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4화
타티아나의 담당은 루트거 칼스도르프였지만 그가 모든 일정을 맡아서 도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의상실에 같이 들어가거나 할 순 없는 것이다.
때문에 여유가 있는 직원이 따라붙기도 하는데, 클로에는 일부러 타티아나의 일에 자원했다.
일주일 전 어둠 속에서 이야기하며 즐겁기도 했고 연주자인 타티아나에게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애가 있었나?’
타티아나가 어린 나이임에도 세계적으로 꽤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그녀의 실력은 소문을 짚어 상상했던 것을 한참이나 상회했다.
양손으로 피아노를 움켜쥐고 완벽히 지배하고 있는 듯한 그 연주는 클로에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게다가 클로에는 무대가 아닌 곳에서의 타티아나의 모습 또한 안다.
의외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고 약간 우울증도 있는 것 같은 모습은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면을 보여 주었다.
때문에 그 나약함을 이겨 내며 그 정도의 연주를 해냈다는 것이 클로에에겐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팬이 되어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까탈스러운 부분은 없지만 은근히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니 가급적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잘해 주게. 알았지?』
『알겠습니다.』
루트거는 타티아나와 클로에를 의상실로 보내며 신신당부했지만 그런 말 없어도 클로에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의상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타티아나는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순서가 다가오니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멀티플레이는 잘 안 되는지 스마트폰을 보며 걷던 타티아나의 걸음은 서서히 느려지다가 이내 멈췄다.
클로에가 돌아보자 그제야 타티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온 것만 빨리 답장할게요.}
{천천히 하시죠.}
{앗, 전화가…….}
스마트폰을 붙잡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여느 어린애들과 다를 바 없었다.
클로에는 킥킥 웃으며 그녀를 복도 옆의 벤치로 데리고 갔다. 어차피 아직 여유 시간은 한참 있었다.
“□□□ □□□□□. □□.”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타티아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따뜻했다.
아마 가족이나 선생과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타티아나가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전화하는 태도에서부터 느껴졌다.
클로에는 옆자리에 앉아 턱을 괸 채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 음산하게 중얼거리던 모습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어둠은 가지고 있다. 단지 타티아나는 그보다 더 밝은 것들을 외부에서 찾아선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미소를 지었다.
타티아나는 다른 곳에도 몇 번 더 전화를 걸었다.
느긋하게 통화해도 된다고 말했으나 옆에 있는 클로에를 의식해서인지 타티아나는 짧게 통화들을 끝마쳤다.
{전화 다 했니?}
{예. 선생님들과 아버지, 오빠…… 그리고 친구들도요.}
소중한 것을 바라보듯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타티아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기대가 많을 테니…… 잘해야겠죠?}
타인의 기대에 대해 부담감이 아니라 의욕을 느끼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타티아나의 인간적인 강함은 이런 면모에서도 드러났다.
의상실로 들어서자 여러 직원이 그녀를 맞이했다. 타티아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요.}
이미 타티아나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소문이 자자한 데다가 어른스럽고 정중하며 친절하니 그녀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타티아나를 꾸며 줄 준비로 잔뜩 들떠 있던 직원들이 달라붙었고, 클로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동안 스마트폰을 해도 된다는 말이 있었으나 타티아나는 거절했다.
지금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 모습도 기특하게 보이는지 직원들의 눈빛이 한층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오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타티아나를 최고의 상태로 무대에 올리는 것만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기까지 1시간 정도 걸렸다. 의상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따로 손볼 곳이 없어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딱 맞네요!}
타티아나를 전신 거울 앞에 세운 직원이 마지막 확인을 마치고는 박수를 짝 쳤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다른 콩쿠르와 달리 긴 기간 진행되는 특성상 연주자들이 미리 맞춰 온 드레스가 안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트레스 등으로 살이 찌거나 빠지거나 하여 체형 관리에 실패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앞서 루시 스튜어트가 드레스를 놓고 투덜거렸던 것이 그런 종류의 문제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바로 전날 드레스를 맞춘 것처럼 잘 맞았다. 고급스러운 검은 윤기가 흐르는 드레스는 그녀의 우아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머리는 깔끔하게 틀어 올리고 빨간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가느다란 목을 장식하고 있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던 타티아나가 클로에를 돌아보았을 때, 클로에는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칭찬을 마구 꺼내 놓았다.
{저번엔 라벤더색이었는데 오늘은 어둡네?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정말 예쁘고 잘 어울려, 타티아나.}
{고마워요.}
{그냥 블랙이 아니라 이건 무슨 색이라 해야 하지…… 에보니?}
{정확해요.}
반짝이지 않고 은은한 느낌의 검은색은 피아노의 색과 굉장히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드레스 소매를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원래는 이 색으로 할 생각 없었어요. 옷을 지어 준 아델리나도 너무 어두운 색으로 하면 머리와 팔만 둥둥 뜬 유령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했었고…….}
{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타티아나는 강렬한 실력과 태도를 가졌지만 체격이 왜소해서 그런지 묘하게 흐릿한 인상이 있기도 했다.
모처럼 큰 무대이니 화려한 색으로 하는 편이 그녀의 외적인 면모도 잘 부각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색이라니. 연주자들 대부분이 무대를 거듭할수록 화려해지는 경향이 있는 만큼 갑자기 어두워진 타티아나의 의상은 조금 의아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왜 에보니로?}
{제가 피아노 앞에 앉은 걸 보고 난 아델리나의 의견이 조금 바뀌어서요. 한 번쯤은 이 색으로 무대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타티아나는 어깨를 덮는 얇은 케이플릿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무대에 선 그녀를 떠올렸다. 그건 검은 피아노와 하나로 뭉쳐진 유령의 모습이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착각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피아노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때에 말이죠.}
어둠을 몸에 걸치고 있는 타티아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들고 기적을 행하겠노라 선언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그 무엇도 그녀의 눈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기적의 예언을 목도하는 기분으로 클로에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농담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음, 가장 중요한 건 파이널이지 않아?}
{그땐 제 나름대로 입고 싶은 색이 있어서요. 후후, 그런데 지금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무대도 없잖아요?}
이런 심사 같은 건 단숨에 통과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도 타티아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듯 웃었다.
다시 거울을 바라보면서 타티아나는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꿈같은 기분이에요.}
{응?}
{세계에서 제일 큰 콩쿠르에 참가하고 있고…… 저에게 기대를 거는 분이 많다는 건 축복이겠죠. 게다가 제 친구들은 이미 훌륭하게 앞서 나갔고 이젠 제가 그 뒤를 따라갈 차례예요. 이런 날이 오다니…….}
타티아나는 한데 모은 양손을 가슴께에 올리며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요.}
{괜찮은 거야?}
{물론이죠.}
환희와 희열 그리고 의지로 가득 찬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는걸요.}
기쁘게 웃는 타티아나의 모습은 결코 작고 왜소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그녀에게서 일반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경외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
세미파이널 마지막 날.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지닌 심사 위원들도 조금 지칠 무렵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발디니는 피로감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바로 다음 순서로 무대에 오를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어제 리허설에선 협주곡 총보를 솔로 편곡해서 쳤다고 하질 않나……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종종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정말 거짓말인가 싶은 정도였다.
제한된 리허설을 마주한 다른 참가자들은 보통 급하게 오케스트라와 맞춰 보기 바쁘다.
하지만 지휘자 가스파르는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타티아나에게 솔로로 연주해 보라는 제안을 했고, 타티아나는 그 자리에서 덥석 받아들여선 즉흥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아무리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익숙하다고 하더라도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안토니오도 즉흥 연주에 강한 편이었지만 그런 건 버겁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상식을 벗어난 참가자들이 많이 나온 콩쿠르였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타티아나의 친구인 아나스타샤의 연주에 심사 위원단이 거의 뒤집어지다시피 했었다.
협주곡은 가까스로 엉망을 피한 수준이었지만, 알캉의 마이너 에튀드를 그 정도로 높은 완성도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동서고금을 다 뒤져 봐도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는 그녀를 파이널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만큼이나 우릴 놀라게 해 줄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는 거겠지?’
이미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타티아나에 대한 기대치는 거의 최고로 올라 있었다.
이건 사실 심사를 받는 참가자 입장에선 그리 유리한 게 아니다. 그 기대에 미달한다면 그대로 감점으로 이어질 테니까.
상식적으론 열일곱 살짜리 연주자에게 이렇게 높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 그런데도 안토니오는 도저히 기대치를 낮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번 보자고.’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무대에 오를 피아니스트에 대한 안내가 지나갔고, 이어 홀 전체가 어두워졌다가 무대 쪽만 밝아졌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부터 인간의 형상을 한 피아노의 요정이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