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25화 (1,225/1,277)

##  1225화

랑스가의 가족들과 간식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홈페이지에 문제가 생기는 등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 없이 금방 처리되었다.

내 연주 영상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서버에 과부하가 걸렸단 말은 조금 신기하게 느껴진다.

내 첫 음반이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청중들이 내 음악에 그런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하면서도 더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입은 뒤로 난 보다 더 앞으로 나서야겠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의무감에서 비롯된 판단을 제하더라도 더 많은 활동으로 보답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라는 건 없으니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언제나 해 왔던 일이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하는 순간에 더 열심히 할 뿐이다.

물론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기 위해 일단 가장 좋은 건 이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가 되는 것인데……

스스로 느끼기에 완벽한 연주를 했으니 분명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도 100%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니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루트거가 문을 노크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도, 랑스가 가족들도 모두 루트거가 오기만 기다렸다. 이제 정말 결과를 받아 보러 가야 하는 것이다.

루트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준비가 되시는 대로 홀로 모시고자 합니다.”

“바로 갈게요.”

난 먼저 일어나 그가 안내하는 대로 앞으로 향했다.

스튜디오4로 향하는 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마 난 몇 걸음도 가지 못해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상황이었다.

{저기 베르체노바야.}

{결과 보려고 남아 있었구나.}

{당연히 그렇지 않겠어?}

옆에 루트거와 랑스가 가족들이 따라붙어 가는데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첫날만 하더라도 복도에서 이렇게 바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시선이 많이 쏠리고 있었다.

딱히 곤란하진 않았다. 괜히 눈치를 살피거나 긴장한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난 가장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살짝 눈인사를 보냈다.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파이널 갈 겁니다!}

{응원할게요!}

그 목소리에 더더욱 시선들이 내게 향했다. 난 걸음에 힘이 실리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향했다.

스튜디오4의 무대 위엔 이미 피아노가 치워져 있고 그 자리에 심사 위원장을 위한 단상이 세팅되어 있었다.

여러 직원이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며 곧 있을 결과 발표를 위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이미 이 광경을 여러 번 봤었다. 세연과 아나스타샤의 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중계를 통해 봤으니까.

그런데 무언가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800석이 넘는 스튜디오4의 좌석들은 연주가 끝나고 나면 휑해진다.

73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의 결과를 발표했었던 1라운드 때엔 조금 나았지만, 하루에 4명씩 결과를 발표하는 준결승에선 함께하는 관계자들이 모두 합쳐도 20명도 안 되기 때문에 텅 비어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언뜻 봐도 100명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준결승 마지막 날이라서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사람이 모여든 것 같은데…… 약간 의아할 정도였다.

어디에 앉아야 할까 잠시 좌석을 내려다보자 루트거가 중앙 쪽으로 날 안내했다.

적당히 괜찮은 자리였고, 그 근처엔 루시 스튜어트와 마누엘 베르니케도 앉아 있었다.

“…….”

옆을 돌아보며 알은체를 하자 두 사람도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루시 곁에 있는 사람들은 호스트 패밀리로 보였고…… 마누엘은 독일에서 가족들과 함께 왔다고 했으니 아마 자기 가족들이리라.

내가 인사하자 옆에서 마누엘에게 질문 세례가 마구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는데, 준결승까지 온 연주자들끼리 서로 인사도 안 할 정도로 안면이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아무튼 그렇게 인사를 나눈 나는 마지막 한 사람도 찾아봤으나 여기선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몇 분 정도 기다렸을 때였다. 홀이 살짝 어두워지고 심사 위원장인 테오도르 블랑이 통역가와 함께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난 심호흡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 결과도 나왔을 테지. 그러니 이젠 받아들일 일만 남았다.

방금 인사한 루시와 마누엘, 모두 같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어지간해선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만 했다.

긴장하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인지 고요 속에서 마이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노이즈만 들렸다.

{좋은 밤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가벼운 인사로 운을 뗀 테오도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슬쩍 바라본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정말 훌륭한 무대가 많았습니다. 오늘 무대에 섰던 4명의 피아니스트 모두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저희 심사 위원단은 긴 토론과 엄격한 심사 끝에 결과를 정해야만 했습니다.}

그 진지한 말은 그렇지 않아도 고요한 홀 안에 더더욱 무게감을 주었다. 으레 하는 멘트에 가까웠지만 심사 위원단의 고뇌가 정면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테오도르는 그 모든 책임감을 쥐고 연설했다.

{파이널 라운드로 가게 될 통과자에겐 축하를, 그렇지 못한 분에겐 앞으로 걸어갈 길에 축복과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연주자라면 실력자가 아닐 리 없다.

다만 콩쿠르의 규칙에서 오는 압력과 긴장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일부는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를 겪었을 수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란 건 정말 중요했다. 그리고 난 적어도 무대에선 운이 많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의상도 딱 맞았고 피아노와 홀의 상태도 예상 그대로 좋았다.

실수도 하지 않았던 건 아무리 내가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행운이 따른 덕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다 받쳐 준 지금, 난 정말로 통과하고 싶었다.

콩쿠르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니 결국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기대를 거는 사람도 정말 많고 앞에서 날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다. 절대 여기에서 떨어질 순 없었다.

이미 결정이 난 사항이란 걸 알면서도 난 나도 모르게 꽉 쥔 양손으로 허벅지를 눌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 6일 차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한 테오도르는 가지고 온 종이를 확인하고는 호명했다.

{미국, 앤서니 마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엄청난 박수 소리나 환호는 없었다. 앤서니는 집에서 이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루트거가 날 붙잡았던 것처럼 그도 아마 담당 직원이 붙잡았을 텐데…… 시간이 길게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예 오지 않은 건 조금 의외였다.

어쨌든 그는 파이널리스트가 되었다.

남은 건 한 자리. 난 멀리 떨어진 루시, 마누엘의 호흡도 모두 멈추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시 기다리는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이름 하나를 더 불렀다.

{러시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아.”

난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파묻혔다.

연주를 마치고 나서도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결과 발표가 이렇게 듣기 힘들 줄은 몰랐다. 그만큼 이 콩쿠르에 나도 모르게 정말 많은 걸 걸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축 늘어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던 나는 간신히 허리를 들었다.

발표를 마친 테오도르는 더 이상 합격자는 없다는 듯 종이를 반 접어 내려놓았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루시와 마누엘이 있는 방향이었다.

두 사람에게 내가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아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시의 경우엔 내가 직접 연주 전에 응원하기도 했었고.

{네가 될 줄 알았어!}

그러나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어떻게 탈락이란 결과를 받고도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이건 그만큼 두 사람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쏟아 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루시가 후련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비로소 기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박수가 약간 잦아든 후에 테오도르가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이상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의 모든 결과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파이널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늦은 밤 모두 감사합니다.}

물론 테오도르가 무대 뒤로 나가고 나서도 내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홀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히고 있었다. 어쩐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먼저 다가온 건 루시와 마누엘이었다. 루시는 날 포옹하며 말했다.

{이런 말은 조금 우습지만…… 내 몫까지 잘해 줘. 난 너한테 걸 테니까. 알겠지?}

{……고마워요, 루시. 열심히 할게요.}

{응. 나도 열심히 할게! 언젠가 또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도록!}

그 대답을 들은 난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번 일을 좌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금방 털고 일어나서 다른 곳을 노려 올 것이다.

내가 지금 잠깐 앞선다고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겠지. 분명히 다른 정상에서 몇 번이고 또 마주칠 사람이란 확신이 들었다.

좁은 피아노 연주자의 세계에서 또 자주 볼 만한 사람은 물론 여기 또 있었다.

루시 다음엔 마누엘이 손을 내밀었다.

{환상적인 무대였어. 파이널도 지켜볼게.}

{좋은 무대를 보여 드릴게요.}

마누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한 손에 힘을 주어 쥐었다가 놓았다.

파이널 무대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또 생겼다. 난 두 사람의 응원도 뇌리에 새겼다.

연주자들과 인사를 마치고 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빠져나오더니 내 근처에 포진했다. 척 봐도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일반 청중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나머지 반은 어디에서 꺼낸 건지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있었다.

기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난 약간 당황했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루트거를 바라보자 그는 앞으로 나서더니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다.

『□□ □□□□ □□□□.』

『□□ □□□□□□!』

『□□□!』

그러자 카메라를 든 몇몇 사람이 부탁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결국 난처하다는 듯 루트거가 다시 날 돌아보았다.

“제발 사진만 찍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군요.”

“인터뷰는 안 하고요?”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할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뮤직 샤펠에 들어가고 나면 파이널리스트들에게 따로 또 취재가 따라붙을 테니…….”

어쨌든 주목받는 건 이제 어쩔 수 없으리라. 난 시원스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사진 정도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후…… 앤서니 마셜이 있었다면 조금 분산되었을 텐데…… 왜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난 더더욱 기자들에게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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