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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23화 (1,223/1,277)

##  1223화

항상 모든 것을 연주에 밀어 넣고 나면 몸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아찔한 피로감과 현기증. 내 존재가 희미해지고 발을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허공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후회 없이 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난 그것을 음악에 최선을 다했다는 일종의 증거로 느끼고 약간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가벼워진 건 맞는 것 같은데…….’

숙였던 고개를 든 나는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았다. 팔과 허리에 피로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환호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그저 기쁘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협주곡에 독주곡 세 곡을 연주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건 무언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더 최선을 다해 힘을 쏟아부을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힘을 아끼고 만 것이라면? 내가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어서 난 다시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냐고 묻는 것 같은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난 진지하게 마음속으로 돌이켜보았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전혀.’

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지금까지 연습해 왔던 수많은 연주 중 방금 전 것이 가장 훌륭했다.

음악을 돌이켜 보고 분석하는 것에 오랜 시간을 쏟아 왔던 나는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이 완벽한 연주를 하고도 여력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한 곡만 연주한 것도 아니고 고강도의 무대를 마치고도 이럴 체력이 내게 있는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간 내 체력이 좋아진 건 확실하고 연주에 대한 기술적 부담감이 줄어들기도 했다.

‘괜찮아.’

난 정말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버릇처럼 피로와 고통을 기대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것들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었다.

단지 지금까지의 관념과 습관이 날 불안하게 할 뿐이다.

내 연주 실력은 나날이 발전하며 한계를 부수고 다음 계단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해야만 했고, 그리 해냈다.

무대에 대한 쓸데없는 불안감은 치워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박수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난 이 모든 청중을 만족시켰고 나도 만족했다.

지금 내 몸 안에 흐르는 기이한 에너지 같은 것은 만족감에 따른 고양감이겠지. 그 에너지를 한껏 만끽하며 난 돌아서서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잘 해내셨습니다.}

{좋은 무대 축하드립니다.}

대기실에 있던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나를 반겨 주었다. 청중석에서의 박수도 계속되고 있어서 앞뒤로 진동에 압축되는 기분마저 든다.

난 미소로 화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클로에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진짜 감동적이었어……. 어떡해.}

{왜 우세요……?}

{네가 피아노를 너무 잘 쳐서 그렇잖아!}

칭찬으로 받자면 고맙지만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색하게 바라보자 클로에가 더 가까이 다가와선 날 껴안았다.

{너무 좋았어, 타티아나.}

{고마워요.}

{넌 무조건 파이널 갈 거야. 진짜로. 만약 안 되면…….}

{안 되면……?}

{……그보다 너 땀도 한 방울 안 흘렸니?}

자신의 확신을 어필하던 클로에가 갑자기 내 등을 쓰다듬더니 킁킁거리며 내 목덜미의 냄새를 맡았다.

당황한 내가 살짝 밀쳐 내자 클로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뽀송뽀송하네? 좋은 냄새까지 나고…….}

{저기…… 갑자기 그건 왜…….}

{왜냐니? 그렇게 격렬한 연주를 연달아 하고 온 애 맞니? 마치 방금 여기 온 것 같잖아! 내가 아까 꿈을 꿨던 건가?}

원래는 나도 이 정도 활동을 하면 땀을 흘리는데 오늘따라 신진대사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기에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이상하게 느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버벅이는 사이 클로에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뭔가 납득이 되네.}

클로에가 이상하게 여기는 게 나쁜 방향인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한참 동안 날 놓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그녀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던 건 루트거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훌륭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감사합니다.}

내 담당 루트거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일이지만 앞으로도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 앞으로 가방을 쓱 내밀었다.

{소지품을 챙겨 왔습니다.}

{예? 굳이…….}

{혹시 드레스를 환복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스마트폰 같은 것도 의상실에 가서 켤 생각이었다.

그러자 루트거는 잠깐 고민하더니 내 앞에서 괜히 에둘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짧게 제안했다.

{대놓고 말씀드리죠. 다음 연주자의 무대가 끝나고 심사 결과 발표가 날 때까지 플라지에서 대기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대기요?}

{예. 조용한 장소라면 얼마든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루트거가 내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처럼 나 역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뭔가 콩쿠르 측에 유리한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정 피곤하시면 귀가하셔서 연락을 기다리셔도 되긴 하지만…….}

난 사실 여기서 결과를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무대만 두어 시간 기다리면 되니까 그리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단지 편한 옷을 입은 상태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루트거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따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마 카메라 앞에 설 일을 대비하려는 것 같은데, 나로서도 그건 이렇게 준비된 채로인 편이 좋았다. 딱히 불편하거나 땀이 난 상태도 아니었고.

{알겠어요. 이대로 기다릴게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주자 대기실은 다음 연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써야 하니 이제 비켜 주어야 한다.

그렇게 대기실을 떠나려고 발을 뗀 순간, 난 나도 모르게 뒤편을 돌아보았다.

{클로에.}

다른 직원들도 고맙지만 어두운 영화관에서 이야기해 주었던 그녀에겐 조금 더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아마 여기에서 나가고 다음 결과가 어찌 되든 내가 이곳에 다시 와서 그녀를 자연스레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신경 쓰지 않으면 마지막이 될 거란 생각이 들자 인위적으로라도 구실을 만들고 싶어졌다.

다행히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받았으면 SNS 친구라도 할래?}

클로에는 밝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난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켜면서 중얼거렸다.

{저 SNS는 안 해서…….}

{……뭐? 말도 안 돼. 왜?}

그녀는 내가 땀을 안 흘렸던 것보다 SNS를 안 한다는 사실에 더 놀라는 듯했다.

***

루트거가 안내해 준 개인실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걸려 오는 전화들을 받는 것이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와 오빠는 물론이고 친구들, 선생님들에게서도 메시지와 전화가 쏟아졌다.

난 랑스 부부를 이곳으로 모셔와 달라고 루트거에게 부탁한 뒤 사람들의 연락에 대응하는 데에 애썼다.

-타티아나, 네가 자랑스럽구나.

“……결과는 몇 시간 후에 나올 거예요.”

아직 기세등등하게 이야기하긴 이르다 생각이 들어 살짝 보험을 들듯 이야기했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는 결과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중요하게 보는 건 네가 그곳에서 원하는 바를 해냈다는 것이니.

“그…….”

-그러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려무나.

심사가 가장 중요한 콩쿠르에서 그걸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나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고 후회 없는 연주를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난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연주자로서 자신감이 아닌 자존감이 상당히 낮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

이전 같았으면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하고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었다.

“……예, 아버지.”

-그래, 그러면…… 또 연락하마.

전화는 바로 끊어졌지만 난 아버지에게서 무한한 믿음과 대견해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전화를 드린 건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뭔가 평소와 달리 들뜬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으셨다. 어쩐지 전화기 너머로 알코올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좋은 도전이었지? 타티아나.

라흐마니노프의 힘을 빌려 쇼팽을 연주하겠다는 아이디어에 미하일 선생님은 사실 걱정을 하셨다.

단순히 콩쿠르에 올릴 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로서 내 도전이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말리지 않으셨다. 항상 그랬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반대하신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날 믿고 밀어 주셨고,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도움을 주셨다.

난 선생님 앞에서 비로소 자랑스러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는 내가 해야지. 아 그리고…… 구세프가 잠깐 바꿔 달라고 하는구나.

“예? 옆에 계세요?”

-그래.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알코올 향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구세프 선생님은 다짜고짜 내게 물어보셨다.

-곡을 다 치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지?

난 살짝 긴장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할 땐 항상 날카롭게 날 관찰한 후이기 때문이었다.

내 연주에서 무엇을 읽으셨기에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인지 생각해 봐야만 했다.

하지만 난 괜히 움츠러들지 않고 차분히 생각한 다음 떳떳하게 대답했다. 선생님도 이런 날 바라실 테니까.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하하하하하, 그래.

대답이 마음에 드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웃기신 건지 구세프 선생님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난 그 후의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딱 거기까지만 말씀하시곤 다시 미하일 선생님에게 전화를 넘겨 버렸다.

왜 혼자만 대답을 들으시는 건지 모르겠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선생님을 붙잡고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미하일 선생님과 마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발렌티나와 리처드, 한승우, 라리사, 샬롯, 아나톨리와 류보비까지 많은 아이가 이 늦은 시간에도 깨어서 날 응원하고 있었다.

난 메시지로 통화가 가능한 걸 확인한 아이들과 한 명씩 통화할 수 있었다. 내가 이루고 있는 인간관계가 이렇게 많다는 것이 기뻤다.

물론 저쪽은 자정도 넘은 시간이니 길게 이야기하긴 어려웠다. 짤막한 응원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전화를 마무리해 갈 즈음이었다.

“타티아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데보라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다가와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잘했단다, 정말 잘했어!”

마치 친딸의 연주라도 본 것처럼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뒤편에 서 있는 파스칼 아저씨 역시 감격스러워하시는 표정이었다.

이미 아나스타샤도 세연도 모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상황이었지만 난 전화나 호스트 패밀리 가족들에게서 응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했다.

“칼스도르프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서 대기하다가 결과 보러 갈 거라며? 같이 기다리자꾸나. 어떠니?”

“전 좋아요.”

“응, 그래…… 뭔가 먹긴 했니? 배고프진 않아?”

바로 먹을거리부터 걱정하시는 걸 보고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2시간가량 연락 오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거나 랑스 부부와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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