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9화
네르미나 양켈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곡을 내게 되어 이제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24명이나 되는 젊은 신예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해석하려 애쓰고 각자의 방식으로 연주했다.
보통은 1명의 초연 연주자를 구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할 일인데 한 번에 24명이나 구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축복이었다.
때문에 네르미나에게 있어서 이 콩쿠르는 그녀 머릿속에 있는 최고의 음악의 형태가 무엇인지 찾으며 절대적인 목표점을 향해 가는 합동 프로젝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각 연주를 들으면서 네르미나는 가장 좋은 형태라는 것이 조금씩 변화한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네르미나가 제시한 템포보다 조금 느릿하게 연주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자기도 모르게 납득해 버릴 정도였다. 또 어떤 피아니스트는 리듬에 변화를 주면서 연주했다. 그것 또한 훌륭하게 들렸다.
이 콩쿠르에 참가한 피아니스트들의 실력은 엄청나게 수준이 높았다. 네르미나는 머리를 꽉 죄고 있던 무언가가 느슨하게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누가 이 곡을 제일 완벽하게 실현해 줄지 기대하던 마음은 자유로운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이 네르미나에겐 꿈만 같았다.
‘이 아이도 천재였지.’
23번째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그녀는 무명으로 음반부터 내서 실력으로 모든 걸 증명해 버렸고 러시아 안에선 여러 연주회를 성공시키고 훈장까지 받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여기 있는 수많은 음악가도 그녀와 같은 나이에 비슷한 업적을 이룬 이는 무척 드물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네.’
네르미나는 타티아나의 첫 무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타티아나는 피아노에 능했다.
사운드를 다루고 전체적인 구조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있어서 그야말로 타고난 센스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작곡가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정말 매력적인 피아니스트였다.
듣자 하니 이미 친구가 작곡한 곡을 초연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번엔 그 타티아나가 네르미나의 곡을 연주할 차례였다.
이 무대는 타티아나에게 있어 일종의 기회겠지만, 네르미나는 반대로 자신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타티아나는 암보를 전부 마쳤다면서 페이지 터너는 불필요하다고 알렸다.
마음 같아선 불필요하더라도 옆 자리에서 듣고 싶었지만 네르미나는 자신의 욕구를 꾹 눌러 참으며 청중석에서 얌전히 듣기로 했다.
무대 중앙으로 나온 타티아나는 청중석을 향해 꾸벅 인사하더니 피아노로 향했다.
검은색 드레스와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네르미나는 그녀를 보며 새와 같다고 생각했다.
새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엇…….’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
이미 22명이나 되는 피아니스트들의 다양한 해석을 들었다.
네르미나는 그 모든 해석이 마음에 들었고, 때문에 최고의 형태를 찾는 여정에 대해선 살짝 미련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몇 번 움직였을 때, 네르미나는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보고 음악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문이 막히고 생각이 멈추었다. 분명 이 곡의 작곡가는 네르미나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 곡의 소유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타티아나가 구사하고 있는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는 감히 그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거…….’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건 콩쿠르 측의 의뢰를 받고 나서부터였지만, 이 곡의 근간이 되는 리듬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네르미나의 머릿속에 있던 리듬이었다.
그러나 작곡을 하면서도 네르미나는 그 리듬의 가장 완벽한 형태를 자신의 손으로 구사할 수 없다고 느꼈다.
사람의 귀는 수천 분의 1초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함을 가지고 있기에 리듬을 다루는 실력이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안타깝게도 네르미나의 피아노 실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상력은 타티아나에 이르러 비로소 완벽하게 현실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맞아…… 바로 이거야……!’
마치 손으로 치는 드럼과도 같은 정확한 박자에 감미롭게 스며드는 멜로디가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본능을 깨웠다. 네르미나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고대의 인도 음악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악기가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음악 연주는 타티아나의 장기 중 하나였다.
타티아나는 마치 혼자서 서너 대나 되는 악기를 동시에 다루는 것처럼 연주했다.
네르미나가 이 곡을 쓰면서 의도했던 다중 성부 연주였지만 타티아나의 표현력은 그녀의 기대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겨우 두 손으로 연주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멍하니 듣고 있던 네르미나는 눈물이 흐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
자신이 작곡한 곡이 이 정도로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릴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고, 또 타티아나 같은 연주자가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네르미나는 결코 이런 연주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네르미나는 작곡가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자꾸만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눈가를 닦을 겨를도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쓰면 타티아나의 연주를 놓칠지도 모른다.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뇌리와 몸에 새기기 위해서 네르미나는 모든 집중력을 모아 무대를 지켜보았다.
작곡가의 길을 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환희와 고양에 휩싸인 적인 처음이었다.
***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도 신선한 충격이 퍼져 나갔다. 안토니오 발디니는 그 흐름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 곡은 수십 번이나 들었다. 때문에 그리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타티아나의 실력을 너무 쉽게 본 것이었다.
그녀는 같은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한층 더 깊은 곳에 손을 집어넣고 끌어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데에 아주 능숙한 피아니스트였다.
헛웃음을 흘리며 안토니오는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거기엔 작곡가인 네르미나 양켈이 앉아 있었다.
네르미나는 페이지 터너를 자처할 정도로 자신의 곡이 완성되는 현장에 함께하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작곡가였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지금 이 연주는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그런 기대를 하며 안토니오는 네르미나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런데 돌연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럽군.’
경쾌한 리듬을 가진 이 음악은 딱히 슬프거나 하지 않았다. 따라서 네르미나가 눈물을 보인 이유는 작곡가로서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곡가가 이 정도로 인정했다면 심사 위원 그 누구도 이 연주에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안토니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채점표에 우선 의무곡에 대한 점수를 체크했다.
연주가 끝나자 은근한 열기가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모두 연주했던 곡이니 이 곡 자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청중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주가 특별하다는 건 모두가 피부로 직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열기 속에서 타티아나는 가만히 앉아 피아노를 내려다보다가 목을 좌우로 까닥였다.
스트레칭을 하는가 싶더니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핀을 뽑았다.
틀어 올린 머리를 풀자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홀 안에 어수선하게 떠돌던 집중력이 모두 다시 타티아나에게 쏠렸다.
철저한 고요 속에서 타티아나는 머리를 차분하게 정돈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쓸리는 소리와 감각마저 전달되어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다음 곡을 연주하기 전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그걸 손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행동엔 모두를 숨죽이게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타티아나의 머리카락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매끈하게 흘러내렸다.
새가 자신의 깃털을 다듬는 데에 빗을 필요로 하진 않을 것이다.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정돈을 마친 타티아나는 턱을 치켜들더니 손을 내렸다. 무시무시하게 조용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두 번째 곡 연주가 시작되었다.
‘드뷔시…….’
타티아나의 오른손이 건반 위로 향했다. 안토니오가 보는 각도에서는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피아노가 알아서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성을 확신할 수 없는 선율이 뒤섞이며 들려온다. 그 선율의 물결 위에 둥실 떠오른 것은 마치 안개를 두른 섬과 같았다.
드뷔시의 기쁨의 섬 L.106.
20세기 초 작곡된 인상파 기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드뷔시의 걸작 중 하나였다.
희미한 것 같지만 잘 보면 확실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운드는 정말 구사하기 어려우면서도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타티아나의 표현력은 이 곡에서도 빛을 발했다. 프레이즈를 길게 들어 볼 것도 없이 안토니오는 펜을 놓고 감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미파이널 레퍼토리를 타티아나가 제출했을 때 그것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심사 위원들 사이엔 안토니오도 있었다.
당연히 드뷔시의 기쁨의 섬이 나올 것이란 건 미리 알고 있었고 어떤 곡인지도 충분히 알았다.
심지어 타티아나가 연주하면 어떤 분위기와 뉘앙스로 꾸밀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현실은 상상을 가볍게 초월해 버렸다.
안개가 차올라 입과 코로 스며들고 별빛이 반짝인다. 안토니오는 눈을 감고 음악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