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15화 (1,215/1,277)

##  1215화

르스와le soir의 문화부 기자 스테진은 메모용 수첩을 끄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홀에 들어오기 전 그는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열정이 넘치는 브뤼셀의 청중들은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기대를 걸고 몰입하기를 즐겼는데, 특히 오늘 참가자들에 대한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중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름은 바로 러시아에서 온 어린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였다.

‘확실히 이슈가 될 만했지.’

일단 스테진이 기자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중요한 순간 사진을 찍었을 때 잘 나오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에서 타티아나는 정말 만점에 가까운 피사체였다.

외모도 좋고 자세도 좋아서 언제 찍어도 좋은 사진들만 찍혔다.

물론 외모만 좋아서 유명해진 건 아니었다. 그녀가 진정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바로 피아니스트 그 자체로서의 실력 덕분이었다.

스테진이 아는 모든 클래식 평론가들이 타티아나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냉정한 평가로 악명이 자자한 평론가들조차 타티아나의 음악에 흠을 잡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음악가로서 정진하길 바란다는 평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 관대한 평을 하는 평론가들은 조금 도를 넘기까지 했다.

스테진은 오늘 아침 문의했던 한 평론가의 말을 잊지 못했다.

세미파이널 마지막 날 무대에 오르는 4명의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짧게 평해 달라고 했더니 타티아나를 두고 피아노의 신이 돌아올 것이란 평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열일곱 살짜리에게 신은 너무 과하지…….’

솔직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살짝 반감까지 드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따라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시라고 웃어넘기지 못한 데에서 스테진은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자각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등용문이다.

이미 타티아나가 끌어간 인지도와 인기 그리고 확실한 실력과 배경을 따져 봤을 때, 지금 이 콩쿠르를 딛고 정말 높은 곳까지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신이라 부르게 된다면…… 정말 그리 될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처럼 정보 교류와 유행이 빠른 시대라면 더더욱.

‘흠…….’

미래를 잠시 생각해 보던 스테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타티아나에게 향하는 관심과 기대는 너무 높았다. 이렇게 기대가 높으니 되레 취재할 마음이 안 들 정도였다.

이미 다른 언론에서도 모두 타티아나에게 조명을 들이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숨겨진 보석 같은 피아니스트를 발굴해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스테진은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편집장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런 식으론 평생 승진 못 할 거라는 엄포였다.

‘승진은 해야지…….’

모두가 보석이라 일컫는 피아니스트임을 안다 하더라도 열심히 취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스테진은 펜을 들었다.

‘저 사람들도 대단하군.’

일주일 내내 본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절도 있는 모습으로 각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제 앞으로 두 번의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그들의 역할은 마무리된다.

그간의 멋진 협주곡들은 모두 저 오케스트라 실력의 영향이 컸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이 오케스트라의 능력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곤 했다.

스테진은 눈에 힘을 주며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무대 위로 등장한 타티아나가 앞쪽으로 걸어왔다.

‘검은 드레스…….’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의상을 생각해 보면 검은 드레스는 처음이었다.

화려한 색들을 고르다 보니 서로 겹치기도 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타티아나의 선택은 빈틈을 노린 것이라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무작정 겹치지 않는 색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무척 잘 어울렸다.

피아노의 색과 닮은 드레스는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에게 자연스럽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드러난 목은 그녀의 곧은 자세를 부각시켜 주었다.

걷는 방법을 따로 배우기라도 했는지 우아한 발걸음으로 중앙에 선 타티아나는 우선 청중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마주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지는 인사였다.

이어 지휘자와 악장과도 인사를 마친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을 맴돌았다.

그리고 검은 피아노의 화신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엇…….’

스테진은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건 평범한 소녀 피아니스트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만 느껴졌다.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스테진은 때로 특별한 아우라를 내뿜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배우들이 역할에 몰입할 때 그 집중력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전부 배우의 세계로 끌고 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스테진이 느끼는 바로는 지금이 바로 그 상황에 가까웠다.

타티아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적막 위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홀린 것 같은 기분이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고전 음악답지 않은 리듬으로 흐르던 음악은 다시 반복되며 크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짙게 드리워지는 음울한 열정은 전율이 일 정도로 전신을 울렸다.

이미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만 스무 번도 넘게 들었다.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그 모든 곡이 다 좋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엔 약간 느낌이 달랐다.

뭔가 오케스트라 전체의 색이 바뀌어 있는 느낌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피아노와 드레스의 색처럼.

기이하다고 생각하며 스테진은 귀를 기울였다. 오케스트라는 청중들을 더더욱 가까이 끌어들였다.

‘거의 완벽한 전주야.’

이보다 더 잘할 순 없었다. 오케스트라는 정말 수준 높은 연주로 모든 청중을 무대에 집중시켰다.

그야말로 스테이크를 예쁘게 썰어서 피아니스트의 입에 직접 넣어 주는 형국이었다.

물론 이걸 받는 것 또한 실력이다. 어설픈 실력으론 오케스트라의 위용에 눌려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경험 없는 어린 피아니스트들이 큰 무대에 서면 종종 겪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전혀 해당하지 않는 일이다.

타티아나는 오케스트라의 뒤를 이어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사운드는 오케스트라보다 더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잠깐만…….’

지금 지휘봉을 잡고 있는 건 가스파르 말레 지휘자다. 그러나 그 뒤에서 모든 걸 컨트롤하고 있는 건 바로 타티아나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조금 바뀐 것 같다고 느꼈던 건 정확한 감상이었다.

타티아나가 자신이 의도한 음악을 오케스트라에게 완벽하게 이해시키곤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비롭게 얽혀드는 하모니를 느끼며 스테진은 입을 벌렸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절대적인 실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였다. 정말 초월적인 실력을 지니고 무대에 오르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타티아나는 아예 모든 것을 휘어잡고 마치 직접 연주하는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가능한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의 협응력이었다.

‘피아노 치고 있는 것 맞지……?’

타티아나는 연주할 때 퍼포먼스가 없기로도 유명했다.

아주 작은 흔들림마저도 모조리 통제에 두는 듯 그녀는 딱 필요한 움직임만 내보이다가 종종 고개를 들어 지휘자를 바라보며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양손은 완벽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수많은 연주자가 이 피아노를 거쳐 갔지만 타티아나처럼 무겁고 진정성 있는 사운드를 내는 피아니스트들은 드물었다.

검은 베일이 휘날렸다. 이미 피아노와 하나가 된 타티아나가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 베일은 무대 전체로 퍼져 나가 오케스트라를 감쌌다.

바이올린에서 팀파니까지 그 누구도 거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움직여 건반 하나를 누를 때마다 마치 지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악기도 울었다.

그리고 음악의 깊이도 더더욱 깊어져 갔다.

울적한 가을의 풍경을 묘사하는 음악은 낙엽 한 장이 되어 바람을 타고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솔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타티아나는 발치에 떨어진 솔방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스테진은 처음으로 어휘력의 부족을 느끼며 펜을 까딱였다.

다른 연주자들이 화려함으로 모차르트의 산뜻함을 표현하려고 애썼다면, 타티아나는 정반대로 무채색을 기준으로 하여 고전적인 호화로움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럭셔리한 음악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웅장한 모차르트의 걸작을 연주하는 타티아나에게선 대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열일곱 살에게 무거운 호칭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이성이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연주가 서서히 스테진의 이성을 갉아 내고 있었다.

간신히 10분 정도 버텨 냈을 때, 타티아나의 카덴차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오케스트라와 함께했었던 음악을 혼자서 감당하는데도 전혀 무게감이 줄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파워가 피아노를 울리고 홀 전체를 지배했다. 기적과도 같은 음악이었다.

넋을 놓고 지켜보는 사이 이번엔 오케스트라가 타티아나의 기적을 증명하고 떠받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타티아나는 다시 가볍게 손을 놀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천천히 모든 음악을 내려놓았다.

{…….}

음악에 압도당해 버린 스테진은 할 말을 잃고 손을 떨었다. 청중석은 쥐 죽은 듯 조용했지만 가느다란 떨림이 곳곳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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