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08화 (1,208/1,277)

##  1208화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 마르셀 하멜은 평소 불만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1년에 한 번씩 콩쿠르에 불려와 많은 연주자와 무대에서 합을 맞추는 혹독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그것이 영광이라 생각하면 생각했지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귀찮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가지고 있는 긍지와 자부심이 강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휘자인 가스파르 말레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심 때문이기도 했다.

가스파르는 실력도 좋고 인간적으로도 훌륭했다.

유연하게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도 항상 정도를 지키고 클래시컬함을 잃지 않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뭇 단원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지휘자를 만나 보았기에 가스파르만 한 지휘자를 만나는 건 정말 어렵다는 걸 마르셀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와 함께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불만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

세미파이널이 5일차에 접어들면서 이제 남은 일정은 리허설 4번과 연주 8번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하면 무난하게 끝날 일정이었다.

그런데 이즈마일로바라는 러시아에서 온 피아니스트와 연주를 한 뒤 가스파르는 갑자기 리허설에 변화를 가했다.

그건 바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어떻게 할지 직접적으로 표현해 보라고 피아니스트에게 제안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그럴싸한 소리처럼 들린다. 주역은 피아니스트이니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해 주면 오케스트라로서도 거기에 맞춰서 따라 주기 편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 가스파르가 잘 알아야만 했다.

‘모두 다 난처해하기만 할 뿐이야.’

일단 시간이 없다.

딱 1시간이 주어지는 정신 나간 리허설 일정에서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1분 1초도 아까워하며 긴장한 상태로 리허설 룸으로 들어온다.

오케스트라와 어떻게든 잘 조화를 이루어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일 때도 있는데, 일단 혼자서 알아서 해 보라는 듯 툭 던져 놓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애초에 리스트나 알캉처럼 피아노를 초월한 무언가를 구현하려고 애쓴 작곡가들의 이념을 따라가려는 피아니스트는 무척 드물었다.

협주곡의 바이올린 소리를 피아노로 옮겨 온다고 해도 그건 그저 카피한 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만약 피아노 솔로 협주곡 등을 연주한다고 해도 제대로 원하는 것을 반영해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만약 실패한다면 귀중한 리허설 시간만 날리게 되는 것이었다.

일생의 기로에 선 피아니스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앞서 오전에 리허설 한 두 피아니스트 모두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제발 고집 좀 접지.’

마르셀이 정말 화나는 것은 그 피아니스트들이 대범하게 굴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스파르가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봐 온 자신이 봐도 정말 지휘자가 어디 이상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기 때문에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마르셀은 답답한 마음으로 한숨만 푹푹 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즈마일로바와의 연주가 상당히 곤란했었기 때문이다.

이즈마일로바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정도는 그야말로 눈 감고도 칠 수 있을 것 같은 실력이었는데, 리허설 시간 부족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인지 그만 굉장히 중구난방인 연주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협주곡을 망친 이즈마일로바는 피아노만으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해 냈다.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은 가스파르는 아예 리허설에서 가능한 피아니스트들에게 위의 제안을 요구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물론 마지막 날 묶인 4명의 피아니스트에게만 하는 것이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일단 2명에게 거절당한 것만으로도 가스파르의 발상은 터무니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증명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전 통보 없이 피아니스트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으로 해 볼게요. 잠시만요.}

‘지금 한다고?’

그런데 저녁 세션 리허설 피아니스트인 베르체노바는 처음으로 가스파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놀란 건 마르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 사이에도 놀란 기색이 퍼지고 있었다.

단원들 모두 베르체노바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인 이즈마일로바가 그야말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구 다그치고 일으켜 세웠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 본 경험이 많았기에 베르체노바 같은 사람은 정말 흔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단원들은 베르체노바와 무대에 서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잘해 주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건 그저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보여 주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껏 달아 있는 단원들을 둔 채 베르체노바는 태블릿 컴퓨터를 들고 악보를 읽고 있었다.

운 좋게 마르셀은 근처에 있어서 그 화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협주곡의 피아노 파트를 위한 악보가 아니라 총보 그 자체였다.

보통 기악 연주자들은 각자 맡은 파트가 아닌 총보를 읽는 것조차 할 줄 모른다. 그건 지휘자나 작곡가가 봐야 할 부분이다.

옆자리 동료가 작게 속삭였다.

『마르셀, 저거 괜찮겠어?』

『모르지 나도.』

지금도 귀중한 시간은 흘러간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직원은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라도 1시간이 지나면 직원은 반드시 이 리허설을 중단시킬 것이다.

마르셀은 베르체노바보다 자신이 더 초조해짐을 느꼈다. 우습게도 요청을 했던 가스파르마저 초조한지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 베르체노바가 무언가 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녀는 지휘자의 제안에 따랐다가 손해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며 마르셀은 베르체노바를 지켜보았다.

마치 20분과도 같은 2분이 흘러갔을 때, 베르체노바는 고개를 들더니 피아노로 향했다.

보면대에 태블릿 컴퓨터를 놓고 화면을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해 보면서 불편하지 않은지 확인한 그녀는 살짝 어깨를 풀더니 오케스트라 쪽을 돌아보았다.

{기술적으로 배음은 고려하지 않고 연주할 테니 그냥 어떤 느낌인지만 들어 주세요.}

별 기대 하지 않는다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심각한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서 한 번이라도 더 오케스트라와 맞춰 봐도 모자를 상황인데 베르체노바는 그냥 협주곡을 처음부터 혼자 연주하려 하고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구경만 해야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마르셀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끝까지 들을 이유는 없었다. 5분 정도 들어 주고 나서도 가스파르가 나서지 않는다면 대충 알겠으니 그쯤 하는 게 어떻겠냐고 끊을 생각이었다.

무례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베르체노바에게 정말 도움이 되려면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렇게 마르셀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팔짱을 꼈다.

‘뭐야……?’

베르체노바가 손을 움직인 지 3초 만에 마르셀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대부분 오케스트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 연주할 수 있는 건 피아노뿐. 그러니 베르체노바가 할 수 있는 건 오케스트라 파트를 간편하게 반주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가스파르가 바라는 만큼 그녀가 잘 해낸다면 적당한 리듬과 뉘앙스를 가미해서 ‘만약 오케스트라의 서두를 피아노로 친다면 이러이러한 느낌이 될 것 같다’ 정도만 전달할 수 있다 해도 베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후엔 베르체노바의 주문을 오케스트라가 잘 해석해서 연주해 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베르체노바의 연주는 마르셀이 상상할 수 있었던 수준을 넘어섰다.

‘진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데?’

감미롭게 늘어지는 현악기들의 어우러짐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그 위를 오보에와 플루트가 장식했다. 정확한 사운드와 리듬 그리고 파트 분배였다.

한 소절을 듣자마자 마르셀은 바이올린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베르체노바가 피아노로 바꾸어 낸 바이올린 소리에선 단지 음높이뿐만이 아니라 주법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갑자기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베르체노바가 다루는 피아노는 다른 악기가 그 무엇이든 집어삼키고 자신의 배 속에 넣고는 그 소리를 뽑아냈다.

지금까지 마르셀은 여러 협연자와 합을 맞추어 왔지만 이렇게까지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영역에 발을 들인 건 사실이었지만 흙발로 무자비하게 들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체노바의 연주는 정교한 레퍼런스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작정 자신의 사운드로 흔들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로 현명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바이올린이나 다른 기악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기교의 끝을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그건 애정과 존중의 표시였다.

얼마나 실력이 깊어야 이런 연주가 가능할지 마르셀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이건…….’

점점 더 많은 악기가 모여들자 피아니스트가 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그러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 때 지휘봉을 여러 자루 휘두르지 않고 단 하나의 지휘봉으로 정확하게 필요한 부분만을 캐치하여 지시하듯 베르체노바 역시 치밀한 편곡을 기반으로 필요한 사운드만 포집하여 그 부피를 키워 나갔다.

마르셀은 지금 듣고 있는 것이 기적의 산물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한 달 전부터 연습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을 퍼포먼스다.

하지만 베르체노바는 그것을 즉흥적으로 짜 맞추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모든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한곳에 모았다.

2분가량 넋을 놓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이어 주제를 반복하는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연주했던 것도 피아노였잖아?’

서두를 들으면서 바이올린을 어떻게 켜야 할지만 생각했던 마르셀은 그 모든 것이 피아노였다는 걸 깜빡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충격이 조금 가실 때쯤 베르체노바는 이번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주를 구현해 냈다.

마르셀은 손을 놓고 멍하니 있는 것이 어색해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바이올린을 들고 저 연주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에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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