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0화
흘렀던 땀이 식으면서 살짝 서늘해졌다. 그제야 과열되어 있던 머리가 조금 식었다.
‘정신없어…….’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의 협주곡 연주를 듣고 클레망과 이야기한 후 마음을 정한 뒤 차로 이곳에 와서 뛰기까지.
20분 사이 있었던 일들은 정말 날 최고조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다.
그저 얼굴을 마주하고 해 줄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도움이 된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어떻게든 다 쏟아 내긴 했는데…… 거의 다투다시피 하며 마지막까지 시간을 많이 빼앗아서 되레 더 방해가 된 게 아닌가 걱정도 들었지만, 마지막에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
‘바로 시작했네.’
홀에서부터 들려오는 박수 소리가 벽 너머로 들린다. 다시 아나스타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난 그녀가 어떤 결과를 얻든 상관없었다. 좋은 결과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안타깝게 되었다면 슬퍼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납득하지 못하고 후회하며 자책한다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마 그러면 곁에서 나 역시 그녀에게 일찍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후회하지 않도록…….’
난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모았다.
그때였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오는 게 어떻습니까?}
{앗, 죄…… 죄송합니다.}
내가 대기실 앞에서 아나스타샤가 무대로 향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던 건 누군가 문을 연 채로 잡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가스파르 말레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내가 급히 사과하자 가스파르는 사람 좋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관계자도 아니니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나스타샤에게 할 이야기는 다 했고요…….}
{관계자가 아니라니? 무슨 말입니까?}
{예?}
상식적으로 연주자 대기실엔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스파르는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며 물었다.
{피아니스트 베르체노바 양 아닙니까?}
{맞아요…….}
{그럼 콩쿠르 관계자잖습니까. 들어오시죠.}
가스파르는 안쪽으로 날 안내했지만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렇긴 하지만…… 일단 연주자 대기실엔 바로 무대에 올라야 할 사람들만 관계자로 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규칙상 문제가 없는가 싶어서 대기실 안에 있는 직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렇게 내가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본 가스파르는 내 대신 직원들에게 물어 주었다.
{혹시 문제 있습니까?}
{다른 참가자가 대기실에 들어오는 걸 금지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혹시 일부러 방해 같은 것을 할 의도가 보인다면 조치가 취해지겠지만…….}
찔리는 곳이 있었던 난 숨을 크게 들이쉬며 굳어 버렸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건 어디까지나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방해 행위라고 보일 수도 있는 일들이었다.
중요한 인터미션 시간에 3분이나 붙잡고 온갖 말들을 억지로 퍼부어 놓았으니…… 대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조차 안 간다.
쫓겨나기 전에 도망치는 게 낫나 싶어서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는데, 딱딱하게 이야기하던 직원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베르체노바 님께 그런 의도는 없으셨던 것 같고, 지금은 이미 연주자가 무대에 오른 상황이니 이곳에 계셔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엄격하고 칼같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직원이 맞나……?’
의아할 정도로 부드러운 태도로 대해 주는 직원 때문에 난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대답한 직원 말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날 보며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뭘 하든 다 눈감아 주겠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뭔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기까지 했다. 난 그런 걸 절대 바라지 않지만……
지금 여기서 빠져나가서 어디 복도 구석에서 작은 스마트폰으로 중계를 보나, 여기서 조용히 모니터로 보나 딱히 형평성에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곧 아나스타샤의 연주가 시작될 참이었다. 난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얌전히 중계만 보고 나갈게요.}
혹시나 괜한 오해를 받긴 싫어서 어깨를 웅크린 채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가스파르가 대기실 문을 닫았다.
대기실 안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직원이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레이저로 조준당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대기실로 쳐들어와선 연주자를 들들 볶아 무대로 내보낸 상황이다 보니 신기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유가 너무 명확했기에 왜 이렇게 쳐다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엄청난 시선들을 간신히 감수하면서 쭈뼛거리고 있자 가스파르가 손수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서비스를 받아도 되는 건가 싶다.
{자, 여기 앉으시고. 혹시 물 필요합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막 연주가 시작될 것 같으니 편안하게 보시죠.}
가스파르는 신경 안 써도 좋다는 듯 뒤편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난 시선을 느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니터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침 인사를 다 마친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자세를 정돈하고 있었다.
홀이 조용해졌다. 이제 막 연주가 시작되려 한다. 난 그녀를 믿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때 뒤에 있던 가스파르가 나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예?}
{이즈마일로바 양은 인복이 있군요. 부럽습니다.}
그 말에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나스타샤의 독주곡 레퍼토리의 첫 곡은 콩쿠르 측에서 요구한 미발표 의무곡,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였다.
고대 인도의 리듬과 현대 음악의 접목으로 만들어진 독특하고 흥미로운 음악이다.
난 다른 참가자들의 모든 중계를 다 챙겨 볼 순 없었지만 이 곡 만큼은 다시 찾아 들어 보았다.
이 곡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내 답과 얼마나 다른지 궁금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레퍼런스 없이 해석된 각각의 음악들은 모두 인도 리듬이라는 근간을 기본 골조로 삼았기에 비슷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 음색이나 디테일한 표현은 정말 천차만별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예상하기론 인도 특유의 풍취를 보다 다이내믹하게 살려 내는 데에 집중하지 않을까 상상할 뿐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이게 같은 곡?’
시작부터 아나스타샤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기우뚱하게 음악을 기울였다가 탁 하고 놓으며 그 탄성을 이용하듯 다음 음을 찍어 낸다.
경쾌하면서도 유연한 소리가 홀을 내달렸다.
마치 도전장과도 같은 음악이었다. 앞으로 약 10분간 이런 식으로 연주할 테니까 알아서 들으란 것 같다.
그 자신만만함이 평소의 아나스타샤답기도 하고, 복잡한 것들은 일단 내려놓고 음악을 즐기고자 함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욕이 느껴져서 난 그녀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다른 그 누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음악을 시작한 아나스타샤의 손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음악을 읽고 그 이후를 상상하면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 이상을 보여 주고 있어…….’
음악가로서 훈련된 내가 짚어 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변화무쌍하고 화려했다.
그녀의 음악은 여러 종류의 꽃들로 다채롭게 장식한 꽃바구니 같았다.
다른 연주자들이 인도 리듬이라는 생소한 기준에 종속되어 보다 깊은 해석을 추구하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는 그 리듬을 거의 본능적으로 체득해선 그대로 자신의 강점을 덧붙여 내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연주자의 열정과 기품 그리고 냉철한 판단력이 돋보인다.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될 것이라 장담한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이 곡의 연주자들은 대부분 이보다 못 했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새삼 느껴졌다. 테크닉적으로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른 그녀는 음악성 역시 무척 뛰어났다.
아마 지금 이 무대를 보고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그녀를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 이랬어야지.}
『□□□ □□□□?』
10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고, 뒤편에 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만족한 듯 다들 한마디씩 했다.
사실 이 사람들은 힘들게 협연하느라 실망한 부분이 더 많았을 텐데, 지금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쉽지 않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가스파르가 웃으며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수많은 레퍼런스와 연구가 있고 합리성이 보장된 답이 존재하는 고전 협주곡에선 점수를 따지 못했으면서 딱 봐도 답이 없고 어려운 현대 음악은 굉장히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독주곡을 일반적으로 쳐선 힘들다. 그러니까 무지막지하게 잘 쳐야만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실제로 해낼 작정이었다.
약간 흥분한 내가 빠르게 한마디 칭찬을 덧붙이려는 찰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우르르 대기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시나요?}
당황한 내가 묻자 가스파르는 손가락을 들었다.
{이제 4시잖습니까? 내일 연주할 연주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아.}
{시간만 된다면 이 무대를 조금 더 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군요.}
콩쿠르 일정에 허덕이는 건 비단 참가자들뿐만이 아니었다.
24명이나 되는 인원의 리허설과 연주를 모두 도맡고 있는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근로량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았다.
리허설과 연주를 계속 반복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진다. 심지어 협연자와 곡이 매번 바뀌기까지 한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노련함이 없다면 도저히 소화해 낼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해내고 있었다. 콩쿠르 참가자들이 프로이듯 그들 역시 프로였으므로.
{다행히 베르체노바 양의 차례는 저녁인 것 같군요.}
{그, 그런가요…….}
{아직 연락 없지 않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스파르가 빙그레 웃었다.
{이따 저녁에 봅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스파르는 단원들을 이끌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난 이따 뵙겠다고 해야 할지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다가 그냥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가고 대기실 안엔 나와 직원들만 남았다.
아까 관심을 잔뜩 받을 땐 그것대로 부끄러웠지만,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어색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여기 앉아 있는 건 아니란 점이었다.
페이지 터너가 의자를 들고 퇴장하는 그 잠깐 사이 쉬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곧 다시 다음 곡을 준비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난 내 주변의 일에 신경을 돌릴 틈도 없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