 눈에 띄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이번 그녀의 협주곡은 상당히 세련된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모차르트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클레망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황당해했지만, 동시에 매우 날카로운 눈썰미를 보여 주었다.

{대체 얼마나 더 화려하게 해야 하는 건데? 그럴 만한 곡이 아닌 것 같던데. 뭔가 악기들도 부족해 보이고.}

{클라리넷과 트럼펫이 빠진 것을 눈치채셨나요?}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서 그냥 말해 본 건데, 진짜였어?}

난 이 27번 협주곡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 주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쓴 곡이 이렇게 절제되어 있다는 것에 클레망은 상당한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가 적당히 이해한 것 같은 시점에 이어서 내 의견을 말했다.

{방금 아나스타샤는 그 고전적 어법에서 많이 벗어난 연주를 했다고 생각해요.}

{아, 그래서 다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들이랑 다르게 들린 건가……?}

{아마 그렇겠지요.}

준결승 무대들을 보면서 들었던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찾아보기도 하면서 그는 요 며칠 사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들을 꽤 들어 본 것 같았다.

거기서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음악을 듣는 것에 상당한 재능이 있음을 뜻했다.

{그래도 난 이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물론 해석은 연주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만, 여긴 콩쿠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콩쿠르의 평가엔 정말 많은 기준이 적용된다. 그리고 각 시대의 음악을 멋대로 연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주 기본적인 기준이었다.

스마트폰 같은 물건은 신형이 구형보다 좋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음악의 고전과 낭만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순서는 음악성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다.

각 음악이 추구하는 최고의 지점이 전부 다른 것이다.

물론 차라리 원전을 타파하고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연주를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난 그녀의 연주가 원전보다 낫다는 생각을 좀처럼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심각해져 있는지 알아본 클레망은 덩달아 진지해져선 물었다.

{아무튼…… 그러면 큰일 난 거야?}

{글쎄요.}

친구라는 입장에 몰입하면 무슨 말이든 하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난 일부러 살짝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상당한 감점이 있었을 거예요. 독주곡들로 만회하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하긴 하는데…….}

긍정적인 견해를 내고 싶었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오늘 무대에 오르는 다른 세 사람도 모두 보통이 아니다.

독주곡으로 심사 위원들을 거의 열광시키지 않는 이상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클레망도 쉽지 않을 거란 걸 예감했는지 광고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감점당했다는 걸 아나스타샤가 알고 있을까?}

{……아마도요.}

{그럼 다음 무대에도 영향이 가겠네.}

{그렇겠죠.}

프로로서 훈련받은 아나스타샤는 앞선 무대를 잊고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이상 영향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지금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전까지 잘만 해 오던 모차르트의 음색을 잃어버린 것 같은 연주를 한 건 어떻게 생각해도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재능이 넘치고 강인한 연주자였지만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럴 땐 옆에서 누군가 그녀를 꺼내 줄 필요가 있었다.

어느새 난 나도 모르게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주가 끝난 지 막 2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가 봐.}

{예?}

{현장까지 그리 안 멀잖아. 직접 가서 보고 응원해 주면 되지.}

플라지까진 넉넉잡아 차로 약 15분 거리다. 시간상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쉬는 사이엔 다른 사람 아예 못 만나게 되어 있나? 그럼 어쩔 수 없고.}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

{그럼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어때?}

클레망의 말을 듣고도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마음은 지금 아나스타샤를 보러 가고 싶다는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나스타샤에게도 좋은 일이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괜히 제가 가는 게 더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라면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인터미션 사이 집중하고 있는 연주자들은 굉장히 예민하다.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쉽게 접근해서 건드리는 건 삼가야 할 일이다.

게다가 아나스타샤는 일전에 나와 직접 만나길 피하기까지 했다.

지금 갑자기 불쑥 얼굴을 보이는 것이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생각은 날 지독하게 슬프게 만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우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아나스타샤를 만나러 가는 일도 점점 더 현실성 없는 일이 되어 간다.

그 순간, 클레망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본 판단을 알려 주었다.

{그럴지도. 찾아온 널 보자마자 큰일 났다는 걸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될 테니까.}

{…….}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실수를 자각하고 있다면 가 보는 게 좋을걸.}

{왜요?}

그의 말은 꽤 의외였다. 아마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시간상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빠르게 설명했다.

{자기 연주가 중계되고 있다는 건 알잖아. 그걸 네가 보고 있다는 것도 알 테고. 아마 지금쯤 아나스타샤는 자기 연주를 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몰라.}

거기까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였다. 하지만 클레망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신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아마 그 애의 머릿속에 있는 너보다는 현실의 네가 조금이라도 더 다정한 말을 해 줄 것 같은데?}

{……!}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이미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선 그녀가 상상해 낸 내가 멋대로 실망하고 질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일어선 날 올려다보며 클레망은 히죽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 미안해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알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네.}

{고마워요.}

난 빠른 걸음으로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빅토르를 호출했다.

“빅토르. 지금 외출할게요. 30초 내로 차량이 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는 즉답했다. 난 플라지로 갈 것이라고 이야기를 마치고는 그대로 방에서 카디건만 쥐고는 밖으로 나왔다.

현관 근처에 서 있던 클레망은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연주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는지 그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기실에 서서 테이블 끄트머리를 꽉 틀어쥐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 이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슬럼프에 빠져들기 직전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머릿속 음악은 자꾸만 이상하게 변질되어 갔다.

처음에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점점 잊게 되고 자꾸만 감정에 모든 것이 지배된다.

연습할 때도 종종 막히면 이런 일이 있긴 했지만……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콩쿠르 무대에서 이 상황이 터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은 그녀가 그리 어렵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곡이었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연습해 왔고, 때문에 독주곡을 제대로 펼치기 전에 기본기로 선보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선곡은 학교의 선생님들도 모두 찬성했던 구도였고 스스로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오케스트라와 딱 1시간 연주해서 합을 맞춘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것 외에도 신경 쓰이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든 파이널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강했지만,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손이 멈칫거리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이성적으로는 안다. 무엇이 있든 떳떳하게 마주 보고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다.

“젠장…….”

{이즈마일로바 양.}

{아, 예…….}

어느새 곁에 다가온 가스파르 지휘자가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스파르는 딱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단지 최대한 그녀를 편하게 해 주려 할 뿐이었다.

{우린 완성도를 저해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죠?}

{…….}

{그 점은 누구나 알 테니 자신감을 가지고 일단 푹 쉬면서 다음 무대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듣기 싫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해 주는 말이라도 다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이 지금 기분이 안 좋기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괜한 화풀이를 하지 않고 얌전히 대기실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선 조용히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쉬면서도 계속 잡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조금 전의 그 추태는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도 모두 경악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를 그런 식으로 연주한다는 건 둘 중 하나니까. 도전 아니면 무식.

나중에 스마트폰을 확인할 생각을 하니 무서워졌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았다. 요즘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해 주던 타티아나도 지금쯤 무척 실망하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 무대까지 같이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이런 수준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독주곡 어쩌지…….’

멘털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는 연주자로서 본능적으로 다음 무대를 생각했다.

당연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독주곡 무대를 완벽하게 성공시켜서 만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와 손가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연주자는 무력하기만 했다.

갑작스레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아까는 노련한 오케스트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와주어서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만 이번엔 혼자다.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머리를 감싸쥐고 웅크렸다. 독주곡들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몇 분이 흐르고 있는 건지 시간 감각조차 없어졌다. 누군가 부르기 전에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아나스타샤!”

순간적으로 꿈인가 싶었던 목소리는 바로 정면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엉망으로 숨을 헐떡이는 타티아나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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