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8화
레티시아 코스타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연락 싹 끊긴 거 봐라…….’
이틀 사이 그녀에게 연락해 온 건 부모님밖에 없었다.
세미파이널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응원한다는 연락도 많았는데, 탈락이 확정되고 나니 불편해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말을 거는 사람들이 전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떨어진 순간 그냥 이 세계에서 동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평범하게 인간다운 위로 같은 걸 받고 싶었던 레티시아는 우울했다.
【하…….】
한숨을 푹 내쉰 레티시아는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생각으로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벨기에 브뤼셀에 있었다.
결과가 확정된 후, 탈락자인 그녀에겐 일신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냥 스페인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비자 기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관광을 더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부모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된 김에 벨기에에 조금 더 머물면서 머리도 식히고 구경도 하고 오라며 용돈까지 보내 주었다.
기회란 건 또 오는 법이니 너무 무겁게 여기지 말라는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사실 레티시아는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데 그녀는 이미 떨어져 나간 탈락자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치열하게 경쟁했던 만큼 결과가 나온 후의 탈력감도 대단했다. 레티시아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쯤에서 모든 걸 즐거웠던 추억과 경험으로 생각하며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용돈까지 보내면서 더 있다가 오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
웨이터는 레티시아 쪽을 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레티시아는 옆쪽 벽에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 마지막 날의 중계를 진행 중이었다.
지금은 인터미션이라 중간 광고가 나오고 있었지만 조금 전 무대에 올랐던 타티아나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은 아직도 레티시아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잘 입지 않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피아노의 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피아노와 뒤엉키며 거대한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그 검은 형체가 무대를 뒤덮어 오케스트라를 집어삼키고 뒤이어 홀 전체를 장악하는 것까지 레티시아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초월적인 실력이었다.
본래 타티아나가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피아니스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비현실적일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현실에서 봤던 타티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느다란 목과 팔 그리고 나긋나긋하던 말씨가 생각난다. 사실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 같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타티아나는 신과 같았다.
한참이나 어린 피아니스트를 두고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여지마저 없을 정도였다.
【내일은 돌아갈 거야…….】
사흘이면 오래 버텼다고 생각한다.
그사이엔 일단 세미파이널이 진행 중이었으니 버티고 앉아 있을 명분도 약간이나마 있었고, 돌아가서도 쿨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뤼셀에 딱히 구경할 것도 없더라고 이야기하면서 적당히 산 기념품들이나 나눠 준다면 이번 도전은 잘 마무리될 것이다.
‘그런데 웨이터는 왜 이쪽을 안 보는 거야?’
레티시아는 스스로가 쿨하고 말짱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룸서비스를 시키지 않고 식당에 혼자 와서 밥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며 짐짓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웨이터까지도.
무언가 생각하면 울컥 짜증이 날 것 같아서 레티시아는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호텔로 돌아갈…….’
그때였다. 갑자기 한 커다란 남자가 레티시아의 맞은편에 앉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레티시아가 바라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고 있던 남자는 이내 웨이터가 다가오자 자신이 먹을 식사를 주문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레티시아에게 손짓하며 물었다.
{주문해.}
{……응?}
{주문하라고. 그러려던 것 아니었어?}
레티시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거나 하지도 못했다. 옆에서 웨이터가 주문을 기다리고 있어서 그녀는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커피 주문에 성공했지만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 레티시아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번 주에 인사 정도는 했지만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할 정도는 아니라서 아직도 여기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쨌건 계속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로 있을 생각은 없었다. 레티시아는 일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 줄래? 티토브.}
{나야말로 말하지 않았었나?}
{뭘?}
{우리나라에선 성만 부르는 일 없다고. 세르게이 파바노비치 티토브 혹은 세르게이 파바노비치, 아니면 세르게이야.}
반복되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빙글빙글 돈다. 자기 이름을 거의 최면처럼 기억시키려는 것 같았다.
레티시아는 인상을 살짝 썼으나 세르게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뭘로 하겠냐고 했더니 세르게이로 하겠다고 했었지?}
{그래…… 세르게이.}
{좋아.}
그는 흡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상반된 태도로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마이페이스적인 남자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우연히 왔다가 웨이터를 부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있는 걸 보고는 도와주려고 한 것 같긴 한데, 뻔뻔하게 합석해서 갑자기 식사를 시키는 건 어떻게 봐도 도를 넘은 행위였다.
레티시아는 빠르게 커피만 마시고 나가 버리면 이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일단 물어봐야 할 건 물어봐야 했다.
{아무튼…… 뭔데?}
{뭐냐니?}
세르게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더니 갑자기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거야?}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니…….}
그의 말에 레티시아는 당황했다.
가뜩이나 기분도 별로 안 좋으니 여유로워 보이는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콩쿠르 탈락자라는 점을 중점적으로 파고들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레티시아 본인도 탈락자인 건 매한가지였고.
뜻하지 않게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레티시아가 머뭇거리자 세르게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음…… 딱히? 네가 아직 여기에 있는 이유랑 비슷한 이유일 것 같은데.}
{너도 부모님이 용돈 보내 주셨니?}
{……콩쿠르에서 떨어졌는데 용돈을 왜 받아?}
기분풀이 관광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물었지만 괜한 의문만 더 샀을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세르게이는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서 적어도 세미파이널이 끝나는 거라도 보고 가려는 거 아니야?}
{아쉽다니. 난…….}
어차피 이제 이 콩쿠르는 레티시아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더 하든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련이라는 것은 남아 있었다.
기회가 있었을 때 조금 더 집중해서 잘 해냈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레티시아는 심장이 저릴 정도로 극심한 후회를 느꼈다.
레티시아는 연습한 것의 70%도 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니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쉬워.}
{나도 그래. 이렇게 긴장되는 콩쿠르는 처음이었거든.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런 말 하면 뭐 하니?}
{그러게 말이야.}
꽤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세르게이는 허허 웃어 넘겼다.
사실 지금 세르게이도 그리 기분이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우승 후보로 거론되며 여러 매체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미 러시아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레티시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치에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 세미파이널에서 떨어지고 난 뒤 바로 직후에 충격적인 일이라며 떠들어 댄 몇몇 뉴스 빼고는 그 어떤 곳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레티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탈락자에게 주어질 여유 스포트라이트는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도 힘들 텐데.’
이런 상황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적어도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고 자신의 부족함과 아쉬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레티시아는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치는 애는 우리처럼 아쉬워할 일 없을 것 같지?}
{타티아나 말인가.}
{응.}
괜히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해 봤는데, 생각보다 그리 나쁘진 않았다.
레티시아는 타티아나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높은 곳까지 가길 바랐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세르게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타티아나라고 해서 아쉬운 게 없진 않겠지만…… 그 아이의 음악에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마저 느껴지던데.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각오가 아니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그 짧은 평엔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에 대해 상당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레티시아가 이어 물었다.
{그 애랑 이야기해 본 적 있어?}
{아니, 전혀.}
{근데 어떻게 알아?}
{연주를 들어 보면 알지.}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그 대꾸에 레티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세르게이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화를 하는 데에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고 브뤼셀에서 보내는 마지막 동료로서 세르게이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레티시아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말했고 세르게이도 그런 듯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조금씩 더 대화하며 친해졌다. 그런데 한순간 레스토랑 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텔레비전이 한 번에 다 끌어갔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중계가 다시 재개된 것이다.
{중계나 볼까.}
{그러자.}
다시 텔레비전에 보이는 무대엔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팅이 깔끔하게 치워지고 피아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뭔가 황량한 기분도 없잖아 들었다.
하지만 그 위로 타티아나가 올라오자 텅 빈 것 같던 분위기가 한 번에 달라졌다.
홀 안의 청중들은 물론이고 레스토랑 손님들의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멈췄다.
타티아나의 우아한 인사 그리고 박수. 레티시아는 자신도 저 무대에 있었음을 떠올리며 아련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라가 판타지인가.}
세르게이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맞게 모든 연주자가 솔로 레퍼토리의 첫 곡으로 꺼내는 곡은 네르미나 양켈이라는 현대 작곡가의 미발표 의무곡인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였다.
모든 참가자들이 전부 이 곡에 대해 연구했었고 그건 레티시아와 세르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큰 무대에 올려야 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때문에 레티시아는 그동안 다른 참가자들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해석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알았다. 이건 차원이 다르다는 걸.
‘똑같이 한 달 연습한 것 아니었어?’
세미파이널에서 연주해야 하는 미발표 의무곡은 모든 참가자에게 한 달 전에 똑같이 공개된다.
그러니 시간의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 이상 연구하거나 할 순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는 거의 완벽한 레퍼런스란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간을 연구했는데 이런 차이가 난다는 건 타티아나의 실력이 그만큼 높은 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냥 들으면 알 수 있는 차이를 느끼며 레티시아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세르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더 센데. 피아노로 하는 힘 싸움에선 챔피언이라고 해도 되겠어.}
{저렇게 어리고 가느다란데?}
귀에 들리는 연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지만, 그래도 일단 화면에 보이는 현실을 다시 한번 보라는 의미로 레티시아가 말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신에게 나이나 성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 사람도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구나.
레티시아는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을 그녀보다 훨씬 더 대단한 피아니스트도 똑같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