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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24화 (1,224/1,277)

##  1224화

클레망은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으로 콩쿠르 중계를 봤다.

집에서 봤던 평범했던 모습과 달리 무대에 선 타티아나는 마치 다른 차원에 사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을 느끼며 클레망이 멍하니 중계를 지켜보는 동안 클래식에 대해 조예가 있는 그의 친구가 그 막연한 감각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무슨 헛소리인데.]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저런 연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장담하는데 내일 모든 뉴스가 저 피아니스트…… 베르체노바의 이야기로 도배될 거야.]

[오버하지 마.]

황당한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클레망은 딱 잘라 메시지를 보냈지만 어쩐지 그 예상이 맞아떨어질 것 같다는 직감도 떨칠 수 없었다.

그만큼 타티아나의 무대는 특별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푼 상태로 정말 완벽하게 무대에 녹아들어 가 피아노와 하나가 된 듯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주는 스피커 너머로 들어도 심장에 깊게 파고드는 듯한 특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오전에 단독 연주회를 들으면서도 충분히 느꼈던 것이지만…… 그건 음향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작은 방에서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로 한 연주였다.

똑바로 된 홀에서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는 타티아나의 음악은 차원이 달랐다.

『굉장한 애지…….』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은 꿈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의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클레망은 한동안 아련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클레망은 부모님에게서 호출을 받았다.

집에 있는 카메라와 어디서든 좋으니 먹을 것을 사서 플라지로 오란 호출이었다.

티켓도 없으니 그냥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타티아나가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클레망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심부름이었지만 왜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클레망은 곧장 지갑과 차 키를 챙기고 외투를 걸쳐 입고는 집 밖으로 나섰다.

늦은 시간에 여는 카페를 찾아 시내로 향한 그는 다행히 멀리 가지 않고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빵과 디저트 그리고 마실 것들을 잔뜩 산 그는 곧장 플라지 빌딩의 한 개인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그의 부모님과 타티아나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클레망을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으로 볼 땐 정말 화려하게만 보이던 타티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클레망은 괜히 부모님에게 말을 걸었다.

{다 끝나고 나서 절 부려 먹는 거예요?}

투덜거리는 아들을 보며 데보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집에 혼자 있을래? 타티아나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응원도 안 해 주고?}

{안 하긴 뭘 안 해요. 집에서도 했어요.}

괜한 투덜거림을 이어 가며 클레망은 종이봉투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집에서도 응원했다는 말에 타티아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럼 네 무대를 보지도 않고 자고 있었을까 봐?}

다시 한번 확인해 주자 타티아나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호스트 패밀리로서 지켜보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클레망은 그제야 솔직해질 수 있었다. 뭔가 더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붙여 봤자 그녀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안다.

클레망은 그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며 말했다.

{멋지더라. 정말로.}

{후후, 고마워요.}

다행히 타티아나는 그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다.

클레망은 무대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욕심을 참으며 종이봉투를 그녀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뭘 사 와야 할지 모르겠어서 근처 카페에서 이것저것 사 왔어. 골라 봐.}

{전 이 피낭시에가 맛있어 보이네요.}

타티아나는 안쪽을 뒤적여 찾지 않고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집었다.

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먹거나 자는 등 생활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것에 대해선 꼬박꼬박 감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맛있네요. 덕분에 살았어요.}

{빵 가지고 뭘.}

클레망은 별것 아니라는 의미로 손을 휘젓고는 그녀가 빵을 입에 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타티아나는 빵을 먹는 모습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너무 시선을 빼앗길 것 같다고 생각하며 클레망은 부모님에게도 빵을 권했다.

그런데 파스칼은 클레망이 가지고 온 카메라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이거 먹고 해요, 아버지.』

『그래, 잠깐만…….』

『이리 줘 보세요. 내가 세팅할 테니까.』

딱히 세팅이랄 건 없었다. 배터리와 메모리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잘 찍히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클레망은 빼낸 배터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진심이시네. 이걸로 영상 찍어서 우리 집에서 파이널리스트가 나왔다는 증거로 간직하려는 모양이야.}

{음…….}

타티아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알 수 없는 반응에 클레망은 순간 말실수한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말해 놓고 보니 너무 유난인 가족인 것 같았다. 랑스가는 단지 콩쿠르 호스트 패밀리일 뿐이고 운 좋게 타티아나를 맡았을 뿐이다.

타티아나라면 다른 그 어떤 곳에 갔더라도 충분히 파이널리스트가 되었을 피아니스트였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수습할까 생각하는 사이, 빵을 다 먹은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 클레망?}

{어?}

{그렇다면 지금 다 함께 찍으면 어떨까요? 그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뭔가 꺼려 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타티아나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클레망이 되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돼?}

{그럼요.}

그러더니 타티아나는 아예 자리를 당겨선 데보라 옆자리에 가까이 앉았다. 얼른 사진을 찍어 달라는 신호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클레망은 멀찍이 떨어져서 세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화면에 담긴 타티아나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조금 더 돋보이게 찍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손짓했다.

사진을 찍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같은 화면에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클레망은 카메라를 테이블에 세팅해 놓고는 소파로 향했다.

타티아나의 옆에 앉으려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이 순간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으리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자, 확인해 봐.}

카메라를 가지고 온 클레망은 타티아나에게 찍힌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자신이 어떻게 찍혔는지 분명 신경 쓸 테니 적당히 골라 내리라고 생각했는데, 타티아나는 한 장도 지워 달라고 하지 않고 넘겨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진작 찍을 걸 그랬네요. 벨기에의 가족 사진이 생긴 것 같아 기뻐요.}

그 말에 참지 못한 데보라가 타티아나를 덥석 껴안았다.

{어쩜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하니! 나도 너무 기쁘단다!}

타티아나라면 분명 어디에서든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해서 세계를 휘어잡았겠지.

하지만 그녀가 랑스가를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기에 클레망은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가져온 빵으로 늦은 밤 요기를 하고 랑스 가족들과 타티아나는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가끔 그녀에게 연락이 와서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늦은 시간인 탓인지 긴 전화는 없었다. 대체로 타티아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한 편이었다.

타티아나가 전화를 받는 사이 클레망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적이기도 했다.

타티아나의 무대를 보고 거기에 대한 반응이 한창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 초도 안 되어서 클레망은 재미있는 것을 바로 발견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전화를 끊자 그는 곧장 말해 주었다.

{지금 콩쿠르 웹사이트가 터졌나 본데?}

{……예?}

깜짝 놀란 타티아나가 되묻더니 자신의 스마트폰도 켜서 확인했다. 그러나 웹사이트에 들어가지지 않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듯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잠깐 찾아보니까…… 네 연주 녹화 영상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가 봐.}

인터넷으로 진행되는 콩쿠르 중계는 연주가 끝난 후에도 남아서 녹화 영상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전 세계 사람들 사이에서 타티아나의 이름은 굉장한 화제였다.

몇몇 클래식 관련 사이트에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중계가 끊어진 것에 대해 난리 법석이었고, 그사이를 틈타 타티아나의 무대를 중계로 본 사람들은 못 본 사람들에게 마치 무용담을 전해 주듯 감상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찬사들은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격이 높았다.

인터넷이니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완벽하다거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극찬도 많이 있었다.

클레망은 친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일이면 그녀의 이름으로 언론이 도배될 것이라 장담하기까지 했던 걸 반쯤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지금 그것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콩쿠르 웹사이트에 사람들이 몰려 문제가 생긴 것부터가 이 상황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는 당사자는 다른 것이 걱정이었다.

{어쩌죠……? 곧 다음 연주자가 무대에 오를 텐데 인터넷 중계가 안 되면…….}

클레망은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다.

지금 사람들이 자신의 연주에 미친듯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보다 다음 연주자에게 혹여나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에겐 더 중요한 문제라니.

클레망은 웃으며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고쳐질 때까지 미루고 있는 것 같거든.}

{휴…… 다행이네요.}

{연주 중간에 터진 게 아니니까.}

연주하다 말고 중계에 문제가 생겨서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면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니 정말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주목도가 워낙 빠르게 올라간 덕분이었다.

다행히 홈페이지의 접속 문제 사태는 5분도 채 가지 않아 해결되었다. 콩쿠르 측의 대처도 이 정도면 정말 빠른 편이었다.

{아, 복구됐다.}

{금방 됐네요.}

가슴을 쓸어내린 타티아나는 직접 중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웃었다.

클레망은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는 앞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피아니스트로서 엄청나게 유리한 곳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 봤자 타티아나가 어떻게 반응할지 클레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초연하게 웃으며 전부 감사할 따름이라고 대답하겠지.’

클레망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진지한 태도에 사람들은 더더욱 이끌리리라.

그리고 타티아나는 전혀 흔들림 없이 언제나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는 미래를 느끼며 클레망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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