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12화 (1,212/1,277)

##  1212화

티켓이 없는 클레망을 위한 1인 연주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난 어제 연주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솔로 편곡과 내 독주곡 레퍼토리들을 모두 선보였다.

내가 무대에 선 마음으로 연주에 임하는 것처럼 클레망 역시 진짜 청중인 것처럼 반응해 주었다.

곡이 끝나면 열렬한 박수와 환호가 잇따랐고, 난 미소와 묵례로 답했다.

일반 주택 연습실에서 오가는 이 과정은 꽤 재미있었다. 나도 정말 어쩔 수 없는 공연 연주자인 모양이다.

그렇게 실수 없이 연주를 마치고 나자 클레망은 의자 뒤로 축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아하하…….}

적당히 웃어넘기긴 했지만 찬사를 담은 그의 관용구는 내 생각과도 일면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려는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청중에게 전해졌다면 성공했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뭔가 감상 같은 걸 말해 주고 싶은데,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

{후후, 괜찮아요.}

클레망은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면서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난 사람의 반응이 말로만 드러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클레망은 온몸으로 자신의 감상을 충분히 말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로도 우린 잠시 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클레망은 이 이상 날 방해하지 않겠다며 연습실에서 나갔다.

나는 혼자서 연습을 조금 더 하다가 시간에 맞추어 일어났다.

‘딱히 준비할 건 없지?’

무대를 앞두고도 피아노 연주자는 자기 몸 말고는 챙길 것이 딱히 없었다. 때문에 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에만 신경 썼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가기 직전, 난 그동안 함께해 주었던 피아노를 옆에서 슬며시 어루만졌다.

“고마웠어.”

아마 지금 이후로 이 피아노로 연주할 일은 없겠지. 그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한 피아노인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아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떠나도 다음에 또 다른 연주자가 이곳에 와서 치열한 집중력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즐겁기도 했다.

누가 올진 모르겠지만…… 분명 그 연주자도 이 피아노를 좋아해 줄 것이다.

피아노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데보라 아주머니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출발하려고?}

{예, 아주머니.}

{내가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사실 나도 빅토르가 없었다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아주머니는 플라지에서 족히 4시간은 기다리셔야 한다.

아니면 날 내려 주고 다시 돌아오시든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다른 청중들과 같은 시간에 편안하게 오시길 바랐던 나는 일단 지금은 빅토르와 가겠다고 전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살짝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지만 내 의사에 따라 주셨다.

{이따 저녁에 뵈어요.}

{그러자꾸나.}

다가온 아주머니는 힘내라는 듯 날 한 번 꽉 안아 주셨다. 흔한 포옹이었지만 어쩐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플라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15분이었다.

“일찍 잘 오셨습니다.”

“시간은 충분하죠?”

“물론입니다. 자, 올라가시죠.”

어제 그랬던 것처럼 루트거는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스치는 눈빛에서 그가 내 안색과 컨디션 등을 살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로선 당연히 담당 연주자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것이 일일 테니까. 난 저번에 무대에 서기 전에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적도 있고…….

아마 루트거는 날 그렇게까지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앞서 걷던 그가 휙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어제 리허설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예?”

“정말 훌륭했다고 말입니다.”

리허설 룸에서 우리끼리 연습했던 내용인데 그것이 밖으로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난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어제 내 리허설 내용이 좋았다고 하니 루트거는 딱히 내 컨디션에 대해 더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이제 익숙한 사무실로 와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자 루트거는 가져온 서류 몇 장을 뒤적이더니 내게 설명해 주었다.

“우선 오늘 스케줄을 다시 한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제 무대에 서기 전까지 의상도 갈아입고 마지막 리허설도 해야 했다. 그 시간은 모두 철저하게 루트거가 기획한 일정 위에 있었다.

프로인 그가 짜 준 일정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여유나 내가 휴식할 시간 까지도 모두 잘 짜여 있었다.

내가 거기에 불만 같은 걸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설명을 마친 루트거가 물었다.

“혹시 스케줄에 질문이나 의견이 있으신지?”

“없어요. 그대로 하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길.”

루트거에겐 아마 내가 말 잘 듣는 연주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서로 좋으면 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잠시 그가 사라지고 혼자 사무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 있자니 저 멀리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누군가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이었고, 직원들 역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연주자 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난 조금 더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뉘었다.

일단 일정상 내게 주어진 여유는 꽤 많았다. 잠시 쉰다고 해도 아무도 무어라 안 할…….

{베르체노바 님. 마실 것이라도 드릴까요?}

그때 한 여성 직원이 내가 쉬고 있던 공간에 들어오며 물었다. 키가 크고 밝게 웃는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나 역시 허리를 세우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도와주려 온 건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딱히 목이 마른 상황은 아니었다.

{아뇨, 괜찮…….}

그렇게 웃으며 거절하려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디에서 들어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홀에 여러 번 드나들면서 이미 직원들은 수십 명도 더 만났으니 그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리라.

그런데 이 정도로 익숙하고 뭔가 근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는 건 좀 이상했다.

애매한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흐물거리다가 슬쩍 형태를 갖추었다.

난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어둠 속의 실루엣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클로에?}

나도 모르게 이름부터 말하고 나선 아차 싶었다. 그 사람이란 확신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클로에는 내 부름에 마치 퀴즈 쇼 진행자처럼 손가락을 딱 튕겨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정답입니다! 와, 어떻게 알았어요?}

{그…… 목소리가…….}

{역시 피아니스트라 그런가? 소리를 기억하는 걸 잘하시네요?}

이렇게 제대로 클로에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난 약간 생경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기분을 느끼며 웃었다.

클로에와 만난 건 1라운드 무대에 오르기 직전, 스튜디오5의 어둠 속에서 쉬면서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난 세연과의 일 때문에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괴로운 그 고민의 끝에 커다란 망치를 쥐고 이번엔 세연을 내리치려고 했을 때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광기에 차 있어서 무슨 짓을 할지 나 스스로도 잘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클로에와 잠시 이야기하면서 정말 뜻밖의 도움을 받고 다시 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도 내겐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땐 조금 더 친근했었던 것 같은데.

{또 기억하고 있는 게 있는데…… 말투는 왜 바뀌었나요?}

{말투? 아하…….}

클로에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그땐 어두워서 반말이 자연스러웠고,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보니까 조금 어색해서…….}

{그게 더 어색해요, 클로에. 편하게 하셔요.}

{에헤헤, 그럴까? 그래도 돼?}

{물론이죠.}

어둠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던 온갖 이야기를 다 꺼냈었지만, 다시 만나서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다.

난 클로에와 밝은 곳에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그녀 역시 그런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지 왔구나, 타티아나.}

{그러게요.}

{내가 그랬었지? 아마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이전에 했었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클로에가 지금까지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마음껏 실력을 보여 줘.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아마 그 후에 했던 연주 덕분에 클로에는 피아노 연주자인 내 실력에 대한 상당한 믿음을 가지게 된 듯했다. 거기에 기대도 크게 하고 있는 것 같고…….

물론 난 거기에 충실하게 답할 예정이었다. 이번엔 날 가로막는 고뇌 같은 건 일절 없었다.

난 이미 모든 곡을 완전하게 준비해 왔고, 그건 완벽으로 수렴하기 직전에 달해 있었다.

그걸 무대에서 얼마나 선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조금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그럴 생각이에요.}

{스튜디오5에서 집중하지 않아도 되겠어?}

{……지금 아시면서 일부러 그 말씀 하시는 거죠?}

{어라? 왜 부끄러워해?}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은 어느 때보다 강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에 했던 내 끔찍한 발언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해서 클로에를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모든 걸 음악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하고 만성 우울증에 충동적이라고까지 했던 것까지……. 다른 사람에겐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난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했다.

{그땐……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거예요. 평소 전 그렇지 않아요.}

{그래, 그래. 그렇겠지.}

{……놀리지 마세요.}

{응, 응.}

하지만 클로에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건성으로 넘기면서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솔직히 나도 이런 식으론 내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문가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인기척을 느꼈다.

{……?}

들어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무척 수상했다.

내가 그쪽을 가만히 보고 있자 클로에도 내 시선을 따라 바라보더니 무언가 느꼈는지 슬그머니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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