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02화 (1,202/1,277)

##  1202화

심사 위원 안토니오 발디니는 아나스타샤의 독주곡 프로그램을 들으며 고뇌에 빠져 있었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연주 중인 곡은 스크리아빈의 폴로네이즈. 이 곡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너무 잘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오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기량이 높은데 모차르트는 왜 그렇게 친 거야?’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고 딱 열일곱 살이 칠 만한 수준의 모차르트 협주곡만 보여 줬더라도 아나스타샤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협주곡은 너무 제멋대로였고, 오케스트라와 심사 위원들 모두를 힘들게 했다.

처음 무대에서 보여 주었던 솔리스트로서의 실력은 무척 뛰어났었는데…… 협주자로서 이 정도로 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어려운 협주곡도 아니고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파이널에 올라가면 협주곡을 두 곡이나 쳐야 한다. 협주자로서 능력 미달이라면 올라가면 안 되는 자리이다.

때문에 안토니오는 채점표에서 그녀의 협응력이나 이해력 등 많은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었다.

인터미션 사이 다른 심사 위원들의 눈치를 보니 모두들 아나스타샤에게 실망과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었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점수를 준 것 같았다.

‘아깝군.’

날고 기는 천재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이 자리에서 무대 하나를 통째로 날렸다는 건 더 따져 볼 것도 없는 실격 사유다.

어쩔 수 없이 안토니오는 개인적인 기대를 아나스타샤가 아닌 그녀의 친구인 타티아나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10대 참가자들만 따져 본다면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였다.

타티아나는 이미 테크닉이나 음악성으로 전 세계의 음악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점점 더 발전하고 있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녀는 매번 평가를 갈아 치우고 있었다.

이번에도 타티아나가 연주했었던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은 센세이션이 되어 음악 커뮤니티 등지에서 떠들썩하게 회자되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도 좋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임시 음악 감독을 맡았던 적도 있다고 하니 아나스타샤보다는 협연자로서의 역량이 뛰어나리라 예상되었다.

그렇게 안토니오는 아나스타샤에 대한 기대는 일찍 접고 그냥 독주곡은 편하게 듣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제대로 들으라는 듯 안토니오의 귀를 콱 틀어쥐었다.

‘도저히 한눈을 팔 수가 없군.’

네르미나 양켈의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그리고 스크리아빈의 폴로네이즈. 이 두 곡으로 보여 준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그야말로 괄목할 만했다.

마치 본능적으로 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낭만적인 리듬감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정도로 세련되었다.

거기에 과감하면서도 냉철한 터치는 아나스타샤의 프로페셔널적인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모든 사전 정보를 배제하고 눈을 감고 들으면 베테랑 피아니스트가 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차르트 때와는 완전히 다른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안토니오를 옭아매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콩쿠르 진행 중에 실력이 좋아지는 피아니스트들도 여럿 봐 왔다.

그중 대부분은 무대에 익숙해지면서 본래 실력을 내는 타입들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작은 음악적 디테일까지 손대면서 깔끔하게 연주하는 아나스타샤는 지금 확실하게 한 단계 더 진화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협주곡을 제대로 못 친 것 때문에 뭔가 내려놓았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이쯤 되니 아나스타샤가 한 모든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악 외의 다른 걸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란 걸 알지만, 그녀의 음악이 너무나 뛰어났기에 빠져드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다시 차오르는 개인적 기대와 호기심을 느끼며 안토니오는 펜을 쥐었다.

‘독주곡 프로그램을 아무리 본 실력대로 치더라도 파이널에 가는 건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전 라운드에 했던 실력을 그대로 구사했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그것보다 더 잘한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채점표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마치고 나자 홀 안은 뜨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지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협주곡에선 정말 초보적인 것도 못 지키던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엄청난 실력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물끄러미 심사 위원석을 돌아보았다. 11명의 심사 위원 모두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나스타샤를 파이널 라운드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곳곳에서 상충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 한 곡만이 남았다.

보통 이 정도까지 오면 당락 여부는 거의 결정되어 있지만, 아나스타샤의 경우는 조금 특수했기에 결과를 정말 알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마지막 곡까지 주의를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심사 위원들은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마지막 곡은 어딜 가서도 쉽게 듣기 어려운 곡이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하는군…….’

알캉의 단조 에튀드 op.39의 8번. 피아노 솔로를 위한 협주곡 1악장.

마치 오케스트라와 함께 장대한 곡의 시작을 열듯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화음을 펼쳤다.

앞으로 시작될 음악을 생각하면 정말 쉽지 않은 템포이지만 아나스타샤는 조금의 타협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 있게 연주해 나갔다.

이 프로그램을 선정하면서 의도한 바였겠지만 조금 전 스크리아빈의 폴로네이즈가 깔끔한 b플랫 마이너로 끝나고 정확한 호흡으로 쉬었다가 이어진 이 곡은 g샵 마이너의 조성으로 마치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듯한 뉘앙스를 가져왔다.

이미 이전까지의 모든 곡들이 다 이 곡을 위한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빠른 템포로 가능한가?’

어린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소문은 알음알음 들려오고 그중 아나스타샤는 알캉의 연주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물론 알캉의 곡이라고 하더라도 한두 곡이 아니었기에 그중 열일곱 살이 소화해 낼 만한 곡은 뻔하다 생각되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마치 얕보지 말라는 듯 가장 어렵다고 일컬어지는 곡을 자신의 독주곡 프로그램에 포함시켜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DVD와 1라운드에서 워낙 잘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심사 위원들이 그녀를 여기까지 올려 보낸 건 바로 이 곡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단조 에튀드 8번은 심사 위원들 안에서도 극소수만 쳐 본 곡이었다.

그리고 그 극소수도 콩쿠르에서 자신의 무기로 꺼내 들 정도로 제대로 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콩쿠르에서 알캉을 메인으로 연주하다니 정말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래도 될 만큼의 실력자였다.

‘벌써부터 기가 막힐 정도군.’

참가자들이 결정되고 나면 그 참가자들은 자신이 연주할 곡들을 정리해서 제출하게 된다.

심사 위원들은 대부분의 곡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중 생소한 곡이 끼어 있다면 따로 심사를 위해 연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의 알캉은 심사 위원들에게도 하나의 숙제이자 공부처럼 주어졌었다.

안토니오는 이 곡을 처음 연구했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이었다.

당장 자신이 작정하고 연습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몇몇 구간은 너무 어려워서 템포를 조절해야 할 것 같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 곡은 테크닉만이 아니라 음악적인 이해도와 표현력도 굉장히 깊게 요구했다.

애초에 곡 이름이 피아노 솔로를 위한 협주곡이었다.

프란츠 리스트를 필두로 이런 시도를 한 작곡가들은 많았지만 알캉은 정말 본격적이었다.

시작부터 오케스트라의 전합주를 뜻하는 투티tutti가 지시되어 있고, 그 음색을 트롬본처럼 하라는 지시도 덧붙여져 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이 사운드는…… 확실히 이 곡의 테마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단순히 알맞게 치는 것만으로도 까다로운 곡인데 표현까지 신경 쓰려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손이 꼬일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마치 이런 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곡을 연주했다.

이 소리는 당연히 피아노의 소리다. 하지만 그 너머에 깔려 있는 음색에서 안토니오는 확실하게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느낄 수 있었다.

고음에서 노는 트릴은 마치 현악기들의 합주 같고, 이어지는 짧고 거대한 스타카토는 관악기를 닮아 있었다.

이렇게 피아노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형상을 그리려는 시도는 리스트와 알캉 이후로도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꿈이었다.

정말 좋은 실력과 경력을 갖춘 피아니스트들이 종종 그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기도 했지만 이렇게 어린 피아니스트가 그 편린이나마 구사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는 피아노 솔로 부분을 연주해 나갔다. 그 위로 바이올린이 겹치고 다시 합주가 시작된다.

‘혼자서 하는 협주곡은 이렇게 잘하는군.’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의 기량이었다. 안토니오는 황당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의욕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펜을 쥐었다.

그에겐 심사 위원으로서 철저하게 이 연주를 분석하고 평가할 의무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