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3화
연주자들이 상담하거나 잠시 휴식하기 위해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이 공간은 벽과 문으로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위쪽이 뚫려 있어 벽 너머의 소리가 잘 들린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귀가 예민한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클로에가 문가로 다가가는 사이 난 일부러 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람마다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이 다르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행동도 그리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딱히 무슨 의미가 있진 않고 클로에의 움직임을 숨기기 위한 말의 연막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면 문 너머 사람이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연막까지 치며 확인하려고 하는 게 잘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난 지금 내 직감을 믿고 있었다.
클로에도 은근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서 내 의도를 알아차리곤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어쩌면 건너편에 자기 상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상황은 이미 배제한 것 같았다.
문 앞에 다다른 클로에가 슬쩍 날 돌아보았다.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자 그녀가 벌컥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 있던 루시 스튜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기겁했다.
{까, 깜짝이야…….}
{아! 죄송합니다, 스튜어트 님.}
클로에가 깍듯한 태도로 루시에게 사과했다.
누가 있든 이렇게 사과할 거면서 문을 그렇게 벌컥 열어 버리다니. 클로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지금 난 루시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무대에 서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사무실이 아니라 연주자 대기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했다.
루시는 멋진 연주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연주자에겐 외적인 준비만큼이나 내적인 준비도 중요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루시를 바라보았다.
불안정한 눈빛과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방황하는 손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가 그녀의 현재 상태를 알려 주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지금 무대에 설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난 그 모든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간이…….}
이곳의 직원인 클로에는 일단 루시의 일정이 걱정되는지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시는 빠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저도 알아요. 대기실에 가 있어야 한다는 건. 그런데 스마트폰을 맡겨 놨던 제 담당자가 어디 있는지 찾아봐도 없어서…….}
{불러 달라 하시면 불러 줬을 텐데요.}
{안 오잖아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루시는 다시 불안한 듯 손을 이리저리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뒷걸음질 쳤다.
{뭐 사실 상관없어요. 그냥 다시 대기실로 갈게요.}
{아뇨, 스마트폰을 필요로 하시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일이시라면 제가 스튜어트 님의 담당자를 찾아보도록 하죠.}
루시의 말만 들어 보자면 스마트폰만 찾아 주면 일단 그녀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들린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잠시 손에 없다고 해서 이 정도로 불안해하는 건 아무리 스마트폰 중독이 심각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문제는 스마트폰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앞에 닥친 무대 자체에 대한 압박감이 그녀를 지금 떨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난 가만히 앉아서 루시와 클로에가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루시는 힐끔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안 중요해요. 신경 쓰지 말고…… 타티아나랑 이야기 마저 하세요. 두 사람 친한 것 같은데.}
{저와 베르체노바 님이 하던 대화를 듣고 계셨군요?}
{아…… 아, 이런.}
당황스러워하는 루시를 보며 클로에가 피식 웃었다.
지금 루시가 겨우 스마트폰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클로에도 알아본 것이다.
클로에가 다시 날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무언의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 부탁을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루시.}
{응……?}
{여기 잠깐 와서 같이 이야기할래요?}
루시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조심스레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색해하며 옆 소파에 앉은 루시는 괜히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린 이미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한 사이였다. 이 정도 대화는 편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본래 적극적인 성격인 루시는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테이블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거 마셔도 돼?}
{그러세요.}
{고마워…….}
클로에가 가지고 온 음료수지만 누가 마시든 상관없었다.
루시가 목을 축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스마트폰이 필요하다면 빌려드릴게요. 그런데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별로 복잡한 건 아니야. 그냥 긴장되어서 손이 떨릴 뿐이거든.}
이 닫힌 공간에서 루시는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내게 보여 주었다.
{잠깐 잡아 볼래?}
그녀가 내게 내민 손을 잡자 바르르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정말로 긴장해서 이러는 것이라면 꽤 심한 상태였다. 이래서 연주 같은 걸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양손으로 루시의 손을 잡아 주자 그녀는 마치 자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다 망했어……. 리허설도 망쳤고…… 잠도 설쳤고…… 의상도 급히 수선했는데 마음에 안 들고…….}
모든 것이 가장 완벽해야 하는 오늘, 루시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상황에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하나만 있어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갈수록 예민해지게 된다.
아마 대기실에서 혼자서 노이로제와 긴장을 컨트롤해 보려 했으나 혼자선 안 될 것이란 걸 깨닫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루시가 가진 연주자로서의 본능이 그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으리라.
난 조용히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루시는 자조하며 말을 맺었다.
{경쟁자 하나 쉽게 떨어지겠네. 아니, 너 정도 되면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려나…….}
원래 이렇게 자포자기적인 성격은 아니었을 텐데, 지금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루시의 상태는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저번 주만 하더라도 난 그녀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로에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여러모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때였다.
{여러모로 맞는 말이 하나도 없네요, 루시.}
루시는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우선 우리가 경쟁자인 건 맞지만 루시가 떨어진다고 해서 제가 득 볼 일은 하나도 없어요. 심사는 상대 평가이자 동시에 절대 평가이니까요.}
파이널리스트는 12명을 뽑게 되어 있지만 그것이 확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이미 10명이 나왔으니 오늘은 2명을 더 선발하는 걸 기본으로 하더라도 만약 3명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면 총 13명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그 말인즉슨 자격자가 없다면 11명 혹은 그냥 10명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잘해야 한다.
무엇보다 루시든 누구든 경쟁자가 제 실력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떨어지면 그게 더 신경 쓰인다. 난 루시가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한다.
진지한 나와 달리 내 말을 이어 거들어 준 클로에는 장난스러웠다.
{그리고 베르체노바 님도 스튜어트 님과 비슷해요. 바로 저번 주에 스튜디오5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긴장했었을 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응, 그러니까. 그 말 하는 건데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라서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사실 긴장이라기보다는 내적 고민 끝에 극단적인 방법만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것도 신경증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루시는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웅크리고 있었어?}
{그, 아…… 조금요.}
어차피 지난 일이긴 하지만 창피했다. 그러나 루시는 사실 확인만 했을 뿐 날 놀리거나 하려고 하진 않았다.
단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래, 너도 그런 걸 겪는구나……. 맞아, 왜 까먹고 있었지? 데이버가 실수했을 때도 넌 위로해 줬었는데…….}
난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도 루시와 이야기했었고, 그 후에 클로에를 만나서 조금 진정된 직후에도 이야기한 적 있었다.
그때 내가 보여 주었던 차이를 루시는 이제야 떠올린 듯했다.
{그 후에 네가 보여 준 연주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고 있었나 봐. 난 그게 거의 성령의 강림처럼 느껴졌었거든.}
마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먼 곳에 가 있던 루시의 초점이 어느 순간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나도 그런 연주를 하나쯤은 사람들 기억에 남겨 보고 싶어.}
연주자로서 지금 이 순간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인드라 생각한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손을 이제 떨지 않으시네요.}
{응? 어라…… 그렇네?}
자신의 상태를 뒤늦게 깨달은 루시는 손을 빼 들더니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서 놀라워했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는 걸 확인했을 뿐인데 이만큼 좋아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너랑 이야기하면서 나았나 봐.}
{다행이에요.}
{네가 착한 애라서 다행이야……. 정말로.}
난 고개를 저었다. 난 단지 클로에에게 받았던 걸 전해 주었을 뿐이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덕분이다.
기운을 차린 루시는 씩씩하게 일어났다.
{그럼 난 이제 대기실로 가 볼게.}
{스마트폰은요?}
{필요 없어!}
딱 잘라 말한 루시는 환한 미소와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진 느낌이다. 클로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볍게 웃었다.
잠시 후, 루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놀란 듯한 루트거가 들어왔다.
{방금 루시 스튜어트 님이 나가는 걸 봤는데…… 혹시 여기 있었습니까?}
{예. 잠시 이야기했어요.}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루트거는 조금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깊게 캐물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 이상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몇 분 후, 난 클로에와 함께 스마트폰으로 루시의 무대를 중계로 보았고 그녀의 첫 연주를 들으며 약간 남아 있던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이동할까요?}
내 일정을 관리해 주는 루트거의 제안에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