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3화
아나스타샤가 알캉의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은 예전에도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다.
‘바람처럼’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단조 에튀드 1번은 리처드와 대결을 하다가 비장의 무기로 연주했었고, 단조 에튀드 6번인 피아노 솔로를 위한 교향곡 3악장은 렌스키와 대결하기 위해 꺼내 들기도 했다.
거기다 미국 포트워스에서 쳤던 피아노 솔로 심포니나 이번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친 단조 에튀드 12번 이솝의 향연까지…….
알캉의 음악은 아나스타샤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이루어 낸 칼날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 음악으론 정말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다.
현존하는 알캉 연주자라는 것만으로도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들은 경악하며 존중을 보였고, 청중들은 열광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적재적소에서 그 날붙이를 내밀어 원하는 것을 쟁취해 냈다.
‘어디서나 비장의 무기로 통용되는 곡이긴 해.’
이번에도 아나스타샤가 알캉의 곡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넣은 건 당연히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앞서 나가기 위한 무기임이 틀림없었다.
특히 이 단조 에튀드 8번은 알캉의 여러 곡 중에서도 난곡으로 손꼽힌다.
연주자로서의 한계를 시험하는 곡이기에 제대로 연주하기만 한다면 심사 위원들도 두 손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계를 평정하기 위한 곡이었다.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연주를 들으면서 난 그녀의 태도가 이전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약간…… 물러진 것 같아.’
아마 아나스타샤의 본래 기획은 앞서 연주한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그리고 스크리아빈의 판타지로 홀의 분위기를 끌어 올린 다음에 이 단조 에튀드 8번으로 완전히 휘어잡아 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첫 단추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에서 삐걱거린 바람에 아나스타샤의 계획엔 차질이 생겼고, 협주곡 연주를 하는 30분 동안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그냥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했었던 것 같다.
내가 끼어들어 그녀를 다시 일으켜 무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연주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인지 지금 아나스타샤의 연주에선 이 콩쿠르를 반드시 재패하겠단 야망도, 누군가를 꺾어 버리겠다는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태양처럼 강렬하던 아나스타샤의 빛이 약간 바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직사광선은 수면과 유리에 반사되어 보다 부드럽고 찬란한 빛을 발했다.
난 아나스타샤의 어떤 면모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에서 마주 볼 수 있는 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템포는 그대로야…….’
부드러워졌다는 건 아나스타샤의 힘이 약하고 느려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전히 그녀의 음악엔 강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반 도입부를 넘어서 장조 테마로 넘어가자 쇼팽의 영향이 느껴지는 뉘앙스가 드러나면서 아나스타샤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본래 아나스타샤는 이런 부분에서도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모아 투사하곤 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선 압도적으로 밀어붙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다분히 과시적이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연주야말로 그녀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어깨에서 힘을 살짝 뺀 것만으로도 음악의 분위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아나스타샤가 섬세하게 손가락을 펼쳤다.
쇼팽의 발라드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시적인 구간이 이어지다가 곧 스케르초나 프렐류드처럼 약동했다.
그녀는 출중한 실력으로 정면에서 청중들을 무릎 꿇리려 하지 않고 뒤편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누군가 뒤에서 다가온다면 대부분은 놀라서 돌아보겠지만, 음악이 정말 부드럽고 아름다워서 그녀가 등을 감쌀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는 겨우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고 편안했다.
감미로운 독주 구간이 끝나며 이어 존재하지 않는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의 뒤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어.’
살아 숨 쉬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들린다.
어떨 땐 바이올린이 피아노의 화음에 살짝 깃들어 내성부를 이루고, 어떨 땐 트롬본이 밑을 떠받친다.
모든 것을 총괄하는 지휘자처럼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한 대로 협주곡을 연주해 나갔다.
‘예전에 했던 것보다 훨씬 나아졌네.’
이전부터 난 피아노로 바이올린이나 관악기 등 여러 악기의 음색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었고, 또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 내 연습이나 연주를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그저 놀라워했었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내가 이룬 것들을 상당 부분 따라온 상태였다.
플루트가 다시 울고, 팀파니와 피아노가 빠른 템포로 주제를 반복한다.
알캉의 단조 에튀드 8번은 다채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 화음만이 아니라 조성 역시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조표를 그대로 둔 채 변화하는 조성을 이렇게 또렷하게 들리게 하는 건 작곡가로서 알캉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아나스타샤가 그 유산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리를 분리해서 들을 수 있는 나는 그녀가 얼마나 깊게 이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진지하게 피아노 협주곡을 구현하려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몇 번이나 변화하는 음들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리듬이 들쑥날쑥 빠르게 바뀌기도 했다.
단순히 피아노 한 대로 연주하는 것처럼 쳤다면 아마 이상한 음악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하나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분명하게 엮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단순히 따라 치는 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독자적인 음악성은 이 곡의 모든 것을 충분히 포용하고 남을 정도로 넓었다.
10분 정도 들어 본 뒤 나는 그녀가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고 아마 최고의 평가를 받아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네.’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옆을 돌아보자 대기실 안의 직원들도 넋을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전부 음악계 관계자로서 알캉의 음악이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나스타샤는 분에 넘치는 음악을 애써 연주하는 것도 아니었다.
테크닉적으로만 보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숙련되어 있는 연주자로서 거침없이 건반 위를 구르고 뛰어넘고 있었고, 협주곡을 피아노 한 대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음악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보이는 특유의 강압적인 인상이 조금 옅어진 덕분인지 더더욱 이 음악은 사람들을 매료하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직원 중 한 명이 날 바라보고는 조금 당황한 듯한 눈빛을 했다.
자신이 이렇게 침착함을 잃을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난 가볍게 웃어 주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금은 아나스타샤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정말 어려운 음악이야.’
오케스트라가 포함된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마무리되고 그다음으로는 피아노의 독주가 이어졌다.
애초에 피아노 혼자 연주하는 곡인데 협주와 독주가 나누어진다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지만, 실제로 듣기에도 충분히 그렇게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그만큼 잘 해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랑스러운 사장조의 선율이 흘러가고 다시 한번 오케스트라가 등장해선 몇 번이나 음악을 장식하다가 점점 복잡해졌다.
첫 주제에서 주로 드러났던 피아노 솔로가 초기 낭만주의의 부드러운 음형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번엔 보다 테크닉을 중시하는 후기 낭만주의의 화려함이 느껴졌다.
‘이미 에튀드라는 수준은 한참 전에 넘어선 것 같은데.’
보통 에튀드라 하면 짧은 시간 사이에 피아노의 테크닉을 연습할 수 있는 곡을 뜻한다.
그런데 알캉은 한 곡에 엄청나게 많은 시대의 흐름과 피아노 테크닉을 모두 집어넣었다.
이미 길이부터가 30분에 가까운 곡이니 애시당초 다른 규모의 곡이라 할 수 있었다.
체력과 정신력 모두 어마어마하게 소모되는 곡이다.
게다가 앞서 연주한 곡들도 있어 아나스타샤는 이미 상당히 지쳤는지 약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음악 역시 촛불이 일렁이듯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자가 정말로 지치면 이런 연주조차 불가능하다.
지친 것 같은 기색을 청중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건 곧 의도된 연기란 뜻이다.
바닥에서부터 웅웅거리며 울리던 음악은 점점 속도와 크기를 키워 나가더니 불쑥 튀어 올랐다.
‘별로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네.’
홀을 무너뜨려 버릴 것 같은 화음의 도약과 4도 트릴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리스트의 에튀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흐름이긴 하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듣기만 해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테크닉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던 알캉의 에튀드는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음악은 이어서 빠른 스케일로 세 번 무대를 휩쓸고 다니더니 다시 수면 위로 날아올랐다.
청중들을 모두 멍하게 만든 기적과도 같은 테크닉과 표현력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피아노 솔로로 되돌아갔다.
‘솔로도 쉽지 않아…….’
다시 감미로운 사운드가 이어지지만 조금 전의 그 폭발적인 사운드가 겹쳐 들려서 도저히 쉽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섞이는 알캉 특유의 테크닉은 되레 잘못 컨트롤하면 확 튀기 마련이라서 이 서정적인 테마에 자연스럽게 맞추기 더욱 어렵게만 들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천천히 솔로를 이어 나갔다.
이전까지의 테마를 천천히 반복하던 솔로는 일정 지점에서 사랑스러운 소리를 멈추며 다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이어 오케스트라 드럼인 탐부로tamburo 드럼처럼 무시무시하게 빠른 리듬이 이어졌다.
피아노를 타악기로 사용하려는 표현이었다.
본래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이렇게 타악기와 같은 주법으로 다루는 것으론 프로코피예프가 유명했지만, 19세기 초의 사람인 알캉이 시대적으론 더 빠르다고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것이다.
마치 드럼의 스네어를 연타하는 것 같은 소리는 하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피아노 건반으로 균일하게 스네어 소리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 위에 병합되는 다른 오케스트라 소리들은 완벽하게 연주해야만 했다.
나도 여러 협주곡을 다루어 보았지만 이런 사운드를 들어 본 적은 없어서 멍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200년이나 된 음악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다채로운 음악이 화려하게 이어졌다.
아나스타샤도 과시적인 면모를 감추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보였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떠밀려 펼치는 퍼포먼스가 아닌 음악의 흐름에 편승하여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역동성이었다.
약간의 거리낌도 없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에튀드답게 다양한 테크닉으로 30분가량 이어진 음악은 홀을 울리는 거대한 화음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연주만큼이나 큰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브라바.}
대기실의 직원들도 그 박수에 동참했다.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다. 평가가 어떻게 될지는 밤에 결과를 받아 봐야 알 일이겠지만, 연주자로서의 아나스타샤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난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선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