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1화
중앙음악학교 10학년 피아노과는 3시가 되자 모두 교실에 모여들었다.
바르바라와 발렌티나의 쇼팽 콩쿠르 무대를 모두 같이 관람했던 것처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한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의 무대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싶은 건 친구로서 그리고 동시대를 사는 피아니스트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학교에서도 상당한 유명 인사였으므로 이 시간에 중계를 보는 건 비단 피아노과만은 아니었다.
그걸 이해하는 학교 선생님들도 이 시간만큼은 중계 관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야말로 중앙음악학교 전체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향방과 아나스타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큰일 난 거 아니야?”
“글쎄…… 왜 저렇게 쳤지?”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세미파이널 첫 무대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된 직후 교내 곳곳에선 의문이 가득한 소리들이 퍼져 나갔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고전 협주곡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도전적인 의미인지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가 있는 곳은 국제 콩쿠르 자리였다.
거의 자유자재로 시대를 넘나들며 탄탄한 연주를 하는 경쟁자들에 비해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재미는 조금 있을지언정 점수를 따기엔 굉장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모여 있는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듣던 발렌티나는 답답함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어제 전화할 때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정상이 아니었다.
본래 아나스타샤는 고전 레퍼토리도 꽤 잘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쳤던 걸 발렌티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이상하고 완성도가 낮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발렌티나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도 멀리 브뤼셀에 있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이미 폰도 꺼져 있을 테지만 켜져 있다 하더라도 전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난 건 가까운 곳에 있을 타티아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애한테 하는 것도…….’
친구들 모두가 이상함을 눈치챘는데 그 예민한 타티아나가 이상을 못 알아차렸을 리 없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설명을 요구해 봤자 그건 타티아나를 괴롭히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연락을 취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 볼 수 없는 것처럼 타티아나에게도 할 수 없었다.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발렌티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너무나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건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걱정하면서 두리번거리고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자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달려들어 뜯어 말렸을 것이다.
그 어색한 불안감 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론 타티아나가 무언가 해 주길 바라는 기도였다.
‘너밖에 없어, 타티아나…….’
지금 아나스타샤는 오래전부터 다뤄 온 음악을 잊어버렸을 정도로 제대로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20분 쉬고서 말끔하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음 무대를 더 완벽하게 하길 바라는 건 너무 과한 바람이었다.
이미 멘털이 완전히 흔들려 버린 게 분명했다. 남은 곡들을 끝까지 연주할 수 있다면 다행일 터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타티아나가 정말 한마디만 해 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사실 그것도 과한 바람이란 건 안다.
타티아나도 초인 같은 것이 아니라 긴장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항상 위기를 마주할 때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추진해 나가는 강함을 보여 주곤 했었다.
발렌티나는 가끔 타티아나가 선생님 같다고 느꼈었다. 그건 단순히 음악을 잘 가르친다거나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침을 그녀는 몸소 실천하여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 존재 자체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인 것이다.
만약 지금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의 근처에 있다면 분명히 행동을 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했겠지.
그건 막연하지만 꽤 또렷한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발렌티나는 전화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참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제대로 이루어졌다.
“와, 미친. 아나스타샤 진짜 뭐야? 모차르트는 헤매고 저 어려운 곡은 가지고 놀아 버리네?”
“중간에 대체 뭐 어떻게 해서 쳐 낸 거냐? 악보 있는 사람 있어?”
“내 생각엔 아나스타샤가 제일 잘했어.”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가 연주된 직후 또다시 교내 전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번엔 불안함이 아니라 열띤 흥분으로 가득한 소리들이었다.
이미 협주곡에 대한 기억은 전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아나스타샤가 보여 준 화려한 테크닉과 매력적인 리듬 그리고 폭발적인 사운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아나스타샤라는 피아니스트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협주곡을 잘했다면 정말 엄청난 고점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그리고 어차피 세미파이널은 순위를 정하지 않는다. 단지 12명 안에 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파이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진짜 모르겠네.”
“쉿, 다음 곡 시작한다.”
협주곡은 엉망이었고 의무곡은 깜짝 놀랄 정도로 잘 해낸 아나스타샤의 당락을 놓고 잠시 시끄러웠지만 아직 그녀가 연주해야 할 곡은 많이 남아 있었다.
화면 너머 아나스타샤는 작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저 상황이 얼마나 떨리는지 발렌티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고요 속에서 숨을 고르던 아나스타샤의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조의 선명한 화음이 울려 퍼졌다.
‘진짜 선곡 잘했어.’
스크리아빈의 폴로네이즈 op.21.
어두운 동굴 속 횃불을 든 남자가 이곳저곳을 살핀다.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모습에 놀랐지만 남자보다 더 놀란 쥐 한 마리가 빠르게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그 뒤를 따라 횃불을 앞세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곡은 스크리아빈이 독자적인 신비주의에 몰두하기 이전 쇼팽을 위시한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에 대한 이해와 경지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스크리아빈의 정수가 밀집된 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피아노 소나타 2번이나 3번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처럼 이 폴로네이즈 역시 짧고 강렬한 음형으로 두루 사랑받았다.
쇼팽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지만 스크리아빈의 음악성의 편린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기에 시대와 시대 사이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뉘앙스가 강했다.
아나스타샤가 이 곡을 고른 이유는 분명했다.
모차르트와 인도 리듬의 현대 음악까지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으로 왔다 갔다 했던 그녀의 레퍼토리를 일단 청중들 앞에서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정리란 차분하게 음악을 담아 예쁘게 꾸려 보여 주는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화려한 색채감으로 이전의 것들을 다 덮어 버리는 것 역시 한 방법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내세우는 음악의 색은 정말 짙고 끈적했다.
마치 페인트 통을 휘두르는 것처럼 흩뿌려진 음악은 청중들을 물들이고 현혹한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전율이 돋을 정도로 굉장했다.
‘팔에 소름 돋았어…….’
스크리아빈은 에르네스트가 종종 연주하던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스크리아빈의 중기 음악이 어떤 느낌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가 마치 낭만 시대의 흐름을 전부 통찰하여 요약한 것 같은 완벽한 연주를 해냈다면,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비장함은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이 쉽지 않은 곡을 이 정도로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을지 절로 상상이 갈 정도다.
그리고 왜 하필 스크리아빈인지 발렌티나는 대충 알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친구가 세계를 휘어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했어, 정말로 잘했어.’
어두웠던 동굴을 메아리치던 음악은 곧 동굴 전체의 크기와 길이를 밝히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마치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아나스타샤의 테크닉은 그야말로 빈틈없이 완벽했다.
한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크기와 울림을 선보이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엔 더욱 가속하고 강해진다.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다.
그렇게 정열적으로 치솟던 음악은 점점 끝으로 향했다.
동굴의 끝에 있는 빛을 향해 남자는 빠르게 달려갔다. 울림이 줄어들고 빛은 커진다.
그리고 그 빛이 이내 시야를 전부 채웠을 때, 발렌티나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바!”
“스크리아빈이 이런 곡도 있었어?”
“나 오늘부터 연습할래.”
6분 남짓한 연주가 피아니스트들에게 남긴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폭발적인 반응을 보면서 발렌티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친구의 성공적인 연주는 정말 기쁘게 마음에 와닿았다.
더 기쁜 건 이것이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여전히 홀은 고요한 가운데 다음 음악을 바라는 욕구로 가득했고, 거기에 응하기 위해 아나스타샤는 다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다들 조용!”
바르바라가 크게 한마디 해서 교실 안 모두를 진정시켰다. 떠드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하는 환상적인 연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곧장 다음 곡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