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7화
식사 후, 내 일정을 듣고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경험했던 리허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짧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잘 맞춰 주는 편이었거든.”
“알겠어요.”
“물론 난 망쳐 버렸지만 말이야.”
좋은 이야기가 아닌데도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납득할 건 납득하고 조금 더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난 기쁘게 웃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슬슬 가 볼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난 다시 플라지로 가야 할 때였고, 아나스타샤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네요. 미안해요.”
“아니야. 너랑 같이 있어서 훨씬 좋았어.”
지금도 아나스타샤의 얼굴엔 피로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모든 집중력을 쏟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같이 있는 쪽을 택했고, 지금은 정말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허설 잘해, 타티아나.”
“예.”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 가야 할 길로 향했다.
플라지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혼자서 잠시 산책하는 기분으로 브뤼셀의 거리를 걷고 있자니 빅토르가 소리 없이 내 옆에 따라붙었다.
난 빅토르를 돌아보며 눈인사를 건넸고 그도 작게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딱히 잡담이 오가진 않았다.
리허설을 앞두고 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그는 날 배려해 주고 있었다.
얼마 안 가 플라지에 도착하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트거가 날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이쪽으로 오시지요.”
루트거는 먼저 앞장서서 날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가 꺼내 준 음료수를 홀짝이며 잠깐 앉아 있으니 곧 그가 서류들을 몇 장 가지고 와선 읽어 보고 사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 어려울 건 없어서 빠르게 읽어 보고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몇 가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자 루트거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게 말했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시겠습니까? 오케스트라가 리허설 준비가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요.”
“아, 그렇네요.”
시간을 보니 이제 막 저녁 세션 무대가 시작되었을 시간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연주자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 중일 것이다.
새삼 연주자들만큼이나 오케스트라도 엄청난 강행군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와 리허설을 계속 번갈아 하는 건 상상만 해도 정말 힘든 일이었다.
어쨌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힘들게 리허설 준비를 할 오케스트라가 헷갈리거나 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음악을 내어 주는 것뿐이었다.
“…….”
난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 들고 협주곡 총보를 읽으면서 리허설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다른 연주자들과 협주하는 것을 들으면서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성향과 소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총보 위에 덧씌우고 가만히 내려다보면 내가 피아노를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저절로 떠오른다.
지금까지 연습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난 천천히 피아노 연주자로서 음악을 분석했다.
그렇게 연구에 빠져 있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루트거가 날 불렀다.
“오케스트라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바로 리허설 룸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딱히 기다리거나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다.
난 최대한 빨리 오케스트라와 만나서 어떤 음악을 구현해 낼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리허설 룸은 그리 크지 않았다. 딱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얼굴이 한 번에 다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남자, 지휘자인 가스파르 말레가 다가오며 악수를 청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르체노바 양.}
{안녕하세요.}
그의 악수하며 눈을 마주하자 가스파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린 지금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즈마일로바 양의 일은 그래도 잘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까 영상을 보고 왔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다 베르체노바 양이 직접 와 준 덕분이지 않겠습니까?}
가스파르는 내가 한 일을 꽤 재미있게 본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그나마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전 그저 응원했을 뿐인걸요.}
{하하하, 제가 러시아어를 몰라서 두 분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베르체노바 양이 한 행동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말이죠.}
가스파르는 사람 좋게 웃었다. 아무래도 날 꽤 고평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음악을 서로 맞춰 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평가를 받는 건 살짝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가스파르는 날 부담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지휘봉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튼…… 시간도 부족하니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난 시간을 확인하고 이어 문 근처에 있는 직원도 보았다.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 있긴 하지만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1시간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리허설하기엔 정말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사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때문에 난 가스파르가 바로 리허설을 시작하자고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그는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즈마일로바 양의 마지막 곡을 들으면서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 곡은 피아노만으로 협주곡을 표현하고자 하는 곡이라 했었죠?}
알캉의 단조 에튀드 8번. 그 부제는 피아노 솔로를 위한 협주곡이었다.
그 악보에 쓰여 있는 지시들을 보면 정말 독주곡 악보가 아니라 협주곡 악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맞아요.}
{정말 훌륭한 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연주를 듣고 나서야 전 이즈마일로바 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 전에 그걸 미리 들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제야 난 가스파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이 있습니다. 혹시 베르체노바 양도 가능하다면 피아노 솔로로 하는 협주곡을 하나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피아노 연주자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파트야말로 가장 원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것에 가깝겠지.
그러니 가스파르는 그것을 들려준다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알아서 맞춰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범한 발상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에게도 고유한 소리가 있는데 그걸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피아노가 바라는 대로 이끈다고 제대로 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확인했다.
{제가 어떤 오케스트라를 원하는지 직접 말해 보라는 의미인가요?}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도 안 남았죠. 지금까진 그사이 최대한 많은 부분을 맞춰 보면서 합의점을 찾아 갔었지만…… 아예 방법을 조금 바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게 하는 건…….}
{아, 그건 아닙니다.}
각 참가자들마다 리허설 방식이 다르다면 뭔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자 가스파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내일 무대에 서기 위해 앞서 리허설을 한 두 분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으니까요.}
모든 참가자들이 마지막 날 한 번에 심사를 받는다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 준결승은 하루마다 합격자가 발표된다.
그러니 내일 있을 4명의 참가자에게 모두 같은 리허설 방식을 제안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안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연주자 각자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중 아무도 제 제안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르체노바 양이라면 어쩐지 수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앞선 두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리허설을 했나 보다.
피아노 솔로로 협주곡을 표현하는 곡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갑자기 해 보라고 해서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연습해 놓는 연주자는 드물겠지.
난 레퍼토리 중에 지금 적당히 꺼낼 만한 곡이 있나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나 역시 조금 고민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솔로를 위한 협주곡을 따로 준비한 건 없어요. 알고 있는 곡은 몇 곡 있지만 지금 보여 드릴 만한 건 아니네요.}
{음…… 역시 제가 너무 무리한 제안을…….}
{하지만 굳이 다른 걸로 보여 드리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어떤 오케스트라를 원하는지 피아노로 직접 말해 보라는 가스파르의 제안은 꽤 흥미롭게 들렸다.
그리고 지금 그 제안이 가진 목적을 생각해 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으로 해 볼게요. 잠시만요.}
난 태블릿 컴퓨터에 다시 총보를 띄워 놓고는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단순한 복습이 아니라 피아노 솔로로 편곡해야만 했다.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시 분해해서 짜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난 거의 즉흥적으로 어떤 소리를 살려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했었던 적이 있지…….’
재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할 때 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혼자서 쳤던 적이 있었다.
피아노가 미리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이해하고 그걸 통합한 협주곡을 그리고 있다면 그걸 연주로 들려주는 건 확실한 의사 표현이 된다.
내가 대충 이 협주곡을 솔로로 어떻게 쳐야 할지 감을 잡는 데엔 2분 정도 걸렸다.
준비를 마친 나는 고개를 들고 가스파르를 바라보았다.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가스파르의 시선에서 기대감과 희열이 느껴졌다. 난 그를 상당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피아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