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9화
협주곡을 솔로로 총보 연주하는 건 지휘자나 작곡가가 종종 하는 일이다.
그것을 피아노 연주자가 따라 하는 건 사실 기술적으론 그리 쓸모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혼자 연습하는 데엔 방해가 된다. 오케스트라 파트에 신경도 팔리고 손가락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협주곡을 혼자서 총체적으로 연습하고 싶다면 마이너스 오케스트라 음원을 구해서 맞춰 보며 하거나 반주자를 구해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낫다.
또한 적당히 연주할 수 있게 되더라도 공연자로서 연주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기본적으로 협주를 근간으로 작곡된 곡은 모든 구조가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악기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구분지어 놓은 그 시스템을 양손으로 꽉 잡고는 우그러뜨려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 오케스트라를 대동하여 협연하는 것보다 음악적으로 나을 리 없었다.
연주자의 편곡 실력이나 테크닉을 앞세우거나 어떤 특수한 상황인 무대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이런 연주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같은 시간 동안 익혀야 할 곡들을 따질 필요성이 있는 기악 연주자들 입장에선 자기 파트만 확실하게 해내면 되는 협주곡을 두고 굳이 총보를 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파트 부분은 오선을 봐도 읽기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내가 종종 총보를 보면서 협주곡을 익히는 건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음악을 바라보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건 음악이니까.’
협주곡은 귀를 틀어막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멋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난 그것을 구세프 선생님에게 총보 독법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수십 개의 악기가 동시에 울면서 만들어 내는 선율과 리듬은 홀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지만 거기엔 거대한 흐름이 있다.
모든 소리의 무게를 합쳐 놓았을 때의 무게 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항해에 나설 때 북극성의 위치를 알아야 하듯 피아노 연주자는 바로 그 무게 중심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유연하게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하니 손에 쥐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균형을 틀었을 때도 다시 언제든 돌아올 기준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는 데에 가장 좋은 건 총보를 보면서 협주곡을 익히는 것이었다.
음악을 다시 배우면서 그 사실을 습관화시켰던 나는 항상 음악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협주곡을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 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 머릿속에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였다.
‘이 부분은 이렇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내 머릿속에 형태를 그리고 있었고, 난 그것을 현실에 옮겨 내는 것에 몰두했다.
그게 피아노 파트라면 이제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하나로 일치된 심상과 기술이 그대로 피아노를 타고 구현되었으니까.
하지만 오케스트라 파트의 경우엔 내 바람을 섞어 한 번 편곡된 소리로 대체할 수밖에 없어서 약간 답답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내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다.
모처럼 가스파르 지휘자가 기회를 주기도 했다.
물론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 단 한 번 주어진 아주 긴박한 기회였지만 이 정도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내일 무대에 서서 청중들과 심사 위원들을 사로잡는 것도 어려워지리라.
난 바로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오케스트라를 같은 편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연주에 임했다.
‘전달되었을까.’
피아노 파트는 최대한 현장감을 살리려 애썼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제대로 이 자리에 존재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연주로 보이게끔 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손가락을 배분하느라 반대로 내 소리가 듬성듬성 비어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최대한 어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했다.
사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그냥 연주하는 것보다 족히 몇 배는 더 힘겨운 테크닉이 들어갔다.
오케스트라 파트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 왔던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상상 속에서 가공하여 최고로 완성된 형태로 뽑아냈다.
이것 역시 피아노를 거치니 열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난 지금 내가 제대로 생각한 바를 전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 증거로 리허설 룸 안 단원들의 시선이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혹시 실망감 같은 종류였다면 나도 더 연주를 이어 나가지 못했겠지만, 그들의 시선에선 내 연주를 끝까지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과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의식하는 급박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나는 전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히 1악장만 치고 그다음부턴 오케스트라에게 전적으로 맡겨도 되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오케스트라에게 주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설프게 끊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는 것이 나았다.
난 안단테andante의 서정적인 2악장에서도 오케스트라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3악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연주할 상황은 아니었다.
“…….”
『어?』
{뭐야?}
『□ □□□□ □□?』
내가 3악장을 3분의 1정도 남겨 둔 지점에서 연주를 중단하자 여기저기서 깜짝 놀라는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왜 멈추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난 피아노 의자 옆으로 비스듬하게 앉으며 오케스트라를 돌아보았다. 가스파르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실수도 아닌데 왜 중단했습니까? 베르체노바 양.}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요. 적어도 한 번쯤은 처음부터 끝까지 리허설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제야 가스파르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정확하게 곡을 한 번 맞춰 볼 정도의 시간밖에 없다는 것을 봤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그는 내가 한 번도 쉬지 않고 3악장까지 연주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난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연주를 멈춘 이유는 시간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만큼은 여러분과 같이 꾸려 나가고 싶었어요.}
가스파르가 제안한 것처럼 나 역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무대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을 연주할 때 이 베테랑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침착하게 도와주었는지 난 확실하게 보았다.
그나마 아나스타샤가 음악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이 오케스트라 덕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오케스트라의 실력에 조금 투자해 보고 싶어졌다.
1악장에서부터 함께 이어 나간 음악의 흐름을 과연 마지막에 어떻게 표현해 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머릿속엔 이 오케스트라의 완전한 피날레가 상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들이 만드는 현실이 그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가스파르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지휘봉을 쥔 그가 일어서자마자 단원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인간도 조율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바로 그럴 것이다.
가스파르는 천천히 모든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사이에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 중이라는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단원들의 의견을 총합한 지휘자는 다시 내게 눈을 돌렸다.
{좋은 해석…… 좋은 연주.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안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완벽한 총보 연주는…… 정말 들어 본 적이 없군요. 혹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지만…….}
가스파르는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리더니 지휘봉을 흔들며 피식 웃었다.
{당장은 베르체노바 양의 기대에 저희가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요.}
적어도 가스파르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내가 조성하려 하는 음악의 흐름에 따라 주려 하는 것이다.
걱정이 된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눈빛에선 만족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맞춰 드려야겠죠. 자, 시간도 별로 없으니 바로 시작해 봅시다.}
말을 맺자마자 가스파르는 곧장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난 살짝 당황했다. 일단 2분 정도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이어지니 내가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데 오케스트라는 서로 말 한마디 나눠 보지 않고 바로 연주를 시작해서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스파르의 동작만을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은 바로 각자의 악기를 들었다.
리허설 시간을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기 위해 모든 악기는 이미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상태였다.
가스파르가 천천히 팔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연주를 준비하려고 도로 피아노 쪽으로 앉으려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완연한 음악이었다. 바로 내가 바라고 상상하던 그것.
마치 내 머릿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음악에 놀라서 한동안 난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가스파르의 제안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응했던 것뿐이고, 내 바람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서 조금이라도 잘되면 좋겠다고 바랐을 뿐인데……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스파르도 자신의 단원들의 음악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내 음악을 들어 보자는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기분 좋은 뜨거움이 전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건 감격이었다. 협연자로서 이런 호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난 천천히 피아노를 바라보고 앉아선 들려오는 음악과 머릿속 음악을 일치시켰다.
자연스레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랐고 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워낙 만족스러운 연주를 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잘 배분해야만 했다.
수면 시간까지 따지면 남은 시간은 12시간도 채 안 되고, 지금은 협주곡뿐만 아니라 지정된 독주곡 프로그램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집중하며 밤늦게까지 연습한 나는 기다리던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집중력이 점점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콩쿠르 중계를 켰다.
거기에선 막 오늘자 파이널 라운드 진출자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중계를 지켜보는 사이엔 내일 쳐야 할 곡들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난 양손을 모으고 숨까지 참으며 결과 발표를 확인했다.
-{러시아,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헉…….”
난 참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눈 가까이했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했다.
오늘은 파이널 진출자가 4명의 참가자 중 3명이나 되었다. 어떤 기준을 거쳤는지, 그중 아나스타샤는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마지막 무대까지 갔다는 것에 난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환희에 차서 중계를 끄고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이미 통화 중이라는 음성만 돌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연락 중일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정말 마주해 봐야 알 일이 많구나 생각하며 난 그녀에게 짧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니 밤하늘의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어쩐지 내일 있을 내 무대를 잘 해낼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