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04화 (1,204/1,277)

##  1204화

복도로 나오고 나서도 박수 소리는 뒤편에서 벽을 뚫고 계속 들려왔다. 아나스타샤는 그 박수를 만끽할 자격이 있었다.

난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대기실에 그냥 앉아 있으면 아나스타샤가 오겠지만,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건 그녀가 무대 후의 여운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녀 스스로도 많은 생각이 들겠지. 괜한 영향을 더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많이 간섭하긴 했네.’

인터미션 사이 불쑥 찾아와선 언성을 높여 다투기까지 했으니 이제 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할 순 없었다.

정말 아나스타샤가 잘 해냈기에 망정이지…… 만약 나 때문에 더욱 잘못되었다면 난 나대로 거기에 대한 책임이라도 져야 할 상황이었다.

연주를 한 다음 기권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이 말을 그 아이 앞에서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럴 각오는 되어 있었다.

급히 오긴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만약 내 행동으로 더욱 큰 문제가 생겼을 때 해야 할 일 역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기권한다고 해서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아나스타샤가 그런 걸 바라지도 않을 테고.

“그랬다간 난리가 나겠지…….”

아나스타샤가 무대 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연발하며 탈락하고, 내일 내가 무대를 마친 후 기권했다면 아마 뉴스에 우리 이야기가 꽤 화려하게 실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모스크바에선 더욱 시끄러웠을 테고 난 사람들에게 적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좀 먹었겠지.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연주자의 모든 행동은 그대로 사람들의 뇌리와 기록에 남는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한번 떨어진 신뢰를 다시 회복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변덕스러운 연주자라는 꼬리표라도 붙는 날엔…… 아마 앞으로 활동에 꽤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다행이야.”

협주곡에 이어 본래 실력을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못하고 망쳐 버리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하던 나는 정말 그렇게 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샤는 독주곡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드러내며 이전의 부족함을 만회했다.

마지막 알캉의 곡을 마무리 지으면서 보여 준 퍼포먼스와 기세에서 난 그녀가 충분히 만족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 이제 결과는 심사 위원들에게 맡겨야 할 일이다.

‘완전히 빠져 버린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냉철한 시각으로 보자면 아나스타샤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멋대로 연주한 건 정말 치명적이었다.

그 뒤에 연주한 독주곡들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났지만, 평가 점수라는 건 상한이 있기 때문에 아마 그대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아나스타샤라는 연주자를 강하게 밀어줄 수 있는 심사 위원의 존재였다.

총 11명이나 되니 아마 그중 몇 명은 분명히 아나스타샤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지만…… 심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심사 위원들에게 냉철하지 않은 판정을 바란다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었지만, 지금 난 어쩌면 정말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느끼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알캉의 마이너 에튀드 8번은 피아노 연주자들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스마트폰으로 다시 심사 위원들의 프로필을 살피며 특히 낭만 시대의 음악과 테크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나스타샤의 결승 진출 가능성 여부를 따져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스마트폰에 신경이 팔려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막 문을 열고 나온 아나스타샤도 날 보고는 놀랐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놀래라……. 어디 갔나 했더니…….”

“아하하하…….”

난 어색하게 웃으며 몇 걸음 물러났다.

연주를 마치고 땀에 젖은 아나스타샤는 정말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잘했다고 칭찬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를 무대로 올려 보내기 전 했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묘한 기분에 휩싸인 나는 쭈뼛거리면서 단어와 문장을 골랐다.

그렇게 바보같이 구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던 게 대기실 앞을 말하는 거였니?”

“예? 아…… 그랬죠?”

“뭐야? 애매하게. 그리고 왜 다시 경어로 돌아왔니?”

난 움찔했다. 그녀가 바로 그걸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아나스타샤에게 말을 놓았던 건 그녀와의 거리감을 좁히고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걸 이유라고 말하자니 평소 경어를 고수하는 내 태도를 설명하기가 심히 곤란했다.

사실 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기조하에 만들어진 고집이었지만…… 사실 그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종종 변덕을 부려 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난 내가 그런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건 지금 확 편하게 할 상황은 아니란 것이었다. 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이게 자연스럽지 않나요?”

“에휴…… 기대도 안 했어.”

작정하고 캐물었으면 힘들었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차차 두고 보자는 듯 일단 제쳐 놓았다.

“아무튼 그래서……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냐니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녀는 손뼉을 짝짝 치며 다시 물었다.

“모차르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찾아와선 똑바로 치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똑바로 쳤는데 어떻냐고.”

“제, 제가 언제 그런 단순한 이유로…….”

“이제 와서 아니라는 거야?”

난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그녀가 음악을 컨트롤하는 능력과 주변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이상하리만치 떨어져 있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단지 시간이 없어서 일단 무조건 무대에 세우고 보자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아나스타샤의 입장에선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하려면 지금부터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 얼마나?”

아나스타샤가 슬금슬금 다가오며 날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똑바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하든 간에 내가 할 말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알캉 연주자는 굉장히 적으니까.

“현시대에 아나스타샤만큼 알캉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지 않을까요?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나 잭 기븐스 같은 분들처럼…….”

“갑자기 너무 거장들이 튀어나오니까 부담스러워! 그런 거 말고 네 생각은 어떤데?”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니 내가 조금 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었다.

난 신중하게 말들을 골라 보고는 지금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해 주기로 정했다.

“아마 아나스타샤가 본래 준비했던 곡은 이보다 더 강렬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더 무겁고…… 날카로웠겠죠.”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내가 그녀의 음악을 단지 겉 표면에 깔리는 것만 들은 것이 아니라 꽤 깊게 파악했다는 걸 느낀 듯한 눈치였다.

조용히 듣던 그녀가 물었다.

“지금은 무뎌졌다는 소리네?”

“그럴지도요.”

“역시 네 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구나.”

인터미션 때만 하더라도 연주자는 자신이니까 무작정 우기고 보겠다고 하던 아나스타샤는 결국 별수 없다는 듯 시원하게 인정했다.

난 혹여나 그녀가 오해할까 싶어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무뎌진 게 이번엔 더 좋았다고 생각해요. 연주자로서의 깊이가 느껴지는 음악이었어요.”

난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그 음악을 갈고닦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다.

바람을 담은 음악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지만 약간 무뎌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음악들도 있다.

너무 목적에 얽매이다 보면 연주자가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경우도 잦은데, 거기서 조금 풀려나야만 보이는 깊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 역시 무언가 깨달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내가 쉽게 이야기하지 않고 고민하는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경솔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고도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내가 말없이 가만히 기다리자 이윽고 확인하듯 물었다.

“내가 알캉을 연습했던 것…… 다 에르네스트와 대결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 알고 있지?”

아나스타샤의 솔직함에 조금 놀랐지만 난 바로 대답했다.

“예.”

“그 애를 상대하려면 일반적인 곡으론 어림도 없거든. 그래서 준비했던 건데…….”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 덕분에 그사이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정말 일취월장했다.

단기간에 이룬 성과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에르네스트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는 착잡하게 이어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다쳐 버렸고, 난 졸지에 칼만 여러 자루 가진 이상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

하지만 상대를 잃고도 난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어. 분명 어딘가 쓸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나 역시 피아노를 망치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나라도 비슷했을 것 같다. 음악에 집착하는 건 모든 피아니스트의 본능과도 같았다.

“그렇게 찾은 장소가 이 콩쿠르였는데…… 마지막에 조금 혼란스럽더라고.”

“…….”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인터미션 때 와서 정신 차리라고 해 주지 않았다면 난 독주곡들도 죄다 망쳤을 거야.”

아나스타샤는 조금 구부정하게 있던 허리를 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네가 말해 준 덕분에 목적을 흐지부지 놓더라도 내가 가진 것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많은 걸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을 느끼는 것 같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에르네스트를 정상에서 실력으로 꺾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죄책감과 허무함 등을 얼마나 느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무어라 이야기하기 전에 아나스타샤는 너무 깊게 신경 쓰진 말라는 듯 웃었다.

“그나저나, 나 파이널 갈 수 있으려나?”

“글쎄요…… 반반쯤 되지 않을까요?”

“저기, 타티아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너는 내가 갈 수 있을 거라고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니……? 우리 친구 아니야?”

갑자기 불안해지기라도 했는지 아나스타샤는 날 붙잡고 보채기 시작했다.

무대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했던 그녀가 이렇게 의욕을 내고 있다는 게 기뻐서, 난 웃으며 그녀를 조금 달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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