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0화
긴장할 수밖에 없는 날이라 혹시 꿈이라도 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알람도 햇빛도 새 소리도 없이 눈을 뜬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나선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
“…….”
허리를 펴고는 습관적으로 온몸을 체크했다.
잠든 시간이 조금 늦긴 했지만 그사이 푹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전신의 컨디션은 매우 훌륭했다.
다리를 스트레칭하면서 눈은 베개 위에 둔 스마트폰에 두었다.
‘역시.’
인터넷에선 준결승 5일차 결과에 대한 기사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결승 진출자인 알레한드로 페테르손과 시라이시 타츠야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이름과 사진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보였다.
특히 아나스타샤가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내가 그녀의 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뉴스에선 협주곡에서 미달점을 받았으나 알캉을 휘둘러 압도적인 점수를 얻어 낸 아나스타샤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드라마가 필요한 기자들에게 아나스타샤의 무대는 그야말로 특종이 될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기자들만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이 콩쿠르의 모든 연주와 기록은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뭇 클래식 관계자들에게 이런 신선한 연주자의 출연은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기분 좋게 기사들을 훑어 보던 나는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 통화가 될지도 모르니까.
“음…….”
침대맡에 걸터앉은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축하 등으로 할 말은 많았지만 뭔가 상투적인 멘트는 하고 싶지 않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살짝 고민하던 중 전화가 연결되었다. 난 웃으며 물었다.
“바쁘죠? 아나스타샤.”
-아니! 완전 괜찮아. 아직 시간 넉넉하고.
분명 무언가 하다가 급하게 대충 정리하고 전화를 받은 듯한 음성이 들렸다. 어쩌면 엄청 바쁜 건지도 모르겠다.
난 길게 끌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식상한 축하 등으로 화두를 던졌다.
파이널리스트가 된 그녀를 칭찬해 주고 덧붙여 오늘 있는 내 무대에 대한 결의 같은 것도 가볍게 이야기하고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적당히 내 이야기를 받아 주다 말고 돌연 목소리를 조금 더 작게 했다.
전화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그녀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협주곡 치고 나서 말이야.
일부러 그 이야기는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 쪽에서 먼저 꺼내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차피 결과가 좋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농담조로 웃었다.
-내일 아침이면 모스크바로 돌아갈 짐을 싸고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후후, 그런데 뮤직 샤펠로 갈 짐을 싸고 계신가요?”
-그러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중요한 무대에서 열심히 준비한 곡의 컨트롤이 잘되지 않아 애먹는다면 정말 별생각이 다 들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약간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르시긴요. 목표가 거기에 있는데.”
콩쿠르에 참가한 이상 모든 연주자의 목표는 하나로 고정된다.
아나스타샤도 가까스로 멘털을 붙잡고 그 목표를 다시 일깨웠기에 지금 이 결과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낮게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야. 정말로 몰랐어. 사실 이쯤이 한계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는 말, 그때 충동적으로 한 게 아니…….
“아나스타샤. 이제 파이널리스트이시잖아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난 혹여나 그녀가 제 활약을 하지 못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 싶어서 그녀의 말을 얼른 잘랐다.
이미 지나간 곡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돌아간 뒤 그 미숙함을 다시 정비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긴장될 정신에 다른 압력을 더 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내 걱정 같은 건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네 말대로 파이널리스트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
“예?”
-이렇게 되니 솔직히 기분은 좋아.
어찌 되었든 잘되었다는 의미일까? 나 역시 그녀가 좋다면 기뻤다.
“다행이에요.”
-그래, 다행이지. 솔직히 이게 그림이 되잖니?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에서 온 두 피아니스트가 나란히 파이널리스트에 등극! 이 얼마나 멋진 이야기니?
“아하하…… 저기, 전 아직 연주 전인데요…….”
아나스타샤의 바람은 나 역시 바라는 것이지만…… 난 이런 농담도 가볍게 맡아 놓은 것처럼 말할 수 없었다.
연주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세계에 내 음악을 내놓을 준비는 언제라도 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다.
아나스타샤도 협주곡에서 난관을 겪었듯 나 역시 어떤 이유로든 간에 무대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난 앞선 무대에서 기쁨의 성령의 시선을 마무리 지을 때 연주를 하면서 직감적으로 떠올린 것과 평소 연습하던 것 사이의 간극 때문에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자신을 가늠하는 메타 인지는 곧 현실적인 강함이 된다.
난 자신감과 객관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연주자로서의 태도를 정립해 나갔다.
그러나 그런 내 고리타분한 정신론 같은 건 관심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반드시 통과해 줘야 해, 타티아나.
“노력할게요.”
-……네가 단순한 겸손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아. 넌 정말로 열심히 노력할 뿐, 통과할지 떨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적당히 농담을 나누며 이야기를 넘기려던 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날 알아도 너무나 잘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치?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난 네가 마지막 무대에 반드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운명이요?”
아나스타샤에게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한 뜬금없는 단어라 깜짝 놀랐다.
물론 난 운명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믿는 운명은 성공한 사람들이 쉽게 입에 올리는 그런 운명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난 그 운명만을 믿어 봤자 피아노 연주자로서 무언가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되레 언제든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겐 훨씬 더 자연스러운 운명적 흐름이었다.
때문에 연주자로서 여기까지 와서 노력의 결실을 내보이는 자리에선 되도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운명이란 말을 꺼내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 들어요.”
-응. 사실 나도 생각으로만 했었지 입으로 발음하는 건 처음이라서 조금 어색하네. 그런데 운명론자인 너랑 같이 있다 보니까 조금씩 보이는 게 있더라고.
“보인다고요?”
-네가 내리는 옳은 선택들이 널 올바른 운명으로 이끌 거라고.
난 멍하니 아나스타샤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네가 내 손을 놓지 않고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야.
무어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난 스스로를 운명론자라 규정지으면서도 한 번도 운명을 선하거나 밝은 느낌의 무언가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저 아나스타샤의 짧은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내 마음 한구석의 어두컴컴한 부분에 빛이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 너머로 작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어쩐지 아나스타샤 쪽에서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그녀를 만나기 꺼려졌다. 지금 내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타티아나?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레 날 불렀다. 그제야 난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바쁜 아나스타샤를 신경 쓰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그녀도 그냥 결과는 받아 봐야 안다고밖에 말할 줄 모르는 내 고지식한 생각을 깨기 위해 운명이란 단어를 빌려 썼을 것이다.
난 일부러 장난처럼 대답했다.
“반드시 파이널리스트가 되겠다고 확답을 드리면 될까요?”
-아하하하, 그래 줄래?
“그랬다가 안 되면 창피한데요.”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 복잡해지는데……. 뭐, 그건 잘 모르겠고.
여전히 미래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른다는 생각을 공고히 하고 있는 나는 농담으로 아나스타샤의 진지함을 떨쳐 보려 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사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못 박았다.
-꼭 와야 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널 기다리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렇게 할 거예요.”
-아, 창피한 이야기도 하길 잘했다. 기운이 나네.
아나스타샤는 마치 자기 자신을 칭찬하듯 말했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나 했더니…… 뮤직 샤펠에 가기 전에 긴장이 되어서 그랬던 건가? 나랑 마지막 통화가 될지도 모르니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조금은 귀엽기도 해서 난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저도 기운이 났어요.”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그럼 되었다는 듯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우린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이곳에 와서 산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째 짐이 두 배는 불어난 것 같다느니, 호스트 패밀리인 샤르베가 식구들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즐거운 이야기들이었다.
기자나 콩쿠르 직원 등 다른 사람들에겐 하긴 어려운, 우리들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 풀어놓고 나니 이제 다음 이야깃거리를 쌓기 위해 각자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슬슬 난 짐 마저 싸러 갈게. 넌?
“연습해야죠.”
-아, 그래. 컨디션은? 괜찮니?
“그걸 이제야 물어보시나요?”
황당해하며 물어보니 아나스타샤는 깜빡했다며 깔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