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11화 (1,211/1,277)

##  1211화

마지막으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 우리는 오늘 하루 각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아무튼 그럼 내일 보자!

마치 당연하게 그리될 것이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인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아나스타샤가 아직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그녀가 짐을 싸야 하는 급한 상황이 아니라거나 우리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녀도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홀가분하게 일단 연주자로서의 입장에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난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 커버를 쓸어내리며 아나스타샤의 말을 되뇌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반드시 파이널리스트가 되어 달라 청했다.

물론 그녀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난 알아서 정상을 향해 갈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강한 확신 같은 것을 원하는 듯했다.

다른 콩쿠르도 아니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같은 곳에서 12인 안에 든다는 건 사실상 그 세대의 기수들 사이에 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걸 당연하게 해낼 수 있다고 확답하려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교만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관점을 세계로 넓혀 보기 전에 당장 눈앞에 닥친 것만 보자면…… 난 24명 중 12명에 들기만 하면 된다.

더 좁힌다면 오늘 남은 연주자인 4명 중 2명이다.

목표가 좁아질수록 내 집중력도 날카로워져 간다.

‘확신을 가지려면…….’

어떤 상황이든 난 반드시 최선을 다해서 완전한 음악을 선보이려 애써 왔다.

그러나 그 완전함이란 내 개인의 만족에 기준을 두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한 발자국 더 내디뎌 완벽으로 향한다면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항상 생각해 왔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다.

난 음악을 도구로도 곧잘 사용하지만 근본적으로 음악의 신자였다. 완벽한 음악을 한다는 건 인간에겐 불가능하고 신이라도 어려운 일이겠지.

그 단단한 관념을 오늘은 조금 내려놓았다. 조금 더 건방지고 오만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음악을 내려다본다.

“…….”

어느샌가 난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지금까지 하던 연습이나 최종적으로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번 무대에서 했던 실수가 다시 한번 생각 속에서 맴돌았다.

그건 분명 실수였다. 왜냐하면 기쁨의 성령을 표현하며 그 마지막을 현을 끊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고, 그래서 실수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그 곡을 마무리했다면…… 어쩌면 완벽에 가까운 무언가를 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난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짜 맞춰 놓은 모든 음악들은 정말 아름다운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걸로 파이널리스트의 자리를 분명하게 노릴 수 있으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피아노만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끝에 딱 한 번 건반을 눌렀다.

***

점심 식사는 데보라 아주머니 그리고 클레망과 함께했다.

평소에도 식단은 훌륭했지만 오늘따라 아주머니가 더욱 특별하게 날 생각하신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행복하게 식사를 하는 사이, 클레망이 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몇 시쯤 가려고?}

{못해도 5시 정도엔…… 아니, 여유 있게 4시엔 나가야겠죠?}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내 무대는 8시에 시작한다. 준비만 된다면 언제든 그 전에만 가면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현장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일단 식사부터 충실하게 할 생각이다. 난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런 날 보며 클레망이 피식 웃었다.

{기분 좋아 보여.}

{그런가요? 맞아요. 뭔가 잘될 것 같거든요.}

{그래……. 그리고 이 점심이 마지막 점심이 되겠네.}

뭔가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난 포크를 덜컥 멈추었다. 사실 그대로였다. 내일 이 시간이면 아마 난 이 자리에 없을 테니까.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클레망이 이렇게 아쉬워하니 조금 마음이 쓰였다.

물끄러미 돌아보자 데보라 아주머니가 버럭 소리를 치셨다.

{얘는 무슨 쓸데없는 소릴!}

{아니, 맞잖아.}

클레망은 능글능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쉬워하는 건 정말이지만 그렇다고 유머를 잃고 진지해질 상황은 전혀 아니라는 걸 그도 잘 아는 것이다.

{나중에 혹시 이 근처에 오게 되면 우리 집에도 들러 줄래? 우리 엄마가 널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거든.}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요.}

{진짜? 아니, 여기 뭐 재미있는 게 있다고…….}

대체 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태도를 하는 그를 보며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한번 우리 이야기를 현실로 초점을 돌려 놓았다.

{이 녀석 말은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냥 넌…… 가서 네가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그럼 분명히 파이널리스트는 따 놓은 당상이겠지.}

그 목소리엔 약간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정말로 내가 무대에 올라서 압도적인 연주로 심사 위원 전원을 기절시키기라도 하리라 믿으시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기대하지 않으시도록 적당히 말을 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히 결과가 어찌 될진 모른다는 둥 분위기 깨는 말을 해서 아주머니의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할게요. 아주머니도 보러 와 주시나요?}

{당연하지!}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오늘을 위해 골라 놓은 드레스도 있다며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보이셨다.

데보라 아주머니도 삶에서 이 순간을 진심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정말 기대하고 있다고 환하게 웃으며 답하자 아주머니도 너무나 기뻐하셨다.

그렇게 나와 아주머니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이, 클레망은 입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나만 티켓 없어서 못 가네. 난 우리 집 식구 아니에요? 왜 나만 따돌려요, 엄마?}

{난들 네가 지금 돌아올 줄 알았겠니? 클래식에 관심 있었으면 진즉 이야기하지 그랬어.}

원래 이 집의 호스트 패밀리 계획에 클레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클레망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 목을 움츠리고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방법이 있다면 티켓을 구해 주고 싶기도 했지만…… 세미파이널 마지막 날 티켓을 구하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가 바라보자 클레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그렇게 미련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내가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클레망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엉?}

{제 마지막 연습을 모니터링해 주실 수 있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레망은 곧 내 말을 알아듣고 입을 벌렸다.

난 배시시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피아노 연주자가 연습할 때 청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굉장히 크거든요. 그런데 전 이제 브뤼셀에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요. 클레망이 해 주신다면 최대한 실제 무대처럼 연주해 볼게요.}

{잠깐만…… 그래도 돼?}

{물론이죠.}

난 무대에 강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적인 건 아니었다.

청중을 두고 하는 연습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특히 실전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 내 제안을 클레망이 받아들이기 직전에 데보라 아주머니가 급히 러시아어로 끼어들었다.

“잠깐만. 정말 괜찮겠니? 불편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괜히 저 애가 불쌍해 보여서 그럴 필요는 없단다.”

“아하하,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모든 티켓 없는 청중에게 이런 식으로 연주를 들려주는 건 어렵겠지. 시간과 상황이 잘 맞아야 하니까. 일단 운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위성도.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웃으며 난 가볍게 설명했다.

“전 아드님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거든요.”

“빚?”

“예. 어제 아드님이 정말 중요한 순간에 절 도와줬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전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었을 거예요.”

어제 아나스타샤의 인터미션 사이 클레망이 날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몇 분만 늦었더라면 난 물리적인 문제로 아예 아나스타샤를 만나지 못했을 테고 그럼 정말 모든 것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가 탈락하고, 난 실력자인 그녀의 탈락에 허탈감을 느끼며 조금 더 불안해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클레망이 내게 가 보라고 해 준 덕분에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지금 이 상황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 모두 클레망에게 빚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가 없으니 내가 대신 조금이나마 갚아 두려는 것뿐이다.

물론 비단 빚이 아니더라도 난 클레망에게 충분히 내 음악적 실제를 가까운 곳에서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것이 작은 선물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불편하거나 억지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셨는지 데보라 아주머니도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없는 사이 호스트 패밀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긴 했나 보구나.”

“훌륭하게도요.”

“그러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리시던 아주머니는 이내 클레망을 휙 돌아보셨다. 클레망은 무언가 항변하듯 양손을 들더니 프랑스어로 빠르게 말했다.

『□ □□□ □□□□ □□ □□ □□□?』

『□□ □□□ □□?』

뭔지 몰라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가만히 웃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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