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98화 (1,198/1,277)

##  1198화

어렸을 적부터 아나스타샤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못 하는 것들을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쉽게 해냈고, 금방 칭찬과 부러움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세상의 무엇이든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었고, 그냥 손만 뻗으면 쉽게 얻곤 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택한 후에도 그리 욕심부리지 않고 지내 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찾아온 슬럼프는 아나스타샤의 자존심을 굉장히 갉아먹었고, 두려움이 없던 성격은 뒤틀려져선 멋대로 하는 행동들의 기반이 되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중앙음악학교의 문제아로 지내던 아나스타샤를 한순간에 구해 낸 건 바로 편입생 타티아나였다.

‘타티아나는 대단하지…….’

그 후로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와 가까워지면서 이전까진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제멋대로였던 성격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나스타샤는 처음으로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혼란을 느끼면서도 내빼기보다는 차라리 확인해 보는 쪽을 택한 아나스타샤는 여러 사람의 이해와 양해 덕분에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타티아나에게 마음을 살짝 전했다가 그다음 벌어진 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팔을 다친 에르네스트를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계단에서 한 실수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그녀는 오랫동안 끔찍한 생각에 휘둘려야만 했다. 에르네스트는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동시에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 일련의 상황은 아나스타샤의 마음에 사슬을 채웠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후에 아나스타샤의 거의 모든 행동은 이전까지의 일에 대한 수습에 가까웠다.

적어도 친구로나마 있으려면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게 뭐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몰두하게 된 것 역시 의무감이 컸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피아니스트가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려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친구로서 같이 어울려도 부끄러운 수준이 되지 않기 위해 아나스타샤는 혼신의 힘을 다해 피아노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건 에르네스트라는 이해자를 떼어 낸 아나스타샤가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가 당장 타티아나의 옆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저 뒤편에서 치료에 전념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대단한 애들뿐이야.’

에르네스트는 이미 너무 멀리 가 있었다. 아마 타티아나라면 그곳까지 갈 수 있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굳이 자신이 그 뒤를 쫓아가 뭘 할 수 있나 생각해 봐도 그리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감정적으로 굴게 되면 무엇을 할지 두렵기까지 했다.

언젠가 에르네스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었지. 그건 아나스타샤의 본래 성격에 곧게 와 닿는 말이었기에 잠시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큰 콩쿠르에서 실력 미달로 떨어진다면 그건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라 하더라도 무어라 할 수 없겠지.

‘어쩌면 지금이 내가 원했던 순간일지도…….’

엉망이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떠올리던 아나스타샤는 이 상황이 그대로 명분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리스트. 열일곱 살이 가질 타이틀로 그럭저럭 적당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 성과를 가지고 돌아가도 선생님이나 가족들에게 칭찬을 받기엔 충분할 것이다.

타티아나가 걱정이긴 했지만 사실 주변에 영향을 잘 받고 약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녀는 정말 강인하고 실전에 뛰어난 타입이었다.

걱정할 것 없이 잘 해내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그녀만 파이널로 올려 보내는 것이 가장 완벽한 해답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다가오다 말고 숨이 차서 견딜 수 없는지 무릎을 짚고 헥헥거리는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학…….”

“타티아나? 왜 여길…….”

정말 상상도 못 한 상황을 마주하니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멍할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멀거니 묻자 타티아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가쁜 숨을 참아 가며 말했다.

“그냥요. 그럼 안 되나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타티아나는 오늘 리허설을 하고 자기 무대에 집중해야 할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 뛰어오느라 체력을 빼선 안 된다. 그리고 이 연주자 대기실에 지금 다른 참가자는 들어오면 안 되었다. 모든 상황이 합리적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가스파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스파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문을 열어 준 모양이다.

이어 아나스타샤는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3분이었다.

이미 홀 쪽에선 청중들이 자리에 앉는 소음 등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기실 안에 있는 직원들의 불안한 시선이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슬슬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말을 못 걸고 있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고개를 살짝 끄덕여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게 직원들을 안심시킨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갈까?”

“……그래요.”

살짝 숨이 돌아온 타티아나는 최대한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답했다.

대기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문 옆에 나란히 섰다. 남은 시간이 너무 없어서 멀리 갈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곧 있을 무대보다 타티아나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괜찮니?”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건 힘드네요…….”

근래 많이 건강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타티아나는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아직도 계단에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서로 말하지 않아도 공유하는 트라우마가 같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계단을 뛰어 이렇게 3분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녀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요?”

“응?”

“다음 무대 준비는 어떤가요?”

당연히 타티아나가 물어볼 만한 질문이지만 지금은 그게 핵심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3분 안에 본론을 짚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것 아니잖아? 협주곡이 너무 엉망이라서 온 거지?”

타티아나가 먼저 꺼내기 어려울 만한 말이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아예 선수를 쳐서 직접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해, 실망시켜서.”

되도록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타티아나를 실망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은 아나스타샤를 무척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단순히 음악가 동료나 친구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짧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정도론 실망하지 않아요.”

“뭐? 아하하, 그래. 실망하는 것도 아까운 수준이었나?”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어요.”

“했을 거야.”

“안 했어요.”

“제대로 잘 생각해 봐. 했을 거라니까?”

이 애가 또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가 살짝 어르듯 이야기했을 때, 타티아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현실에 있는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처음엔 그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충분히 현실적이었으므로.

그런데 곰곰이 짚어 보니 타티아나의 말이 맞았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실망감이나 자책은 모두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타티아나가 하는 말보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앞세우는 건 정말 이상한 짓이었다.

묘하게 예리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 아나스타샤가 멍하니 있자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전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요. 음악가로서 실수가 있었겠죠. 하지만 연주자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수습해 냈어요.”

“…….”

“실망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의 기량에 놀랐어요.”

어떻게 봐도 그건 정말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립 서비스에 가까운 말이었다.

완성도만큼은 지켜 내지 않았냐고 가스파르가 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점은 있었겠죠. 하지만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다음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해 주신다면 분명히…….”

“가망이 있어 보인다고?”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협주곡만이 아니라 이제 단 몇 분 후에 있을 독주곡 무대까지도 어떻게 될지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슬럼프에 빠져든 느낌은 그냥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고 하더라도 추태만 보일 것을 분명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그냥 내가 떨어지는 게 올바른 것 같지 않니?”

“예?”

“일단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음악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알잖아.”

“…….”

그 말에 타티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협주곡만으로 대충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읽어 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숨이 차도록 뛰면서까지 찾아왔을 테고.

아나스타샤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이런 내가 테크닉만 가지고 어떻게 운 좋게 억지로 파이널에 간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미 한참 전에 아나스타샤는 이유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타티아나와의 약속과 에르네스트에 대한 책임감 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꾸만 이쯤 하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직감이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아나스타샤.”

그러나 타티아나는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간신히 그녀를 마주 보니 숨이 차서 헐떡이던 모습은 없고 심사 위원처럼 엄격한 모습만 있었다.

“전 아나스타샤가 심사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요.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

“하지만 그 전에 포기하진 마세요.”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둘 다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타티아나는 절대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책망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최선은 다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타티아나를 이끌어 온 근본적인 원동력이기도 했으니까.

아나스타샤 역시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정말 많은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빛이 너무 강하고 아름다웠던 나머지 약간 착각하고 있었던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는 것도 조금 느꼈다.

솔직히 포기가 늦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냥 콩쿠르를 포기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난 여기까지였던 거야. 경쟁자 1명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편할…….”

“납득 못 해요.”

“어?”

“경쟁자 1명이라뇨? 제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딱딱하게 말하려 하고 있지만 타티아나의 목소리엔 어느새 열기가 서려 있었다. 물기가 맺힌 눈을 똑바로 치켜들고 그녀가 말했다.

“만약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떨어지면 저도 엄청 영향 많이 받을걸요. 그리고 당장 오늘 있을 리허설을 망치고 내일 있을 무대도 실패하겠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내가 망한 거랑 네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상관 있어요!”

아나스타샤가 말도 못 꺼내게 타티아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끔 이렇게 억지를 부릴 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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