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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99화 (1,199/1,277)

##  1199화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오랫동안 만나 오면서 그녀가 얼마나 올곧은지 알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위로해 주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일으켜 세우려 한다.

대체 어디서 그런 강인함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타티아나는 주어진 기회를 허사로 만드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쉽지 않으리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타티아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로부터 많은 것을 읽어 내고 반드시 직접 가 봐야겠다고 판단했기에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력과 진실성에 눌린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나약함을 보이고 말았고, 타티아나는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전 무대는 아쉬웠지만 다음 무대에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대충 둘러대서 돌려보낼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하지 않아야 할 말까지 다 해 버렸고, 타티아나는 무대를 앞두고 흔들리고 있는 친구를 두고 그냥 가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입장을 바꾸면요? 제가 만약 무대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면 아나스타샤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수 있나요?”

“…….”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워낙 강인한 연주자라서 타티아나가 무대를 도외시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만약 지금 타티아나가 그런 상황이라면 아나스타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반드시 파이널 라운드에 가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콩쿠르에 임하는 모든 참가자의 입장이 똑같다는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그 누구보다 타티아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기회가 더 중요했다.

콩쿠르는 매번 돌아오겠지만 정말 많은 우연과 노력이 겹쳐져 만들어진 이번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타티아나에게 그걸 설명할 순 없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자 타티아나는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바짝 다가오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건 정신력이에요.”

“정…… 뭐?”

“정신력이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아나스타샤는 눈만 깜빡이며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가 정말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정신론을 설파하려 든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의외의 모습이 놀라웠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진지했다.

아마 시간이 충분하고 아나스타샤가 협조적이었다면 타티아나도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급박한 상황에선 거의 억지를 부리듯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큰 콩쿠르예요. 그런데 가혹한 규칙으로 더 몰아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글쎄…….”

“완전한 컨디션으로 실력을 내면 참가자 모두가 잘하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압박을 느끼고 실수를 하더라도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 보려는 거예요.”

콩쿠르의 통제와 규칙이 어떻건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따르던 타티아나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꽤 신기했다.

“그러니까 참가자들은 참가자들 대로 굴하지 말고 맞서야죠. 마음을 강하게 먹고요. 그렇지 않나요?”

근본적인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를 온전히 무대 위로 올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타티아나의 행동과 말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또 넘어가 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냉정하게 보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협주곡에서 너무 많은 점수를 까먹었다.

독주곡들을 평범하게 잘해도 아마 파이널에 가는 건 어려울 텐데, 심지어 컨디션도 엉망이고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머리도 어지러웠다.

아나스타샤는 다음 무대에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그냥 올라갔다가 망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처럼 굴고 싶었다.

적어도 그렇게 되면 상황은 똑같더라도 마음은 조금 덜 아플 테니까.

‘저 애는 괜찮을 거야.’

그렇게 떨어진다면 타티아나는 슬퍼하고 실망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보란 듯이 잘 해낼 것이다.

지금은 자기도 약하니까 같이 가 달라며 떼를 쓰고 있긴 해도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자로서의 그녀가 눈을 뜨는 순간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 아나스타샤는 거의 신앙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고 그래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판단을 마친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아. 아는데…… 그 정신력이란 건 친구가 떨어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무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말은 듣지 않을 거예요.”

“뭐?”

분명 정확하게 반론한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완전 무논리로 맞대응했다.

지금까지 나름 정신론 같은 걸 주장했던 건 대체 뭐였냐고 묻고 싶었다.

황당함을 느낀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자 타티아나는 되레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똑바로 눈을 치떴다.

“제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정신은 친구가 위기에 빠졌을 때 거슬린다고 생각되더라도 한마디 해 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타티아나는 강했다.

급하게 꺼낸 말들이라 정신력이라는 것이 연주자로서의 강함인지, 친구로서의 우정인지 제대로 분리하지 않고 마구 혼용하여 멋대로 쓰고 있는데도 그녀와 마주하다 보면 어느샌가 그 진심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평소엔 고지식하면서 왜 이럴 땐 멋대로 굴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옆머리를 짚었다.

방금 전까지 타티아나를 상대하기 위해 고려하고 있던 수많은 생각이 다 깨져 버렸다.

“너 지금 말이 엉망진창인 것 아니?”

“그래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계시잖아요?”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었다.

자선 연주회 같은 건 대충 하겠다며 의욕 없던 그 렌스키마저 진심으로 돌려놓았던 타티아나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와 정면으로 상대해서 이길 자신이 전혀 없었다.

단, 시간은 아나스타샤의 편이었다.

“몰라, 이해 못 했어.”

“아나스타샤.”

“이제 시간도 별로 없고 말이야.”

힐긋 시계를 보자 남은 시간은 1분 30초 남짓이었다.

이미 홀 안엔 청중들이 전부 차 있을 테고 곧 사회자가 멘트를 시작할 것이다.

아마 지금 대기실의 직원들은 당장 아나스타샤를 끌고 가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 중이겠지. 그 상황을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었다.

“이제 나 들어가도 돼?”

“……지켜볼 거예요.”

타티아나는 더 이상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떨어지는 게 옳다는 듯한 연주를 한다면…… 똑똑히 봐 뒀다가 평생 놀릴 거예요.”

“어떤 기준으로 그걸 알 수 있는데?”

“제가 모를 것 같나요?”

연주가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볼 방법 같은 건 당연히 없다. 하지만 어쩐지 타티아나를 속이는 건 불가능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모를 거란 건 아나스타샤의 생각이고요.”

“만약 안다 한들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유치해요.”

“이제 알았니? 나 유치한 거.”

“저보다 키도 한참이나 크시면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필요하면 잘라서 가져가든가.”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말다툼이 오갔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이 상황이 웃겨서 웃어 버릴 뻔했다. 지금은 절대 친구랑 투닥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1분 10초 정도 남았을 테고, 그사이 심적인 준비를 마저 마쳐야 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조금 전까지 불안정하게 들끓던 심장은 어느새 기분 좋은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이미 이 짧은 대화로 아나스타샤는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아 버리고 말았다.

비단 용기와 의지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형언하기 어려운 너무 많은 것이 지금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약간의 변화를 느낀 아나스타샤는 일단 대기실 문을 열며 대화를 끝맺었다.

“네 말은 너무 멋대로야. 그러니까 나도 마음대로 할래.”

아나스타샤가 벌컥 문을 열자 이곳을 보고 있던 직원들과 가스파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1분 남은 상황이었다.

{문 앞에 서 있으면 되죠?}

{에…… 그렇습니다, 이즈마일로바 님. 지금 바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걱정하는 듯한 직원을 안심시키고 아나스타샤는 무대로 향하는 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릿속도 어지럽고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준비한 연주를 제대로 하긴 해야 했다.

일단 연주자로서 태도를 바로잡으려던 그 찰나였다.

“아나스타샤!”

뒤편에서 타티아나가 그녀를 불렀다.

이제 할 말도 다 끝났는데 문도 안 닫고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그냥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이어 크게 소리쳤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

깜짝 놀란 아나스타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가스파르가 문을 붙잡아 두고 있었고, 타티아나는 멀리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나고 나면 마저 이야기하자.”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작았지만 아나스타샤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가 정말로 거리감 없이 마음을 밀착시켜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

네르미나 양켈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곡을 납품하며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여러 연주자가 자신의 곡을 어떻게 해석해서 연주할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앞자리에서 보거나 페이지 터너의 역할이 필요하면 직접 자처할 정도로 네르미나는 연주자와 가까운 거리를 선택했다.

‘그 아이라면 내 곡을 정말 멋지게 연주해 줄 것 같았는데.’

네르미나는 이번에 올라오는 아나스타샤란 연주자에게 흥미가 꽤 많았었다.

아나스타샤가 보여 준 퍼포먼스는 네르미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리긴 하지만 나이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 타고난 것 같은 화려한 색채감과 자신만만한 터치로 음악을 휘둘러 주면 대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데 막상 세미파이널 무대에 선 아나스타샤는 처음 때와는 달리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모차르트에 대한 해석이 정말 별로였다.

네르미나는 금방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처럼 오래된 음악가의 해석도 그렇게 잘 못 한다면 네르미나의 곡을 제대로 봐 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게다가 컨디션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 네르미나는 큰 기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무대에 올라 페이지 터너 자리에 앉았다.

‘……어라?’

그런데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온 아나스타샤는 어쩐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이어서 네르미나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악수를 받은 네르미나는 아나스타샤의 눈빛과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에너지에 온몸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실망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피아니스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음악뿐이다.

네르미나는 사그라들었던 기대감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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